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라는 캐릭터는 내가 오래전부터 궁리하던 인물이었다. 그녀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은 진작에 있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나지를 않았다. 그녀가 자리를 잡을 적당한 배경이 통 떠오르지 않아서 아무래도 틀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작가의 머릿속에 쓰여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인물은 집착이 된다.

생각이 끊임없이 그것으로 회귀하면서 상상력이 점차 그것을 키워 가는 동안 작가는 누군가 그의 마음 한편에 살면서 그의 상상에 순종하면서도 그와는 동떨어진 기이하고 고집스러운 방식으로 다채롭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특별한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일단 종이 위에 정착하는 순간 그 인물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그 인물을 잊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몽상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 일시에 잊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메모가 시사하듯이 처음부터 나는 오랫동안 존경을 받아 온 작가라면 그 명성이 아직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작고 예민한 모험심과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열여덟 살 때 『테스』를 읽고 젖 짜는 아가씨와 결혼하리라 결심할 만큼 그것에 열광했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 달리 하디의 다른 작품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문체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가졌던 관심은 한때 조지 메러디스와 이후 아나톨 프랑스에게 반짝 가졌던 관심을 넘어선 적이 없다.

셔벗(두 번째 아내를 맞이할 기회를 주는 음식)

숙녀들이 응접실로 물러갔을 때 나는 우연히 토머스 하디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억하기로 그는 작은 체구에 흙처럼 거친 얼굴의 남자였다.

풀을 먹인 하이칼라 셔츠의 야회복 차림이었는데도 이상하게 흙과 닮은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유쾌하고 온화했다. 그때 나는 그가 수줍음과 자신감이 절묘하게 조합된 사람이로구나 생각했다.

듣자 하니 작가 두세 명이 앨로이 키어라는 인물이 본인을 겨냥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그들의 오해다. 이 인물은 여러 가지가 복합된 초상이다. 외모는 한 작가에게서 따왔고, 상류 사회에 대한 집착은 다른 작가에게서, 활력은 세 번째 작가에게서, 운동 능력의 자긍심은 네 번째 작가에게서, 그 외에 많은 부분은 나 자신에게서 빌려 왔다.

나는 나 자신의 흠결을 돌아보는 고약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나 자신에게서 자조할 수밖에 없는 면모를 많이 발견하곤 한다.

신이 그러하듯 작가가 본인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인물을 창조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저자로서는 작품에 자신의 분신을 실어 영원히 떠나보내는 일인데, 그것이 평론가의 미어터지는 책상과 서점의 빽빽한 책장 어딘가에 파묻힐 공산이 크다는 생각을 하면 참 가슴이 미어지는 노릇이다.

경험은 그에게 행동 지침이 된다. 어떻게든 공적 인물이 되어야 한다. 대중의 시야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인터뷰를 하고 사진이 신문에 실리도록 해야 한다. 《더 타임스》에 편지를 쓰고, 모임에서 연설하고,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만찬 후 연설을 해야 한다. 출판사들이 광고하는 책들을 추천해 주어야 하고, 적합한 시간과 적합한 장소에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절대 순순히 잊혀서는 안 된다. 한 번의 실수로 큰 대가를 치를 수 있기에 힘겹고 불안한 노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읽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책을 널리 세상에 읽히려 백방으로 애쓰는 작가를 친절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잔혹한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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