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장과 노마님이 앞쪽 정찬실에서 8시에 아침을 먹던 시절에 그들 가족은 하얀 식탁보가 깔린 기다란 테이블에 서로 마주 앉아 본때 있는 집안 출신들이 쓰는 발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오믈렛을, 아니면 귀퉁이에 크림을 곁들인 훈제 쇠고기를 얹은 토스트를, 또는 소금에 절인 고등어와 삶은 감자를 먹었다. 딸기나 그레이프프루트가 식탁에 올라오기도 했다.

노마님은 봉투가 불룩할 정도로 긴 편지를 써서 동부의 친척들에게 보냈다. 친척들은 그런 편지를 받으면 종종 궁금해했다. 그들 부부는 대체 왜 서부로 갔을까. 소를 보면 헤러퍼드종인지 쇼트혼종인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승마도 사냥도 하지 않는, 그저 조촐한 의식만 정성껏 행하는 그들이.

로즈는 몰래 잔에다 술을 따르는 남편의 모습을 목격했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조니의 눈빛은 벌거벗은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말을 더듬었다. 말을 더듬는 남편을 보며 로즈는 깜짝 놀랐다. 술을 마신다는 이유로 자신이 남편을 비난한 적은 그때껏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터는 불안이 사람의 머리를 둘로 쪼개기도 한다는 것을 자기 아버지의 책에서 읽은 모양이었다.

매일 아침 로즈는 점심 식사 자리를 어떻게 견딜지 걱정했고, 매일 점심을 먹고 나서는 저녁 식사 자리를 걱정했다. 필과 함께 테이블 앞에 앉을 생각 때문에, 그의 침묵과 그의 상스러움, 머리를 긁고 코를 킁킁대는 그의 버릇, 자신을 무시하고 조지에게만 말을 거는 그의 무례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의자를 테이블에서 끌어당기고 다리를 등받이 너머로 넘겨서 앉는 필의 모습은 머리에 너무나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쇠고기를 ‘소 살덩이’로 부르는 그의 말버릇 또한. 만약 이 터무니없는 두통의 원인이 그것이라면, 이 고통의 끝은 어디일까?

어떻게든, 로즈는 필과 대화를 해야 했다. 잘 지내고 싶다는 뜻을 다시 전하고 그를 이해시켜야 했다. 결국에는 그도 인간이었으므로. 필도 인간이지 않은가?

필의 호의가 있으면 로즈는 그의 헝클어진 머리도, 그에게서 풍기는 묘한 냄새도, 의자를 뒤로 당기고 등받이 위로 다리를 넘겨 앉는 버릇도, 로즈가 피아노를 칠 때 밴조를 따라 치는 괴상한 습관도 ? 그리고 무엇보다 ? 좀처럼 씻는 법이 없는 그의 두 손도 모두 흔쾌히 못 본 척할 작정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 고기는 오로지 쇠고기뿐이라고.

로즈는 불확실한 미래에 모든 것을 바치는 아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 미래를 위해 아들이 하는 일련의 행동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가 어머니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 나중에 뭐가 되겠어요?"

로즈가 술기운 덕분에 느끼는 차분한 기분은 감미로울 정도였다.

테이블에 먼저 앉든 기다리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온 세상이 거기에 달려 있었다. 그토록 사소한 일이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다니 로즈의 삶은, 또 조지와 피터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돼 버린 걸까? 나날의 삶이 너무나 뻔하다 보니 로즈는 다음 날 무슨 드레스를 입을지 고민하며 밤을 보내곤 했다.

후식은 ‘암브로시아’라는 기묘한 이름이 붙은 음식이었다. 얇게 저민 오렌지 위에다 잘게 썰어 상자에 담아 파는 코코넛 과육을 뿌린 것이었다.

차분한 기분과 불안한 기분이 왔다가 물러가는 방식은 신기하기만 했다.

로즈는 의지와 능력 사이의 공백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고, 쓸쓸함에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필은 충성심에 마음이 움직였고, 감동하다 못해 목이 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필의 한 가지 특징은 젠체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인정할 만한 상대는 인정했다. 언제나 그랬기에, 그는 남에게 솔직하게 자기 속을 터놓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이들에게서 신뢰를 얻었다.

짐승의 분뇨를 치우던 이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을 상으로 안겨 주는 것이 또한 운명이지 않던가!

그러나 필이 아는 운명은 교만한 자를 벌하고 꿈꾸는 자의 희망을 박살 냈다.

지독히도 엄격한 도덕률을 지녔기에, 필은 그 방면에서 자신보다 불행한 이들을 비난하는 일이 드물었다.

필은 자신의 재주 있는 손으로 만든 작품을 돈 때문에 팔아넘기지는 않겠다는 그의 결기를 높이 샀다.

돈을 깔보고 시간을 귀히 여기는 태도는 그가 교도소에서 얻은 또 다른 교훈이었다. 브롱코 헨리도 그런 식으로 죽음을 깔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바로 그 태도를 통하여 범상한 인간들의 무리로부터 스스로를 갈라놓았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필이 높이 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열린 천막 앞을 지나가며 기묘한 방식으로 조롱을 당하는 동안에도 소년은 결코 걸음을 멈추지도, 쭈뼛거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소년은 아예 어떤 소리도 못 들은 양 태연하게 걸어갔고, 자신을 구경하며 히죽거리는 남자들 앞을 다 지나간 후에는 고개를 들고 버드나무의 지저분한 둥우리를 올려다보았으며, 그 속에서 아직 몸도 못 가누고 꼼지락거리는 새끼 까치들이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의 입 모양 때문에 피터는 불안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이 생각나서였다.

자신에게도 한때는 독자성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자기 이름이 붙은 책상이, 외투 보관실에는 자기 번호가 붙은 옷걸이가, 출석부에는 자기 이름이 적힌 칸이, 운동장의 그네와 그 너머의 널빤지 울타리가 보이는 교실 창밖 풍경이, 자신에게도 있었다고.

로즈는 자기가 받은 별표와 밸런타인 선물로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예뻤다고? 그렇다면 대화를 이끄는 수법치고는 너무나 징그럽지 않은가, 상대가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반응이 ‘그때도 예뻤을 거 아니에요.’라니!

로즈는 옷을 쓸모없고 나약한 인간으로 변해 가는 자신을 가리기 위한 의상이자 변장 도구이자 가면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로즈는 다른 사람이 믿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즈는 오로지 다른 사람이 믿어 주는 모습으로만 살 수 있었다.

뚱뚱한 꼬맹이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머릿속의 뚱뚱한 욕심 주머니가 씰룩거리며 계산을 하는 기색이 훤히 보였다.

그 사람은 나한테 배짱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걸 가르쳐 줬어, 배짱하고 끈기만 있으면. 그러니까 조급증은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재화인 거야, 피트. 그 사람은 나한테 눈을 쓰는 법도 가르쳐 줬어.

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일랜드 억양으로 말하곤 했다. 그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용기를, 그들의 무식함을.

부디 바라건대(사람은 무언가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그 일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일꾼들은, 그 떠돌이들, 집 없는 방랑자들은, 여성을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라는 두 부류로 나누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나쁜 여자는 짐승보다 나은 취급을 받을 자격이 없었고, 그래서 짐승과 마찬가지로 써먹고 버렸다.

아아, 하지만 좋은 여자는! 좋은 여자는 순수했고, 섹스하고는 무관했고, 하느님처럼 신성했다. 좋은 여자는 누이나 어머니, 어린 시절 눈길만 받아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던 첫사랑 같은 이들이었다. 여행 가방에 고이 챙겨 다니는 그 좋은 여자들의 초상화와 사진은 일꾼들에게 성화(聖?)이자 제단이었다.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요, 특히 이번 일에선,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태어나서 생긴 대로 살다가, 운명이 부를 때가 되면 가는 거니까요."

"상냥함이란!" 노마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걸 빼면 세상에 남는 게 뭐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지. 정말로."

간호사에게도 말했다시피 의사가 보기에 배양체를 보내어 분석하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나 다름없었다.

이제 로즈는 구원받았으므로. 이는 피터 아버지의 희생 덕분이었고, 피터 스스로가 아버지의 묵직한 검은 책에서 얻은 지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저지른 어떤 희생 덕분이었다. 이제 그 개는 죽었다.

피터는 탄저병 ? 그 일대에서 쓰는 말로는 ‘검은다리병’ ? 이 인수 공통 전염병이며, 감염되어 죽은 동물의 가죽을 사람이 취급할 경우에는, 베이거나 찢어진 피부를 통해 탄저균이 사람 몸속의 혈류로 확실히 침투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령 손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장갑도 끼지 않고서 탄저병에 걸려 죽은 소의 가죽으로 밧줄을 땋거나 할 때처럼.

오래전에 헤어진 누나에게서 물려받은 땅에 집을 지었는데 다름 아닌 『누나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 누나였다.

그는 자료 조사는 거의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 경험과 기억과 상상에 의지하여 글을 쓴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푸른 가을 지평선의 아지랑이와 막막하게 펼쳐진 초원을 도무지 이해가 안 갈 만큼 사랑하고, 봄철의 폭풍과 타는 듯한 가뭄에 맞서 기꺼이 스스로의 힘을 시험한다.

눈부신 묘사가 촘촘히 박혀 있는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능란하게 그려 내는 새비지의 솜씨를 일찌감치 보여 주며 특히 여성 인물들을 드물게 깊이 이해하고 다루고 있다.

서부의 풍경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연민으로 물든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비좁은 동부의 공간 속에 갇힌 새비지가 자신이 태어난 땅을 재창조한 데에는 비단 글쓰기뿐 아니라 사적인 이유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그러나 그런 땅의 삶은 인간에게 전부를 바치도록 요구하고, 남김없이 앗아 간다.

저는 오래전부터 풍경이 인간을 빚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 형상을 못 보는 이들은 지성과 통찰력이 부족하다. 필에게는 스스로가 지닌 그 능력이 곧 남달리 예리한 감성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균형 관계가 어느 정도는 들어맞지만, 두 인물 모두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 계획은 뼛속 깊이 오싹하며, 가학적이고 잔인한 필이 꾸민 어떤 음모보다도 무시무시하다. 피터는 이미 필하고는 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글감 주머니에 제아무리 특출한 소재를 지녔다 한들, 그 자투리 소재들을 한 땀 한 땀 꿰매어 고전적이고 힘이 넘치는 이야기를 지어서 독자의 상상 속에 어떤 장소와 사건을 영원토록 새겨 놓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다. 새비지는 거장의 솜씨로 혐오스러운 남자에 관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강렬하고 사악하다고 할 만한 인물을 창조했다.

『파워 오브 도그』를 처음 펼친 독자 한 명 한 명이 필 버뱅크의 통쾌하고도 무시무시한 최후 앞에서 숨이 턱 막힐 때마다, 자라서 토머스 새비지가 되는 그 아이는 자기 어머니의 숙적을 제거한 가공의 인물 피터 고든만큼이나 확실하게 그 남자를 다시 죽이는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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