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저나 저 지랄 맞은 시는 언제 번역한다? 날도 추운데 오늘 트윗은 여기서 끝!

시 번역에서 행갈이의 문제. 원문 순서 따라 구문 도치하기보다 우리말로 잘 읽히게 순치하는 편이지만, 무엇보다 정보 제공의 순서가 문제다. 그때그때 다르고 그때마다 불안하다. 옛날엔 담배를 피웠는데 이젠 트윗에 들어온다. 오늘은 한 번만 들어왔다. 힘들다.

알려지지 않은 피해, 의식되지 않은 피해를 말할 때는 피해자의 관점이 필요불가결하다. 그러나 잘 알려진 피해, 누구나 의식하는 피해는 서술이나 관찰에 피해자의 관점은 사실상 불필요할 때가 많다. 가해의 양태는 다양한데 피해의 양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 이간질에 넘어간 건지, 이간질을 이용하자는 건지.

모든 범죄에는 권력관계가 있다. 국가 권력 젠더 권력 같은 상시 권력도 있지만, 무기와 빈손, 노리는 자와 방심한 자 간의 일시 권력도 있다. 가족 내 권력, 젠더 권력 범죄는 은폐 용인되기 쉽지만, 권력이 폭력으로 변질되는 계기의 고찰이 은폐를 돕는 건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가난한 동네를 그린 화가의 말, 가난한 동네에서 새누리당 찍은 사람은 자기가 더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민주당 찍은 사람을 무시한단다.

용어를 겉핥기로 배운 사람일수록 그 용어를 물신화하기 쉽다. 모든 사안이 그 용어로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의 말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으면 화를 낸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안 다니는 사람에게 화를 내듯이.

다들 핵가족으로 살면서도 풍속 의식은 여전히 대가족 제도에 매어 있다. 그래서 핵가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가장 심각한 것이 육아 문제. 애를 맡기려 시가 친정 헤매고 다니던 제자들 중 여럿이 공부를 포기했다.

애를 최소한 반은 공공으로 키운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한, 나라는 현재의 농촌처럼 노인만 남을 것이다.

여당을 지지해야 세게 보인다는 가난한 동네 노인들의 의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이론서의 복잡한 문장이 이상하게 번역되는 것은 ‘은는이가’의 쓰임이 서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잘 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어에 관계절이 생기기 전까지는.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 비해 랭보의 시가 어떻게 중요한지 설명하긴 참 어렵다. 감각의 전면적, 장기적, 합리적 착란이라는 말은 어떤 체험에 대한 묘사이지 시법은 아니다. 사람들은 랭보가 애로서 시를 썼기에 깔보기도 한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군복무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포기한 젊은이가 많다. 그러나 징병제의 모순은 남자들만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법의 이름으로 감춰지는 모순은 최약자들을 속죄양으로 삼는다. 여성과 장애인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예비역들이 불법 면제자들을 영웅시하는 경우도 있다.

징병제는 모병제로 바뀌기 전까지 젊은이들의 자기 발전에 크게 차질을 줄뿐더러 늘 여성 차별의 기제로 남기 쉽다.

보들레르는 연애 관계에서 더 사랑하는 쪽은 환자와 같고 비교적 덜 사랑하는 쪽은 의사와 같다고 말했다. 랭보와 베를렌의 동성애 관계에서 베를렌이 자주 찌질하게 보이는 것은 더 사랑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더 많으면서……

문재인에게 ‘노동 개혁 입에 담지도 말라’는 김순덕의 칼럼은 중남미의 정치적 타락과 권력의 착취 등은 말하지 않은 채 모든 잘못이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거짓말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매끄럽게 잘 써진 문장으로.

서사에서, 어떤 개별 주제가 보편성을 띤다는 말은 그 작품이 비슷한 주제의 여러 작품 가운데 하나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개별 주제가 보편성의 이해에, 또는 재정의에 어떤 힘을 발휘했느냐일 것이다.

나는 상대방의 말에서 어떤 재능을 느끼거나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다고 생각하면 팔로잉해왔으며, 내 말을 귀찮아하면 블락했다. 내가 블락한 사람 가운데는 내 트윗을 개소리라고 한 사람도 있고 그걸 퍼나른 사람도 있다.

학부 때 교수 가운데 한 분이 수녀셨다. 다른 프랑스인 수녀와 그분의 대화 중 성테레사의 환희와 같은 환희의 체험담을 엿들었다. 지금도 두 분 수녀님의 환희의 고백과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의 환희의 비판, 양쪽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을 하면서 가능한 한 글자를 줄이고 있는 나를 본다. 트윗의 심각한 후유증이다.

나도 글씨를 잘 쓰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손글씨는 보고 있기가 괴롭다. 어떤 문체가 마치 음치의 노래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줄 때처럼.

달필은 늘 보기 좋지만 악필이 항상 보기 싫은 것은 아니다. 고인이 된 소설가 최모씨의 원고를 본 적이 있다. 악필 중의 악필이었지만 어떤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친구 하나는 초등학생처럼 글씨를 쓰지만 그 글씨에 분명한 기품이 있다.

『적과 흑』은 사회 소설이지만 뛰어난 연애 소설이기도 하다. 좋은 연애 소설은 사회적 의식개혁의 시발이 된다. 『위험한 관계』 『마농레스코』 『파리의 노틀담』 『감정교육』 『사랑의 한 페이지』…… 이광수의 『무정』도 거기 들어간다.

내가 작년에 알라딘과 예스24에서 『어린 왕자』만 37종을 구매했구나. 내 번역은 그렇고, 김화영 선생, 전성자 선생 번역이 역시 좋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프랑스에서 처음 상영했을 때 파리의 한 신문이 한국인들도 서구인들만큼 깊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썼다 한다. 국내의 한 신문이 이를 칭찬의 말인 것처럼 전하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갑자기 원문을 확인하고 싶은데 어렵겠지.

서울에 와서 종종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전라도 사람도 좋은 사람은 참 좋아요’였다. 이동진씨 말을 이런 종류의 말로 받아들여야 할지 나로선 판단이 어렵다. 다만 연애 서사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계기를 얻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책을 한 권 쓸 수도.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공적으로 말할 땐 자기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거의 그렇게 생각했다. 초현실주의 작품이라는 말에 면허를 낸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초현실적이라는 말은 브르통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우리 세대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남자들이, 또는 여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온갖 몸부림을 다 치면서 최상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설렁설렁 일을 하면서 거의 한 번도 실수 없이 최상에 가까운 작업을 한다. 양쪽이 서로 부러워한다.

고양이들이 떼를 쓰며, 나를 사료 그릇 앞으로 끌고 와서 밥을 먹는다. 딴생각을 하다보니 나만 사료 그릇 앞에 앉아 있다.

한국어로는 어려운 책을 읽은 적이 없는데 유학 가서 외국어로 어려운 책을 읽고 온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번역한 책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

트윗에서 ‘매우 납득했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장난기를 담은 문장이지만, ‘매우 쳐라’가 있으니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겠다.

단편 하나에 ‘꼬신다’는 말이 다섯 번도 더 나오는데, 읽기에 거북하다. 유혹한다, 작업한다와 어떻게 다를까. 상대를 ‘얕잡아보면서’라는 뜻이 덧붙여지는 게 아닐까.

2014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지 않아 이제야 정산을 하니 기백만 원의 세금을 내야 한단다. 기간 내 신고를 했으면 오히려 40여만 원을 환급받았을 텐데. 그때 나는 수술을 받고 갓 퇴원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내 사정일 뿐이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들이 많은 것 같다. 누가 고양이에게 욕을 하니, 지나가던 낯선 사람, 누구에게 늘 개 취급을 당하던 사람이 자기에게 욕을 한 것이라며 다짜고짜 화를 낸다. 지금 그런 트윗이 나와 내 글을 알티한 사람에게 동시에 날아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니 원고 하나 마감을 넘겼다. 긴 글도 아니고 써야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연휴라 마음이 편하다. 원고를 쓸 시간이 왔다는 생각. 직장을 가졌던 사람의 오래된 습관이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같은 가격에 서비스의 질은 낮다. 너나 나나 똑같은 처지에 무슨 서비스냐는 생각 탓도 있고, 업소의 주인이 좋은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경우도 있다. 대신 밥이나 국을 한 그릇씩 더 준다든지 그런 것은 있다.

보통 논문이 말하려는 것은 보편성이 갖는 현재성이고, 비평이 말하려는 것은 현재성이 지향하는 보편성이다.

책을 좀 읽은 학생이 작품 분석 수업에 심하게 저항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특별한 감동이 보편성에 흡수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 학생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그 보편성이 늘 흔들린다는 것이다.

출간한 지 상당한 기간이 지나지 않은 작품은 수업이나 논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그 작품의 보편성을 의심해서이기도 하지만, 인기 있는 미혼이 결혼을 미루는 것과 같은 이유도 있었다.

90년대부터 기부금 입학 제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여론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수도권의 이름난 대학에는 부자들만 들어갈 수 있도록 입시 제도가 바뀌었다. 마치 사람마다 지닌 다양한 재능으로 대학 갈 수 있을 것처럼 속이면서.

고려대를 마지막으로 입시에서 논술 고사가 없어질 전망이다. 수능 시대에, 부자들에게 논술 고사는 돈을 들여도 그만큼 성과가 나지 않아 대비하기가 가장 어려운 시험이었다.

사치도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사치에 대한 욕구는 보들레르식으로 말한다면 인간 정신의 불멸성에 관한 증거다. 이런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생존 밖으로 넘치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삶이 삶이다. 하다못해 연필이라도 좋은 것을 사서 써야 한다.

옛날에 올린 트윗이 리트윗되고 있으면, 항상 민망하다. 매미가 제 허물을 볼 때도 이런 기분일 것이다. 매미한테도 기분 같은 것이 있다면.

『말도로르의 노래』를 번역하는데 ‘보람 없는 해방작업l’operation de la delivrance negative’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이미 죽었는데 그 시체를 애써 끌어내기. 몇 년 전이었더라면 이 정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5원소〉나 〈스타워즈〉를 보면서 늘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그 절대악이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자는 건지. 그게 절대라서 만든 사람들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오늘 아폴리네르 강의를 끝으로 시민행성 강의가 모두 끝났다. 강의중 초기 자유시의 걸작인 「앙드레 살몽의 결혼식에서 읊은 시」를 성우 윤소라 선생이 읽어주셨다. 사람들이 다 감동을 받았다. 낭독의 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날카로울수록 너그러운 정신을 갖게 된다. 날카로울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보는 척한다는 말이 아니라 헛된 표준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신 없는 눈이 표준에 의지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언어 고찰은 탁월했다. 내가 번역에 어떤 이론 같은 것을 만들 때, 에코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자문해본 적이 많다. 『장미의 이름으로』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의문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비극은 억압적이며 희극은 해방 지향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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