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에 험한 말로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어도 내 뜻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이제는 그런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 말없이 블락한다. 어제와 오늘 33개의 블락을 했다. 별로 많은 수도 아니다.

한국어에서 쌍점(:)이나 쌍반점(;)은 앞말과 붙여 쓰고 뒷말과 띄어 쓴다. 그러나 모아쓰기 하는 한글에서 쌍점, 쌍반점을 붙여 쓰면 그 존재감이 약해진다. 영어 용법을 따른 것인데, 같은 로마자라도 철자 부호가 많은 프랑스어에서는 양쪽을 모두 띄어 쓴다.

당신은 자신이 착하고 순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돌쇠 철학이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게다가 당신은 그렇게 착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스스로 우둔함을 드러낼 뿐인 빈정거림들.

성실한 번역자라면 그의 번역에 오류가 있건 없건 그의 선택을 일단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한동안 종적이 묘연하던 김이듬 시인과 연락이 닿았다. 프랑스 거처서 슬로베니아에 들어가 그곳 대학에서 한국 시를 강의하고 있단다. 여기서는 강사 자리 하나라도 누굴 밀어내고 들어가야 하기에, 헬조선을 피해 자진 망명중이라고. 춥고 외롭다고 한다.

최승자, 김혜순, 최정례, 김소월, 윤동주, 마당 등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그걸 슬로베니아 학생이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번역도 하고 있단다. 슬로베니아에 한국 시가 이렇게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는 듯.

이럴 수가! 『어린 왕자』 번역이 또하나 나온 것 같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지금 받아보니 필사 다이어리 북이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게 있다. 상대에게 유일한 선택만을 허용하다가 마침내 궁이 피할 수 없게 몰고 가는 수. 그런데 유일한 선택밖에는 할 수 없는 외골수에 스스로 빠진다면. 학문이나 예술에서는 그 길이 위대한 길이 될 수도 있지만, 정치에서는?

온도가 낮다는 뜻이 아니라 상쾌하다는 뜻이다. 불쾌감을 날려버리고 훤하게 트인 느낌, ‘시원하다’가 특히 음식에 적용될 때는 그 내용을 짐작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한국 사람만 그 감을 잡을 수 있다.

서구어로 된 시를 번역하는 중에 호격 명사 뒤에 수식이기도 하고 서술이기도 한 관계절이 두세 개 붙어 있을 때, 물론 번역가에게는 여러 가지 처방이 있지만, 어떤 처방도 그의 막힌 숨통을 터주지 못하고, 제 직업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막아주지 못한다.

난 〈스타워즈〉 볼 때마다 광선 검이 형광등처럼 보여서, 저게 언제 깨지나 걱정하느라고 몰입을 못한다.

상징주의와 관련된 텍스트에서 영어의 beauty나 불어의 beaut? 같은 말은 고유 명사나 다름없다. 한자를 쓸 때는 ‘美’, 최소한 ‘미(美)’라고 옮겼는데, 이제 ‘아름다움’이라고 쓰려니 허전한 마음이 없지 않다.

옛날 제자 하나가 불우한 처지에서 시를 쓴다고 해서 내가 주관하던 잡지에 발표 기회를 주었지만 시가 더 좋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잡지 편집인도 아닌 내게 발표를 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과 협박의 전화를 내내 걸어와서 차단했다. 마음이 좋지 않다.

문단에서 어느 문인이 잘나가면 그건 누가 뒤를 봐줬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문인은 원망으로 평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문인 생활을 접어야 한다. 문학에서도 행운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행운이 올 때 잡을 수 있는 능력이다.

노년에 들어 외워야 할 숫자가 바뀐다는 것도 인생의 불행 가운데 하나다. 새 우편번호는 끝내 외우지 못하고 말 것 같다.

"예절과 환상, 미학에 대한 고려가 없이 글을 쓰는 방식, 이 방식이 곧 인간관이 된다." 이런 메모가 수첩에 있는데, 누굴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다. 카드는 남을 위해 쓰는 것이다, 30분만 지나면 나도 남이다.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이렇게 배웠지.

말하지 않은 생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지극히 하찮은 생각이라도 그래서 생각에는 늘 의무가 따르고 그 의무는 귀찮거나 버겁다. 평행 우주에 관해서들 말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평행 두뇌도 있겠지. 그러나 그 두뇌도 평행하기 귀찮고 버겁겠다.

‘이철수의 집’에서 날마다 보내주는 이메일 엽서, 오늘은 잎 떨어져 앙상한 대추나무 그림인데, 그게 꼭 낡은 집 벽의 균열처럼 보인다. 생명은 우주에 난 균열인지도 모르겠다.

소라넷에 관한 인터넷 글들을 살펴보았다. 성이 억압된 사회일수록 남자의 성범죄를 여자의 책임으로 돌리기 쉽다. 소라넷 폐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성을 상품화하고 폭력 대상으로 삼는 일을 성의 해방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생선 요리를 잘했지만 입에 대지 않으셨다. 비린내를 탓했지만, 실은 그게 기분좋은 비린내와 함께 목을 넘어갈 때의 쾌감, 그 쾌감이 불러오는, 섹스를 포함한 온갖 육체적 관능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50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성에 대한 억압은 젠더 권력을 내면화한다.

10억 엔. 좀 오래된 농담에, 트럭 뒤에 숨어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트럭이 후진하는 경우를 ‘당황스럽다’고 하고, 전진해서 빠져나가버린 경우를 ‘황당하다’고 한다는 말이 있다. 이건 트럭이 후진하는 척하다가 앞으로 달려가버린 경우와 같다.

쉽게 설명하면 소승은 택시나 자가용으로 혼자 가는 것이고 대승은 기차나 버스로 함께 가는 것이다. 어디를? 깨달음의 길을. 위안부 문제에 소승 대승이 왜 나와. 한 나라 외교부가 쓰는 말이라면 대충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경우에 딱 맞는 말이어야 한다.

내 어머니의 생선 요리와 육체적 관능에 대한 트윗을 올렸더니, 그게 ‘주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농담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육체적 관능에 대한 성찰과 자각이 예술적 감수성 함양의 시작이다.

트친들의 여망을 받아들여 새해애도 오타를 간간이 흘리겠습니다. 새해 행복하세요. 행복이 없는 시대일수록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답니다.

얼마 전 트윗에서 황씨 문인들을 열거하고, 자랑스럽게 이게 모두 황인데, "황교안 황우여도 황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어떤 분이 새벽에 그 트윗을 인용 알티하며, 같은 황씨라고 황교안을 두둔한다며 마구 욕을 퍼부었다. 비문해가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

서쪽 끝 섬 격렬비열도의 이름이 들어간 가장 아름다운 말은 박정대 시집 제목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시집에 그 제목의 시는 없지만, 격렬하고 비열했던 청춘의 회한은 많고, 「음악」이라는 시에 바로 그 말이 들어 있다.

무언가 켕겨서 시집을 찾아 열어보니 시의 제목이 ‘음악’이 아니라 ‘음악들’이다.

박목월의 「윤사월」에 관해 트윗을 올리자 표절 트윗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황당하다 생각했는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나이를 생각하니.

미국에서 아구찜을 할 때 watercress를 미나리 대신 넣는단 트윗 보니, 랭보의 「골짜기에 잠든 사람」에 나오는 cresson이 생각난다. 두 사전을 찾아보니 모두 ‘물냉이’다. 그런데 물냉이는 국어사전에 없다. 요즘 한국에서 재배도 한다는데.

화살로 바위를 뚫는 사람을 반신(反神)이라고 하는데, 편집증 환자라는 뜻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컴에서 뭘 찾다보니 옛날 저장해놓은 2001도판 〈소오강호〉가 나온다. 클릭을 하니 닳고 닳은 이야기가 화면에 뜬다. 보는 둥 마는 둥 몇 회를 보고 있다. 시간을 그저 버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허핑턴에 결혼 생활 36년 36 깨달음이라는 내용의 글에 그 항목 가운데 하나로 이혼하자 대신에 ‘짜증난다’라 말하라고 하는데, 나더러 선생질을 한 번 더 하라고 하면 짜증난다 대신에 ‘속상하다’라고 말하라고 하겠다.

어제야 비로소 새로 정리된 교보문고 광화문 매장을 가보았다. 한없이 넓은 느낌. 시내 한복판에 이런 책방을 가지고 있고, 서적에 전문 지식을 지닌 직원들이 거기서 일하고 있고, 책을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다는 것은 확실히 서울의 자랑거리다.

빈약하고 저열한 상상력은 늘 악의를 동반한다. 세상에 대한 배려와 선의 자체가 상상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모진 소리를 상상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 재능의 부족을 말할 뿐이다.

역서에 "그는 성공적으로 옷을 벗었다"는 문장이 있다. ‘차례차례’겠지 하고 원문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successivement이다. 번역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 말이 안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둘째, 사전 찾아보기.

오늘이 금연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금연 보조제도 다른 기호품도 없이 독한 마음만으로 결국 성공했다. 중간의 큰 수술이 사실상 도움을 주었고, 트위터의 공고가 퇴로를 차단했으며, 이 정부에 담뱃세 내지 않겠다는 결심이 백배의 용기를 주었다.

어떤 비평가가 잡지에 좋은 시의 기준에 관해 길게 썼다. 요약하자면 지가 이해하면 좋은 시고 저한테 이해 안 되거나 낯설면 나쁜 시다. 그는 분명 동성애는 지 취미에 안 맞으니 나쁜 거고 페미니스트들은 지 엄마와 다르니 나쁜 여자들이라고 생각하리라.

내가 손은 자주 씻는 게 좋다고 했다고 나를 꼰대라고 부르고 블락을 통고한 사람이 있다. 블락이야 자기 맘이고 통고할 일도 아니지만, 이런 경우 꼰대라는 말은 명백한 혐오 발언이다.

문학이건 다른 예술 장르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도, 어느 길로 가야 한다는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개개의 작업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게 왜 필요한지를 묻는 것이다.

어떤 번역본들을 보면 핵심 문장을 잘못 파악해서 그 이후는 오직 혼란이다. 번역한 사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어두운 저승길을 헤메면서도 본인은 아마 내용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어떤 위선적 정신 구조가 이런 레버넌트를 만드는 것 같다.

어쩌다보니 토요판 한겨레 시 기획을 오늘 아침에야 읽게 된다. 선정위원씩이나 되면서.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심보선의 70행 넘는 시를 생략 없이 전재했다. 소리 내어 읽으면 좋은 시. 산울림의 노랫말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도.

익명은 예술적 재능과 연결될 때 현실에서 벗어난 조건들을 만든다. 그러나 트윗에서는 무슨 권력과 같다. 익명이라도 자기가 받은 모욕엔 불같이 화를 내고 남에게 상처를 주었을 땐 명백한 잘못을 알고도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예술가는 아니니까.

낭만주의니 사실주의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게 낭만주의고, 이런 경우에 엄마에겐 이런 방법이 있다, 또는 아무 방법도 없다, 이게 사실주의다.

한국 음식이 너무 달고 짜고 매워졌다. 방송이 추천하는 음식에도 그런 음식이 많다. 음식물 섭취는 인간이 사물과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일인데, 몇 가지 맛이 다른 맛을 눌러버리면 물성에 대한 파악이 그만큼 제한되고 상상력이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 교육에 가장 시급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 살림하고 조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전시회 같은 것도 해야 한다. 물론 남녀 구분 없이.

이제 대답할 시간이 된 것 같다. 내가 〈쓰르라미 울 적에〉를 좋아한 것은 치유 기능과는 관계가 없다. 이야기 하나를 여러 가닥으로 펼쳐가는 서사의 복수성 때문에 관심을 가졌고, 거기서 비평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고…… 한두 번 글에 쓰기도 했다.

부천 아동 시신 훼손 사건. 아들을 때려죽인 아버지는 일종의 자살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저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아들을 대신 희생으로 삼은 것이다. 나 어릴 적에 이런 종류의 부모들 많이 보았다. 부모들이 애들한테 죽여버린다는 소리를 일상사로 했으니.

분노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노하기 위해서는 분노의 사용법도 알아야 한다. 분노에 먹혀버린 나머지,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이해하려고 하기도 전에 화부터 낸다면, 분노를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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