‘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옛날 같으면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성기의 결합 장면이나 남자의 정액을, 수 세기가 흐르고 여러 세대가 지난 요즈음엔 거리에서악수를 나누는 장면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그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옷과 화장품을 고른다.
그에게 편지를 쓴다.
침대 시트를 갈고 방에 꽃을 꽂아놓는다.
다음 만남을 위해 그에게 잊지 않고 말해야 할 것과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들을 메모해둔다.
함께 보낼 저녁을 위해 위스키와 과일, 각종 음식을 사둔다.
그 사람이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지 상상한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가령,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씌어 있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 그 사람과다시 만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나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종종 내가 저지르거나 당할 다소 비극적인 사고나 질병을 상상해서 그것으로 내 욕망을 저울질해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상상을 통해 내가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내 욕망이 운명에 대항할 만큼 큰지 그 정도를 측정해보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완성할 수 있다면 내 집이 불에 타버려도 괜찮아’ 하고 상상하는 식이다.(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이 계속 흐르면 시험에 떨어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듯이,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 채로 여러 날이 지나면 그 사람이 나를 떠난 게 틀림없다고 단정 짓곤 했다.

하지만 똑같은 옷을 다시 입고 그 사람 앞에 나선다는 것이 내겐 그 사람과의 만남을 일종의 완벽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는 일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슈퍼마켓의 계산대나 은행 창구 같은 곳에서 많은 여자들 틈에 끼여 서 있을 때면, 저 여자들도 나처럼 머릿속에 한 남자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말 약속이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헬스클럽의 미용체조 강습, 아이들의 성적표 따위나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의 내겐 그런 종류의 모든 일들이하찮고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요즘은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과거에 그랬었다고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 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부모와 자식은 육체적으로 너무도 가까우면서도 완벽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서로의 성적 본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무척 불편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한 소녀는 원망에 가득 찬 말투로 "엄마의 애인은 엄마가 허황된 꿈만 꾸게 만들어요"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외로운 엄마에게 그보다 더 위안이 되는 일이 있을까?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

평소의 생활습관과 다르게 나는 그런 식으로 돈을 마구 썼다. 하지만 내게 그런 일은 A를 향한 나의 열정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지극히 필요한 정상적인 지출로 생각되었다.

내 지출 목록에는 그 사람을 기다리며 꿈꾸듯 보내버린 시간과 매번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마지막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몸을가누지 못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며 쇠잔해져버린 내 육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글을 쓰는 데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자유일 것이다.

그는 외국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프랑스의 지적이고 예술적인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로 그다지 매료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술 취한 모습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거나 나를 끌어안으며 트림을 해도 말이다. 반대로 꾸밈없고 조금은 천박한 모습으로 그 사람과 내가 화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심 행복했다.

나는 나와의 관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로부터 꽃이나 책을 선물받게 되면 나는 기쁘기보다는, 그 사람은 내게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선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일 테니 말이다. 그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그 사람은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나는 그 사람의 모국어를 전혀 못 한다는 것 때문에 실망은 더욱 컸다. 나는 우리가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임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하려고했던 말을 추론해본 후 그 사람이 한 말을 상황에 맞는 다른 말로 바꿔주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내 집에서 떠날 때 미리 써둔 편지를 직접 그에게 건네주곤 했다. 한 번 읽고 나면 조각조각 찢어서 고속도로에 날려버릴 것이 뻔하지만, 그렇다고 편지 쓰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손안에 있는’ 아내와 나누는 정사에 대해 그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봤지만, 그런 장면을 연상할 때 느껴지는 고통은 어찌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반대로 영화로인해 우리 관계가 그 사람에게 위험하게 생각됐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애써 떨쳐버렸다. 혼외정사를 다룬 영화*는 한결같이 비극으로 끝나게 마련이니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내 태도가 옳은 건지 그 사람이 옳은 건지 굳이 가려낼 필요는 없다. 그저 그사람보다 내가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그 사람과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오는 것일 뿐, 나 스스로 애써 그런 것들을 찾아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완벽한 한가로움을 갈망했다.

내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상상의 이야기에 자유롭게 전념하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것들에 맞설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RER이나 지하철, 혹은 대합실,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팔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나는 앉기만 하면 이내 A를 생각하며 몽상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행복해졌다.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이 쓰이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테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절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들이 읽게 되기 전에 내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상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솔직하게 이 글을 쓸 수가 있다. 열여섯 살 때 일광욕을 한답시고 하루 종일 몸을 태우고, 스무 살 때는 피임도 하지않은 채 겁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 나중 일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

프랑스에서의 A의 직위나 역할은 뭇 여성들의 숭배를 끌어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반면 내게는 그 사람을 내 곁에 붙들어둘 만한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 같았다

파리 시내에 나가게 될 때면 나는 어느거리에서든 그 사람이 옆자리에 여자를 태운 채 차를 몰고 가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만약 그런 경우를 당하더라도 오만하고 무심하게 보이기 위해 짐짓 태연한 척 똑바로 몸을 펴고 걸었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데도 나는 결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탈리앵 거리를 진땀을 흘리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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