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가 맞닥뜨린 답답함은,
마블이 선택한 연속형 서사의
태생적 제약이다."

"저희 마블이 생각하는 슈퍼히어로의 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민간인 보호입니다."

솔직히 나중에는 "훌륭한 뜻을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이만하고 진도를 좀……"이라고 부탁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슈퍼히어로 액션영화의 중대한 태생적 딜레마 하나는, 슈퍼파워를 가진 캐릭터끼리 대결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대량 인명 살상 스펙터클이 오락성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생각하게 만든다. ‘revenge’도 마찬가지지만 동사 ‘avenge’의 직접목적어는 남에게 입은 상처나 피해이지 그것을 끼친 가해자는 아니다. 또 ‘revenge’와 달리 ‘avenge’는 개인적 증오가 아니라 그릇된 힘에 균형을 잃은 상태를 수평으로 되돌리려는 의지가 동기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공격 아닌 방어를 위해서만 포스를 사용한다는 제다이의 교전 수칙처럼, 조스 휘던 감독은 어벤져스를 차별화하는 ‘영웅 헌장’을 각인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촬영 현장에서 인터뷰 기회를 얻은 나는 휘던 감독에게 <어벤져스>와 <캡틴 아메리카> 연작에 거듭 등장하는 "인간은 복종하도록 창조된 존재다" "자유로부터의 자유"라는 표현이 장기적 복선으로서 갖는 의미를 물었더랬다. 조스 휘던의 답은 명료했다. "이 정도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면서 파시즘을 피해 가긴 어렵다.

(…) 슈퍼히어로들은 그 물리적, 도덕적 힘이 우월하고 리더십을 희구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으니 그냥 자기들이 인류에 명령을 내리는 게 맞지 않을까 자문하게 된다. 파시즘으로 통하는 안락함의 유혹이다. 그런 유혹을 반박함으로써 우리는 혼돈과 무질서가 인간성을 질식시키는 완전무결한 질서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블 슈퍼히어로영화는 마지막 30~40분의 전면전 클라이맥스를 포함한 3~4개의 액션 세트 피스를 포기할 수 없다.

결국 관객인 내가 맞닥뜨린 답답함은, 마블이 선택한 연속형 서사serial storytelling의 태생적 제약이다.

결과적으로 헐크뿐 아니라 어벤져스 전원은 마음의 병에 짓눌린 환자처럼 보이게 됐는데, 과거에 얽매인 군상이란 그리 매력 있지 않다.

블랙 위도우에게 헐크의 스토리를 줬다면 자기 힘을 혐오하는 여성이, 캡틴 아메리카의 몫을 줬다면 통제 강박에 빠진 여성이 될 것이다. 호크 아이에 대입하면? 뭐니 뭐니 해도 가정이 우선인 여성 캐릭터가 돼버린다. 블랙 위도우는 유일한 여성 주역이기에 성정치학의 리트머스지가 될 수밖에 없다.

영구적 상실은 없다고 보장된 싸움이, 연대기의 전개와 더불어 관객의 몰입도 심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충분히 즐겼지만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나의 반응은 무수한 덫과 함정을 무사히 통과한 ‘선방’에 대한 안도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2015. 5.

"여럿인 덕분에 여자들은 매사에
한 편일 필요가 없다.
때로 양은 질만큼 중요하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각본에도 참여한 <블랙팬서>는, 식민지배의 흉터 없이 자랑스러운 전통을 보존하며 번영한 가상 국가 와칸다와 착취와 차별로 고통받아온 미국의 아프리칸 디아스포라에 양발을 나눠 디딤으로써 균형을 잡는다.

백인과 맺는 관계를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흑인의 정체성이 저울의 한쪽이고, 백인을 고려하지 않은 "본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머지 한쪽에 올려진다.

고립 속에 번영한 아프리카 국가의 왕자로 귀하게 자라 왕이 된 티찰라는 수많은 아프리카계 인구가 여전히 고통받고 그 고통이 어느 때보다 전 지구적으로 직결된 세계에서, 와칸다의 국가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

미국 오클랜드의 흑인 커뮤니티에서 차별을 겪으며, 미국의 패권주의를 해외에서 실행하는 비밀요원으로 훈련된 킬몽거에게 답은 자명하다. 불평등과 압제를 해소할 길은 오직 무기이고, 와칸다는 전 세계 아프리카계인의 병기창이 될 수 있다.

그는 패하고도 개과천선의 형식으로 신념을 버리지 않으며, 어디에 묻히느냐를 중시하는 와칸다의 문화를 조소하듯 탈출 노예처럼 수장되길 원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열여덟 번째 엔트리라기보다 새로운 유니버스가 통째로 더해진 기분으로 극장을 나섰다.

히어로 영화로서는 무겁고 복잡한 이야기를 짊어진 <블랙팬서>는 고전적인 틀을 택했다. 서사의 모델은 <라이온 킹>, 액세서리는 <007> 시리즈에서 빌렸다.

내가 제일 쾌재를 부른 순간은, 본드걸풍 빨간 드레스로 위장했던 오코예 장군(다나이 구리라)이?못 해 먹겠다는 투로?집어던진 가발이 적의 얼굴을 후려치는 찰나였다.

말을 이어가자면, <블랙팬서>는 인종뿐 아니라 젠더의 균형도 적절한 방식으로 회복한 블록버스터다.

조지 루카스의 프리퀄이 심지어 혈중 미디클로리안 농도로 포스의 서열을 정했던 것을 상기하면 지각변동이다.

7편의 부제에서 ‘깨어난 포스’는 그저 이번엔 제다이 쪽이 서브권을 가졌다는 이정표가 아니라, 은하계의 모든 이름 없는 자들에게 잠재된 포스의 각성이 도래했다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제다이들은 원칙상 결혼하거나 아이를 갖지 않았으므로 포스는 유전될 수 없다.

레이는 <블레이드 러너2049>의 K(라이언 고슬링)와 더불어, 선택받은 한 사람을 중심에 둔 이야기로 지탱되어온 할리우드 SF 판타지가 드디어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고많은 은하계의 무명씨 가운데 레이가 광선검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조건은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와의 연도 없이 오직 자력으로 생존해온 고아로서 잃을 게 없다는 점이다.

레이는 원래 살아가는 것 외의 목적이 없었고 선택된 자의 소명 의식에도 속박되지 않는 백지상태다.

전설적 존재인 루크 앞에서도 레이는 맑고 곧게 믿음에 집중한다.

"나는 나쁜 남자인 당신을 바꿔놓을 수 있어"라는 로맨스 서사의 요소를 읽는 관객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암흑과 빛의 신세대 기수인 두 인물의 공통점은 과거와의 절연이다. 그러나 둘의 동기는 정반대다.

레이는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롭다.

외부에 의지하지 않는 단단한 중심을 가진 레이는 불안하지 않기에, 로즈의 대사처럼 대립하는 대상을 없애지 않고 필요한 바를 취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것을 지키면 족하다.

충성스런 팬이라서 화가 났다고 믿지만 실은 백인 남성 중심 서사에 깊게 동일시해온 교집합도 있겠다.

"모조리 없애버려라!"라는 헉스 장군(도널 글리슨)의 엄포는 하도 여러 번 반복돼 나중에는 별로 무섭지도 않다.

작은 불만들에도 불구하고 <라스트 제다이>는 <스타워즈>가 박물관에 속한 프로젝트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관객은 궁금증을 되돌려받았고, 시리즈는 미지의 미래를 선물 받았다.2018. 1.

"시퀄 3부작은 일명 포스타임 장면을
애장 기념품으로 남긴 채
타투인 행성 지평선 너머로 저물었다."

"포스는 선택받은 자한테만 있거든?" "지금이 몇 세기인데. 아니거든?" "맞거든?"

라이언 존슨은 경멸할 만한 인간이 너의 뿌리라 해도 그 사실이 네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새 세대의 어린 관객에게 타전한 것이다.

레이의 남다른 힘은 그의 정직성과 용기, 관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부장에게 물려받은 상속재산이다(공교롭게도 라이언 존슨이 <라스트 제다이> 직후에 만든 살인 미스터리 <나이브스 아웃>은 물려받은 재산을 상속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해로운 악으로 그린 바 있다).

카일로 렌의 대립항이자 파트너가 되려면 ‘아무나’로는 부족한 것이다! 레아 오르가나 장군이 레이에게 준 "네가 누군지 두려워하지 마라"는 조언의 의미는 변질됐다.

일단 시퀄 3부작은 사랑스런 드로이드 BB-8와 레이와 카일로 렌의 근사한 ‘은하계 페이스타임’, 일명 포스타임 장면을 애장 기념품으로 내게 남긴 채 타투인 행성 지평선 너머로 저물었다.2020.1.

"관객의 이익이 디즈니의 그것과 일치하란 법은 없다.
나는 비교 열위인 실사판을 최초의 <알라딘>으로 만나는
어린이 관객이 조금 불운하다고 생각한다."

파가니니의 악마적 명인기를 방불케 하는 로빈 윌리엄스의 지니 연기는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의 키네틱한 역동성 위에서만 구현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윌 스미스는 로빈 윌리엄스를 극복하는 대신 유쾌한 래퍼 지니가 되기를 택했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와 마블 슈퍼히어로를 접수하고 20세기 폭스사까지 흡수한 지금, 디즈니는 현대의 설화를 독점 공급하는 공장이나 다름없다.

1억 달러(한화 약 1300억 원) 이상을 들여 과거 영화의 낡은 오류를 수정한 리메이크를 굳이 만드느니, 동시대적 발상으로 새롭게 쓴 서사를 쌓아가는 편이 관객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이다.

디즈니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은 대부분 과거에 가부장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디즈니 고전을 사랑해 무수히 리플레이한 어린이들이었다.

영화의 수용은 극장 안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언제나 아이들과 토의할 수 있고, 불완전한 영화를 사랑하는 동시에 문제를 의식할 수 있다.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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