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안에서는 확실히 컨디션이 괜찮았다. 차라리 나가지 않는 게 나을까?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양기름, 등유, 살충제 냄새로 꽉 찬 어두컴컴한 이곳에서?읽을거리도 없이?아무 할 일 없이 온종일을 보내려고?

우마르 하이얌*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나? ‘내일이면 나는 만 년의 어제를 가진 나’였나?** 대충 그런 내용이었는데. 왜 어떤 시도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지?

시에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어. 영혼 깊은 곳을 날카롭게 찌르는 뭔가가 있어……

넌 늘 지독하게 냉정했지……
왜 블란치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불쑥 들어올까? 천박한데다 참견하는 말투까지, 정말 블란치다웠다! 블란치 같은 사람에게는 조앤이 분명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을 갈가리 찢기게 내버려두는 사람 눈에는! 천박한 것을 블란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니까.

"부인은 제가 잘못할 때마다 지적을 하시죠. 그런데 일을 잘해도 칭찬하시지 않아요. 그러면 일할 맛이 안 나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내가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돼." 조앤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러실 때마다 일할 의욕이 사라져요. 저도 사람이에요, 부인. 부인이 청하신 스페인식 라구*만 해도 그래요. 전 정말 열심히 만들었어요. 손이 많이 가는 요리였죠. 물론 저는 그런 엉터리 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요."

시골의 변호사는 인간관계의 약한 면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보는 사람이야?의사를 제외하면 말이지. 그래서 이 일을 하다보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어지는 것 같아. 인간이란 원래 나약하고, 두려움과 의심과 탐욕에 약한 존재지. 그런데 가끔은 예기치 않게 이타적이고 용감한 인간을 보게 돼. 어쩌면 변호사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보상은 폭넓은 동정심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몰라."

"누구든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어. 아무리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도 겪을 수 있다고. 내가 그의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거야. 자본이 부족한데다 운도 따르지 않았어. 물론 이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면 이건 당신 일이 아니야, 조앤. 나는 당신이 살림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간섭하지 않잖아. 그건 당신의 영역이야. 이건 내 영역이고."

나태한 사고는 금물이야, 조앤!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게 가장 쉬운 길이라고 해도, 또 그게 고통을 면하는 길이라 해도 그래선 안 돼……"

에이버릴은 분별력보다 마음의 힘이 강한 아이지. 그러니까 깊은 사랑에 빠지면 벗어나기가 더 힘들 거야."

그가 열 살만 젊었어도 유혹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거야."

성자들은 대개 열정을 가진 사람이지 냉혈한이 아니었어.

네겐 헨리 증조부처럼 섬뜩할 정도로 특별한 재능이 있지. 그분에게는 본인의 약점을 감추고 상대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최선의 방법을 간파하는 뛰어난 안목이 있었지."

"내 말을 믿어, 에이버릴. 인간은 하고 싶은 일?타고난 일?을 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분명히 말하마. 네가 루퍼트 카길을 돌려세워 그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사랑하는 남자가 불행하고 성취감도 없이 사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거다. 그는 나이보다 늙고 지치고 낙담한 모습으로 인생을 대충 살아가게 될 거야. 그럴 때 네 사랑이, 아니면 또다른 여인의 사랑이 그에게 보상이 될 거라고 믿는다면, 분명히 말하지만 넌 감상에 빠진 바보 멍청이야."

그전까지 부녀는 친구처럼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이제 둘 사이에는 형식적인 예의밖에 없는 듯했다. 하지만 에이버릴은 조앤에게는 냉랭하고 모호하긴 해도 제법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집 떠나 살아보니 엄마의 진가를 더 잘 알게 됐겠지. 조앤은 생각했다.

"요점은 제가 친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거죠."

그 애는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지. 옥석을 가리지 못해. 일상이 아닌 배경에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른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를 자신의 환경에다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거야. 바버라는 하먼을 술꾼에 평생 단 하루도 제대로 일해본 적 없는 멍청하고 허풍 떠는 남자로 보지 않아. 위험하고 멋진 남자라고만 생각하지."

"아, 조앤. 당신과 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젊은 세대를 감화시키지 못해."

"난 네가 원하는 게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냥 절 내버려두세요."

"바버라 자신도 그걸 몰라. 그 애는 아주 어려, 조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일을 대신 결정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아, 여보. 아이 스스로 익숙해져야지. 그냥 가만 놔두자고. 바버라가 원하면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게 내버려두고 당신이 나서서 모임을주선하진 마. 그러면 애들의 적대감만 사는 것 같으니까."

남자들은 다 이렇지. 조앤은 분통을 터뜨리며 생각했다. 문제를 방치하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

"진심이었어요, 아빠. 감당할 수 없다면 결국 스스로목숨을 끊는 수밖에 없는 거 아녜요?" 바버라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바버라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걸 말하게 하는 편이 나을지 몰라."

그 아이는 늘 지독하게 진지하지. 순간의 분위기 너머를 보지 못해. 객관성이 없고 유머감각도 없지. 성적으로는 조숙하고……"

로드니는 아들이 행복하지 않을 위험에 대한 부담이라고 대답했다.

조앤은 그가 행복 운운하는 것이 가끔씩 못 견디겠다고 말했다. 다른 생각은 안 하느냐고, 삶에 행복만 있느냐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것들도 있다고 말했다.
로드니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를테면 의무감이 있죠." 조앤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로드니는 의무감 때문에 변호사가 될 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성공했다고 느끼는 건 참 기분좋아요, 안 그래요?" 조앤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토니에게 쉬지 않고 잔소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이는 속을 알 수 없는 면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고분고분해 보였다. 조용하고 상냥하고 미소를 지었지만 결국은 제가 원하는 대로 했다. 아들은 엄마를 많이 좋아하기 마련인데 토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사실 그 아이는 아빠를 가장 따랐다.

잘생겨서 함께 다니면 엄마를 우쭐하게 만들었지만, 토니는 엄마와 다니는 걸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다

(혼잣말을 하는 것은 몹시 안 좋은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였다. 다정하고 동정심 많은 의사가 필요했다.

특별히 뭘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도 않기로 했다. 둘 다 너무 지치는 일이었다. 마음이 떠다니게 내버려둘 작정이었다.

"자기 아버지처럼 사기를 쳤다는 거예요? 유전이란 참 이상하지 않아요?"
"정말 이상해. 잘못된 쪽을 물려받은 것 같아."

"난 레슬리를 생각하고 있어……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감정을 단련해라, 조앤. 표현을 더 정확하게 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건지 확실히 정해야지.’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것.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회피, 왜곡, 외면……

이 방은 너무 추워……
추워, 그리고 외로워……

조앤과 가깝고 친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친구 하나가 없었다.

모두 진실의 편린들이었다. 조앤이 이곳에 도착하자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앤이 해야 할 일은 그 조각들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삶 전체…… 조앤 스쿠다모어의 진짜 이야기……
그것이 여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소소한 일들로 생활을 채우기가 쉬웠다. 그러느라 자신에 대해 알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데.
참된 진실보다는 유쾌하고 편안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그래야 자신이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몰랐다.

꼬마였을 때부터 엄마를 꿰뚫어보던 에이버릴……

조앤은 바버라에게 애정이 없었다.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조앤은 딸의 취향이나 요구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아이에게 좋을 만한 일을 자기 흥에 겨워 이기적으로 결정해버렸다. 그녀는 바버라의 친구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고, 그 아이들의 기를 죽였다. 바버라에게는 바그다드로 가는 것이 탈출구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가여운 아이에게 가보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말했다.
물론그것은 칭찬할 만한 충동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진실의 일부분에 불과한 게 아닐까?
여행을 한다는 데 마음이 끌렸던 건 아닐까? 신선함에, 새로운 세상을 본다는 사실에? 헌신적인 엄마 노릇을 한다는 데 끌렸던 건 아닐까? 아픈 딸과 심란한 사위에게 환영받는, 매력적이고 모험적인 자신을 기대한 건 아닐까? 이 먼 데까지 달려와주다니 정말 좋은 분이세요 같은 말을 듣고 싶어서?

상황을 잘 정리해야 했다. 더이상 꾸미지 말고.

그동안 외면했던 모든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사실은그녀도 다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레슬리 셔스턴은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고 되는 일도 없는 여자였다. 지친 얼굴, 우스꽝스럽게 한쪽이 일그러지는 미소를 짓던 레슬리 셔스턴. 로드니가 그런 여자를 사랑했다고?정말 열렬하게 사랑해서 1미터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고?인정하는 것이 싫었다.
애절한 갈망, 이루지 못해 가슴 아픈 욕망. 그 강렬한 열망을 조앤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로드니는 부드러운 사람이기에 그녀와 싸우지도 그녀를 억누르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완전한 남자가 아니었다.

쉬운 삶, 나태한 사고방식, 자기만족, 고통도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두려워했지……
용기가 없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녀의 말처럼 기차는 딱 맞춰서 와줬다.그녀가 신중하게 세운 최후의 방벽들이 공포와 외로움이라는 파도에 휩쓸리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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