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은 주고받는 과정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서로 좋다는 것, 나만 좋으면 안된다는 것, 즉 호혜성이다.

내게 사랑에 관한 최고의 정의는 ‘서로 시간을 합치는 것’이다.

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산산이 흩어졌을 시간을 합치고 합쳐서 우리가 만나지 못했더라면 시도하지 못했을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그 관계 안에서 각자가 더 분발할 수 있다면, 각자가 세월이 흐를수록(옛날이 좋았어,가 아니라) 더욱 새로워질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후회 없이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내가 아닐 거야."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동시대에 태어나야만 하고 만나야만 한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처럼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면서 훈수만 두고 품평만 하고 해석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손은 주머니에 넣고, 주머니에서 손가락만 튕기면서. 물론 더 나쁜 경우도 있다. 자기를 위해 남의 손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그렇다.

개구리 앞에서 꿈쩍도 않고 서 있는 인간의 모습도 등장한다. "내가 움직이면 개구리가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이 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시야의 확장이다. 그 자신을 다른 생물들에게 투사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인류의 고독하고 장대한 힘이며 확장의 궁극적인 전형이다."

"사람은 정말 변할 수 있을까?"
"응, 믿어. 단 조건이 있어. 애써 피했던 질문을 다시 만나기로 마음먹으면……"
내가 내 말에 책임져야 할 순간을 맞은 것이다.

『아연 소년들』은 전쟁터에서 죽어 아연관에 담겨온 소년 병사들을 말한다. 그 소년들은 죽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련에서 9학년에 다니던 아이들이었다. 죽어갈 때는 하나같이 "엄마"를 불렀다. 책 속에는 아프간에 파병되었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이 겪은 일을 표현할 말을 찾는 데 고통을 겪는다.

타인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것에도 질문을 던져야 하나? 우리가 진실에 그토록 무관심하다면 그 많은 글과 뉴스, 이야기들은 다 무엇인가?

우리가 비극을 대하는 태도는 이렇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어,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나한테 뭐 그런 일이 생기겠어? 하지만 누가 알아? 다행히 나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았어…… 안타깝게도 타인과 나의 간극은 이렇게나 크다. 타인의 불행 앞에서 느끼는 이상한 안도감, 그 일을 내가 겪지 않았다는,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할 기쁨이 있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조차(특히 내가 부러워하던 사람이라면) 기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비극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룬 성취는 우리를 쓸쓸하게 하기도 한다.

"세상이 그렇지 뭐. 억울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 밖에 나가봐, 억울한 사람 널려 있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편성을 끌어들인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하냐와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잔인한 면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타인의 아픔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타인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도 빈약하기 짝이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진다.

대체 누가 이렇게 미운 한국말을 만든 것인가? 돈을 말하면서 우리 마음은 너무 가난해졌다. 욕망은 전혀 관용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슬픈 사람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일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은밀한 두려움이 되어간다.

멸시하면서 멸시당할까 두려워한다. 공격하면서 치유를 말한다.

찰스 부코스키의 말처럼 우리는 폭탄과 지옥과 수치를 함께 안고 살고 있다

시몬느 베이유는 불행한 인간에 대해 깊은 주의를 갖고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는 힘을 가졌는가에 인간다움의 자격이 달려 있다고 했지만 나도 숱하게 인색하게 내 마음을 나눠주곤 한다.

오늘 내가 타인에게 나눠주기를 아까워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니, 내가 그토록 공감받고 이해받기를 원했던 사람에게 끝내 그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우리는 한 사람을 얼마든지 축소한다.
그 순간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알겠어! 그래서 그랬군!"
비로소 ‘공감대’가 형성된다.
쿤데라는 바로 이런 모습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어리석음을 참을 수 없어서 터뜨리는 웃음. 그는 한 사람의 개성, 정체성, 가치, 이것들을 파괴하여 무의미한 획일성으로 만드는 것이 악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은 한 사람을 하나의 원인으로, 당위로 환원시키지 않는 것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 편리한 방편 뒤로 숨어든 사람의 시선이다.

내가 타인을 정당하게 대하지 못한다면 무슨 근거로 나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해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다른 사람이 피상적인 시선으로만 본다면 슬프고 화나지 않는가?

인간은 어떤 일을 겪든 겪은 일에 대항해서 자기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면 다시는 회복 불가능하게 될까?

당해보지 않고도 아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도스또옙스끼의 삶은 가난, 간질, 아내와 아이의 죽음, 끝없이 고통스러웠지만 그에게는 그 짐을 피하려는 열정이 아니라 자신의 짐만으로도 무거운데 다른 가난하고 비참한 전 인류의 짐을 짊어지려는 열정이 있었다. 그에게는 삶의 고통, 그것이 보이고 들리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피눈물로부터 온 인류를 위한 미래의 인간형을 만들려고 했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지만 부드럽게 말한다. ‘아이야, 러시아에서 너는 고운 꽃이 될 여유가 없다. 러시아에서 너는 우엉이나 민들레가 되어야 해.’

영혼은 변함없이 혼란이고 모순이고 경멸할 만한 것이지만 매우 심오한 것일 수 있다. 소설에서 그는 진실한 말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 진실한 말은 이렇게 주어진다. ‘우리는 풍요로움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과 부족함으로 글을 쓴다.’ 우리의 말도, 목소리도 그렇게 다가오고 주어진다.

워즈워스의 말대로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는 자들이 성급하게 인간을 악하다고 단정한다 해도 우리의 사랑으로 장관이 펼쳐지고 사랑이 사라지면 우리는 먼지와 같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에는 형용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견디는 사랑, 버티는 사랑, 관대한 사랑, 퍼주는 사랑, 파격적인 사랑, 셈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랑, 초연한 사랑이 필요하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우리 각자는 고통을 느끼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우리 각자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헤르만 헤세는 고통은 자기에게만 무겁고 자기만이 뚫을 수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라고 했는데 실제로 나의 많은 고통이 그랬다.

너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냐, 너 자신에게 일어나길 원하는 일이 무엇이냐,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원하고 있느냐, 타인을 볼 때 무엇을 제일 먼저 보느냐, 무엇을 보기에 타인은 행복할 것이라고 혹은 불행할 것이라고 느끼느냐?

그녀의 열정, 출구를 찾지 못해 고통받는 진실한 마음이 진부한 행복관과 만났기 때문에 어리석어지고 말았고 열정도 거짓 열정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위기의 순간마다 한번도 새로운 모습을 보이질 못했다. 그래서 나보꼬프는 그녀의 잘못은 간통이 아니라 진부함이라고 했다.

열정, 행복이라 하면 다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살다가 그때 처음 어리석은 열정, 진부한 행복관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돌발적으로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남자, 새로운 여자, 새로운 직업, 대체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행복관을, 사랑관을, 꿈을, 욕망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주 신선한 충격 속에서 알게 되었다.

뻬소아는 신들이 부디 내 꿈을 다른 것으로 바꿔주시길, 그러나 꿈을 꾸는 능력만은 남겨주시길!이라고 말했는데 『마담 보바리』를 읽은 내 마음이 딱 그랬다. 마담 보바리는 휘트먼이 말한 것처럼 내 눈에서 눈곱을 씼어주었다.

우리는 너무 별로인 곳도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성』의 주제는 측량기사는 성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측량기사와는 딱 반대로 살라는 것이다. 측량기사가 결코 하지 않은 일을 하라. 즉 당신이 갇혀 있는 마음의 성에서 탈출하라.

슬라보예 지젝은 당신의 지옥을 옮겨라!라고 했다. 직시해야 하는 것은 현실만은 아니다. 내 마음 저 아래서 은밀히 나를 움직이는 환상도 직시해야만 했다. 내가 그것을 직시하려고 했을 때, 그럴 필요도 없이 나는 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안똔 체호프가 말한 대로 나는 뭐 대단한 일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찮은 웅덩이, 피상성, 속물성 때문에 괴로웠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안똔 체호프가 알려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의 답을 찾는 것은 스스로의 도덕성을 찾는 것과도 같다.

리어 왕은 최악의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했다. 오르떼가 이 가세뜨는 왜 고통을 두려워하지? 위기는 변화인데……라고 반문했다. 예이츠는 위기의 순간을 자아를 형성하는 기회로 삼았다.

우리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가장 자유로울 수도 있다.

보르헤스는 60일 이내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했다. 세상은 실재하는 것이 분명한데 왜 이렇게 우리의 발을 걸려 넘어뜨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카프카는 익사하지 않도록 고개를 들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고통은 나에게만 너무 무겁고 남에게는 너무 가볍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계속해서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추스르고 일어나서 다시 나아가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일생 동안 한 일이라고 했다.

존 버저는 사랑은 상처로부터의 일시적 구원, 행복은 불행으로부터의 일시적 면제라고 했다.

싸뮈엘 베께뜨는 그나마 재치 있는 대화를 할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쉼보르스카는 삶이 뜻대로 안될 때 그때 영혼이 생긴다고 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이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그런 고통이 세상에 없어야 하므로 다른 사람 누구도, 아무도 고통을 겪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정한 사람들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묻지 않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않으면 안되는가?’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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