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름을 바라보려는 ‘세계로의 열려 있음’, 그리고 우리의 학통과도 어떤 이음점을 찾아보려는 지향과 모색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옛 서원들이 경관 좋은 곳에 그대로 서 있건만, 대체로 내용이 다 비어버린 모습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걸 포섭하면서도 우리 시대를 담아넣는 길이 없을까 하는 꿈을 나름으로 좇아왔지요.

어딘가에 해가 될 일은 없을 듯싶었습니다. 자금이 넉넉하여 돈을 쏟아부어 한 일이 아니고, 지원을 받거나 세금을 써서 벌여놓은 일도 아닙니다. 그저 뜻이 있기에 어찌어찌, 정말이지 하늘이 도와, 조금씩 이루어진 시설들입니다.

외롭고 고단한 주경야독이 수반되지만 시간이 가다보니 귀한 사람들이 찾아오고(먼 곳에 있는 책 집을 우정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 귀한 사람들이지요), 꽃과 나무들이 자라고, 건물도 조금씩 늘어갔습니다.

지속적인 굳은 뜻이나 마스터플랜 없이 지어지는 과시적 시설들에 대한 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집 안에서 젊은이들에게?그저 ‘꿈을 가져라’가 아니라?실물로 보여주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사람이 뜻을 가지면 얼마나 크는가. 둘째, 그런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가.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어 생각하는 가운데 계획이 조금씩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지을 집들을 채울, 방대한 괴테의 글을 열심히 옮기는 중입니다. ‘한 손에서 나온’ 괴테전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괴테의 작품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아직 그 누구도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낸 일을 해가고 있는 중이지요. 그 많은 글을 하나도 빠짐없이 옮길 수야 없고, 선별조차도 이제야 겨우 가능해져서 벌이게 된 일입니다.

이제 와서 찾을 명리名利야 없습니다. 그러나 익히는 데 평생이 걸린 글들을 저만 혼자 읽고 그냥 들고 가버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많이 해두려 합니다.

방황에 빠져 허우적이기도 하는 젊은 날, 겨울산을 오르며 자신의 운명을 헤아려보는 성찰이 두드러진 시편입니다. 이 시는 문득 절로 터져나온 듯한 외침으로 시작됩니다.

매처럼,
무거운 아침 구름 위에
부드럽게 날개 펴고 가만히 뜬 채로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떠돌아라 나의 노래여.

하지만 저기 외따로 가는 자 누구인가?
그가 걷는 길은 덤불숲 속으로 사라진다
그 뒤에서 덤불들이
다시 얽히고
풀이 다시 무성해지고 이윽고
황야가 그를 삼켜버렸다

그대의 현금을 퉁겨
사랑의 아버지여, 음音 하나라도
그의 귀에 들리게 해서 그 마음에 생기를 주소서!
흐린 시선을 열어
황야의
목마른 자 곁에 있는
샘물을 보게 하소서!

심지어 사람 사는 동네 이름이 ‘비참Elend’이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척박했으면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축복 받았어라, 세상 앞에서
증오 없이 자신을 닫는 이

어디서든, 장엄한 자연 속이면 더더욱, 자신을 만나는 순간은 아름답습니다.

기나긴 생애 동안, 아침 5시 반부터 오후 1시까지 글을 쓰고 그 이후에 다른 활동을 시작했지요. 이 어수선한 시기에 사기꾼 이야기 『대大 콥타』를 쓰고 그 바로 전에는 "마흔이 되기 전에 공부 좀 해야겠다"며 이탈리아를 찾아갔고, 거기서 평생작 『파우스트』의 상당 부분을 쓰고 화해의 드라마 『이피게니에』를 마무리하고, 돌아와서는 「로마의 비가」가 쓰이고 식물 및 동물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식물변형론』을 쓰고, 프랑스 왕립 학술원에서 발표된 논문 「악간골顎間骨 연구」의 초안도 잡힙니다. 산업의 중흥에 매진하여 방적 산업을 장려하고 광산을 관리하고, 교육에 힘썼습니다. 예술과 학문을 바탕으로 작은 공국 바이마르를 정신적으로도 이끌어올리고자 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두들 코로나에 경제 문제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뉴스에서 눈을 못 떼고 지낸 요즈음 그 먼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는 건, 그때까지 지방문학이라는 인식을 면치 못했던 자국의 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렸고 정말 많은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그 초인적 성취의 원동력이 어쩌면, 그만큼 컸던 시대에 대한 고뇌가 아니었던가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크게 소리는 못 내는 채로, 한마디 말이 내내 마음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바로 "손 놓지 말고"입니다.

그들의 뜻에 부디 인내와 끈기가 더해지길 빌어봅니다.

젊은 날 세종의 면면이 저랬을 것만 같습니다. 들은 말을 경청하고, 들은 바를 되짚으며 질문함으로써 배움을 마음에 새겼다고 합니다. 한껏 예의를 갖추면서도 또한 깊은 이해에다 자신의 의견을 더하여 피력함으로써, 신하인 스승에 대하여 군주로서의 체통도 지켜나가며 인간과 지식의 총화를 이루어내는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날이 그러했기에, 노련하게 대화합과 창의의 정치를 펼쳐가는 장년과 노년의 현군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주여 마음에 들어하소서
이 작은 집을.
더 크게 지을 수야 있겠지만
더 많은 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제가 서원에 지은 이 작은 집은 소박하지만 거기서 비롯된 기쁨과 의미가 정말이지 너무나 커서, 더 크게 짓는다고 해서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너무도 큰 희생 위에서 쟁취된 것들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다시 무너지기도 하고, 여전히 언제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가 올 것 같기도 합니다.

나중에 도서관 문 닫을 때 허겁지겁 가방과 우체국에서 사둔 짐 꾸릴 종이 박스를 챙겨 들고 있는데, 그 사물함 앞에서 관장님을 또 마주쳤습니다. 서로 쳐다만 보다가 둘 다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요. 그러다 그 사람이 "마지막 일 초까지……"라고 해서 웃고 말았습니다.

괴테의 집 가까이 제 방이 있다는 것도 기쁘지만, 그 집에 머물면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되는 그곳의 문화계, 예술계의 마법을 떨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앞으로 살아갈 길의 방향을 만들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사례로 드신 괴테의 행적을 보면 자기가 모든 세상을 고민하고 자기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저도 그 부분을 정말 닮고 싶더라고요. 자긍심과 능력은 그에게 있어서 상호 고양적인 힘이었던 것 같은데 저도 그런 선순환에 오를 수 있을까 동경해볼 때도 많고요."

"의도하지 않게 선생님의 좋은 일을 거든 셈이 됐나요.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때로는 고되면서도 그래도 힘이 나고 감사하고 보람된 일인 것 같아요! 아닌 한밤중에 늦게까지 선생님께서 정말 고생 많이 하셨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럽고 동경이 되기도 하네요. 그 청년분도 차 한잔에 담긴 선생님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 다시 힘내서 어려움을 헤쳐나가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큰 사람들을 보면, 어쩌면 생의 감각을 가장 치열하게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 같은데, 그걸 포기하도록 요구받던 사람들은 거리에서 그 길의 입구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닌가 해요."

각자 자기 일을 성심껏 해가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걸음도 뗄 줄 아는 우리가, 우리의 뜻에다 꾸준함을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뜨거운 가슴으로 자기 안의 등불을 켜는 시간이야말로 그 모든 것을 위한 성찰의 시간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분노는 요즘같이 역행하는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시국에 필요한 것이되, 그것이 삶의 모든 부분을 잡아먹게 둬서는 안 된다, 자기 삶은, 나머지 영역의 세상은, 또 그 나름대로 굴려가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이 축복받은 평화의 집에서 겨우 사흘을 보냈는데,
나는 마치 벌써 세 주일은 보낸 듯합니다.
그토록 내가 채워졌습니다.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고, 겪은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것으로.
고맙습니다, 전영애!

그 발소리가 작지 않고, 그 발걸음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귀합니다.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래도 몇몇만은 붙들어봅니다.

온 식구가 하나같이 날씬하고, 몸 가볍고, 강인하고, 다정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는 날이 가까워지면, 제가 곧 떠난다는 걸 사람들이 벌써 다들 알고 있습니다. 책을 신청하면, 담당 직원은 아직도 또 신청하느냐고 묻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독일 속담을 빌려 "원래 게으름뱅이는 날 저물 때 가장 부지런하잖아요" 하면서 웃곤 합니다.

평생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 만드는 길이 그것이려니 하면서 성심껏 읽고 쓰고 가르치며 살았는데, 문득 나라가 마냥 진창인 듯, 쪼개질 듯 느껴져 허탈하고 기성세대로서 젊은 사람들한테 미안한 참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글을 쓴 분은, 괴테가 38년간 감독으로 있었던, 바이마르의 유서 깊은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 관장 미하엘 크노헤 씨입니다. 몇 년 전 독일 도서관 학회에 가서 제가 우리의 첫 도서관인 규장각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독일에서 유사하게 중요한 도서관 관장이신 크노헤 박사가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저는 저대로 국내에서 기회만 있으면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을 알려왔습니다. 그러다 그분이 한국에 오셔서 규장각을 직접 둘러보고, 규장각과 한국학 연구소 같은 곳에서 좋은 강연들을 해주시는 일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우리 규장각의 연구원들 여럿이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을 견학하는 식으로 전문인들의 교류가 이어져 역관으로서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서울에 오신 기회에 여백 ‘벗의 집’에도 머무르면서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여기서 만나 서로 다투듯 재빠르고 몸 가볍게 함께 일하며, 함께 밥 지어 먹는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는 가끔씩 뭉클해서 눈시울이 젖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버려졌던 니나가 이룬 너무나도 따뜻한 가정, 정말 잘 커준 세 자녀들의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그렇고, 또 니나가 항암치료를 끝내고 곧바로 찾아온 곳이 이 땅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선발대 혹은 후발대로 이곳저곳에서 달려왔으리라 짐작하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도 제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 우정에 방문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사람들의 환한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봅니다.

무엇을 시작하든 첫 마음을 잃지 않고, 세상을 걱정하며 잡았던 서로의 뜨거운 손을 놓지 말고, 무엇보다 누구든 제자리에서 하던 일에서 손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런 일, 즉 뜻 있는 젊은 사람들이 도약하는 발판이 되는 것, 그게 여백서원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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