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리 콘 카르네

그녀는 아름다움 속에 걸었다. 피터는 전에 아버지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름다움 속에 걸었다, 밤이 그러하듯이.

벽난로 위에 걸린 노마님의 초상화는 보스턴 출신 특유의 점잖은 표정으로 거실을 굽어보았으며, 로즈가 어디를 가든 놓치지 않고 그녀를 주시했다.

로즈라니, 무슨 그딴 이름이! 어느 집 요리사나 하면 딱 어울릴 이름이었다.

외톨이는 원래 갈 만한 데가 별로 없어.

로즈가 몸을 뻗어 조지에게 키스를 했고, 조지는 얼굴이 빨개졌다. 멋진 날, 참으로 멋진 날이 아닌가! 소풍을, 그러니까, 겨울의 한복판에서 소풍을 즐기고, 이제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사랑스러운 여성과 키스를 하다니

사람에게 조그마한 인내심만 있어도 정말로 신기하고 멋진 일들이 일어났다.

피터는 무엇이든 제자리가 아닌 곳에는 놓지 않았고 물건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으며, 지각도 하지 않고 뭘 깜박하는 법도 없었다.

체스에는 운이라는 게 없어요. 기술이 다예요.

어쩌면, 어쩌면 조니 고든은 못난 사람 대접을 받았는데 버뱅크 집안은, 아무것도 궁하지 않은 그들은 더 잘난 사람으로 대접받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조니 고든의 아내에게는 아무도 랍스터 통조림을 권하지 않았고, 다른 손님을 제쳐 두고 먼저 응대해 주지도 않았다.

로즈는 조지가 말을 할 때마다 그가 더 좋아졌다.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조지의 모습을 보면 말주변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그랬을 공산이 아주 컸다.) 상대의 마음에 드는 말을 생각해 내려고 저렇게까지 애를 쓰다니!

로즈는 소풍 장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자신들이 지나쳐 버렸다는 느낌에 오싹해지는 한편으로, 달빛 속에 어렴풋이 보일 목장 저택이, 온통 통나무로 만들어진 그 거대한 집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하녀들은 매춘부들이 그렇듯이 남쪽의 소농 집안이나 작은 목장 출신이었다. 그곳의 땅은 토질이 형편없는 염기성 땅, 흙먼지 땅, 회전초와 엉겅퀴의 땅이었다. 그 땅에서 태어난 뚱하고 시무룩하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여자애들은 자기 운명을 혐오했고 자기 아버지를 혐오했으며, 스스로가 덜어야 할 입 하나라는 사실도 혐오했다. 혐오할 것은 그것 말고도 많았다.

어이없는 실수가 연거푸 터지고 건너뛴 음이 빵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연주를 들으며, 쾌감에 젖었다.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로즈의 연주를 더 훌륭하게 따라 하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가 있었다.

필은 스스로를 동정하는 인간들을 혐오했다.

로즈는 고별사를 낭독하는 졸업생 대표가 아니었고 송별사를 낭독하는 재학생 대표도 아닌, 그런 영예하고는 애초에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수학 시간에는 꼿꼿이 앉아 삼각형과 사다리꼴을 반듯하게 그리고 깨알 같은 글씨로 필기도 열심히 했지만, 사실 기하라는 과목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졸업식 행사 안내장에는 로즈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곳에.

꽃꽂이: 미스 로즈 윌슨

네 아버지가 졸업식 안내장을 더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 네 이름이 나온 안내장 말이야. 돈을 내야 하면 얼마든지 내겠다는데, 돈을 받고 팔지는 않겠지, 설마."
"그럼요, 더 달라고 하면 줄 거예요. 그리고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뭐. 꽃꽂이 정도는."
"무슨 소리! 대단한 일이 아니면 왜 네 이름이 안내장에 실려 있는데? 젊은 여성이 하는 일 중에 그보다 훌륭한 건 없을 거다. 요즘은 셔츠에 단추 하나 제대로 못 다는 아가씨들도 많아."
"나중에 네 딸한테도 보여 주면 좋잖니." 어머니가 말했다.

꽃, 꽃, 목소리, 그리고 꽃. 로즈는 궁금했다. 남들도 자신처럼 그렇게 여린 추억에 매달리는지, 희미한 형상과 흐린 목소리 속에서 헤매는지. 그런데 왜일까? 스스로가 가엾어서?
왜냐하면 요즘 들어 로즈가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예술이란 본디 시시한 것들을 배치하는 일이 아니던가? 세잔의 작품은 선과 색이 다였고, 쇼팽의 음악은 소리였으며, 향수는 계산된 냄새이고 바삭거리는 리넨은 본디 아마실이 아니던가?

전에는 사람들이 별걸 다 했구나. 그래, 난 이 꽃꽂이란 게 마음에 쏙 들어. 우리 어머니는 이런 거 절대 못했을걸. 어머니는 책 읽기를 좋아하셨어,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온갖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지.

필은 자기 가족을 굼뜨고 거치적거리는 얼간이와 응원자와 몽상꾼으로 여겼고 필을 제외하면, 그들은 실제로 그런 존재였다.

노마님의 시선을 느낀 조지는 옷 위에 가운을 걸쳤는데 이는 노마님이 그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고, 그가 결코 애정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버뱅크 부인이 자신이 읽은 책과 신문 기사를 화제로 삼으면 그들은 굳은 미소로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책도 신문도 읽지 않기 때문이었다.

학력이 짧은 그들은 대화를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 전부가 아니며 결혼 또한 그저 같은 집에 함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일깨웠고, 거실에 있는 모든 부부는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딱딱한 표정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앉아 있은들, 서로를 아무리 소 닭 보듯 한들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분명 그들의 죄를 의심하고 있었다. 마음 편히 얘기할 만하면서도 상상력이나 고등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화젯거리는 드물었다. 최근에 들은 같은 업계 사람들의 부고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 오래 머물렀다. 마지막으로 앓던 병의 이름과 와병 생활의 기간, 유언, 임종, 마지막 식사, 유족의 슬픔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날씨는 여러 면에서 적절한 화제였기에 일단 날씨 이야기가 나오면 반응은 거의 열광적이었다.

저마다 급격한 기온 변화나 습도, 비, 눈, 진눈깨비, 지나간 바람과 앞으로 불 바람의 속도 등에 관하여 제 나름의 견해를 밝히고 한숨을 돌렸다. 날씨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바닥나면 사람들은 하녀가 정찬실 문 앞의 종을 울리며 만찬을 알릴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

늙은 버뱅크 부부는 핑거볼이나 개인용 버터 접시 같은 것으로 손님을 당황케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조지는 처음으로 장식장의 문을 열고 줄지어 늘어선 술병을 바라보았을 때 묘한 해방감에 젖었다.

노인장은 자기 큰아들 필과 마찬가지로 짧은 머리에 대개는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여성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술을 마시는 여성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시대의 분위기를 거스를 수는 없다 보니 여성 손님에게 오렌지 블로섬이라는 칵테일을 대접하곤 했다.

로즈는 주지사 부인을 흘깃 보고는 베일처럼 드리운 미소 아래의 권태와 피로와 짜증을 눈치챘다.

하숙집이든 아니든 이 귀한 물건들의 주인은 이제 여기 있는 이 여자였고, 이 여자 남편은 피어스애로 세단을 살지 말지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기 기분이 내키는 대로. 아니, 그보다는이 여자의 기분대로.

이 여자는 자나 깨나 시험을 치르는 기분으로, 맡은 배역을 연기하며, 언젠가는 벗겨지고 말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그 웃음 또한 어질러져 있는 은제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부유함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였으므로.

피아노의 마지막 음은 곧 그들이 일어서서 작별 인사를 해도 된다는 신호였으므로. 그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그 신호는 종종 마지막 커피 한 잔이었고, 가끔은 카드 게임의 마지막 싹쓸이였으며,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 벨소리일 때도 있었다.

혹시라도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 모르는 조지에게 지금 하는 짓을 들키기 싫어서가 아니라, 필이 쓰지 않은 식기를 치우는 소리 때문에 새로운 갈등이 시작될지도 몰라서였다. 로즈는 이튿날 아침에 그 식기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하루 동안의 야단법석이 머릿속을 헤엄치듯 떠돌다가 어둠을 배경으로 꼴을 갖추고 점점 선명해졌다.

조지가 남부끄럽잖은 상대와 결혼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서? 분명 전남편인 조니를 조금은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그것은 해묵은 딜레마였다. 두 번 결혼한 사람이 빠지는 딜레마.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러한 양심의 가책을 덜어 주고자 천국에는 결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가슴속에나 간직하도록 해, 너희 둘 다."

한참을 오는 동안 주지사는 입을 꾹 다문 채, 사람들이 서로 즐겁게 지내려다가, 또는 그저 의사소통을 하려다가 저지르는 엄청난 실수들에 관해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저 지루함을 잊을 목적으로, 또는 이익을 취하려고 모인다는 믿음이었다.

다른 여자한테 기발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할 여자는 없어요. 차라리 사납다는 말을 듣는 게 낫지.

필은 원래부터 외국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 농사꾼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 망할 놈들은 ‘미합중국’이라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몰라." 필이 곁에서 말을 타고 가던 애송이 카우보이에게 한 말이었다. 필은 열혈 애국자였다.

발정 난 암소가 다른 암소의 꽁무니에서 내려오자 황소가 그 암컷 옆에 붙어 주둥이를 킁킁댔다. 암컷이 수줍은 척 달아났지만 수컷은 재빨리 뒤쫓아 가서 올라탄 다음, 표적을 명중시키고 허리를 구부렸다. 암컷은 수컷의 육중한 몸에 눌려 휘청거리다가, 일을 끝낸 수컷이 물러나자 등을 구부린 채 비틀비틀 무리로 돌아갔다.

그는 남자들이 고작 여자 엉덩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 인생을 결딴내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인생뿐 아니라 다른 모두의 인생까지.

가족 중에 말을 섞지 않고 지내는 식구가 있는 집은 분명 많았다. 그러나 이는 웬만큼 살아 봐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식구에게 기대를 접을 줄도 알 만큼, 불쾌한 점을 받아들이고 장단점을 합산하여 나머지를 취하는 법도 터득할 만큼 나이를 먹은 후에.

아들에게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어머니가 있을까? 세상의 어떤 어머니가, 어른들은 대처하는 법을 이미 배운 혼돈으로부터 자기 자식을 지키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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