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 나의 살던 골목에는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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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엄마는 책 읽는 딸이 자랑스러워 어느 날, 그 당시 책장사에게서 <세계명작전집> 오십 권과 고등학생이 되어도 읽기 어려울 것 같은 <세계사상대전집>을 할부로 샀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 책을 읽을 수준보다 어렸던 작가의 어린 시절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책장사는, 조금만 커도 금세 다 읽을 책이라고, 바꿔 말하면서 아직은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에둘러 설명했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듯 거만하게 팸플릿을 뒤적였다. 책에 대한 허세는 나도 엄마 못지않았다.

pg.23

이 부분을 읽으며 나의 엄마가 생각났다. 어느 날, 내 엄마도 <세계명작전집> 과 또 다른 전집 몇 세트를 한꺼번에 할부로 주문하셔서 책꽂이가 아닌 검정색의 유리문이 달린 책장에 (서비스로 받은 건 아니었던 듯, 엄마는 서비스로 뭘 받았을까?) 꽂아두었던 기억. 나 역시 그 책들을 다 읽을 수 있다는 행동을 보였던 것 같은데, 내가 그 세트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 책은 펄 벅의 『대지』뿐이구나.



그 아이는 끝내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고, 나는 그 아이의 냄새에서 놓여나지 못했고, 끝나지 않은 구원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내 행동이, 내 마음이 결코 선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 바탕에 놓인 건 오만과 치기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구도 함부로 연민하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슬픔은 더러 아름답게 떠오르는데, 기쁨은 종종 회한으로 남아 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고, 기쁨이 남은 자리에는 내가 돌아보지 못한 다른 슬픔이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살아온 자리도 돌아보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내가 살던 개천은 오래전에 복개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더이상 없다. 나는 그 사실이 가끔 다행스럽다. - P10

그 기억 때문일까. 오십 권의 전집 가운데 내가 가장 빠져들었던 책은 『세계명작 추리 소설집』이었다. 「도둑맞은 편지」 「네 개의 서명」 같은 짧은 단편 추리물이 수록되어 있었다. 셜록 홈스는 내게 영웅이면서 동시에 라이벌이기도 했다. 나는 책 속에 나오는 사건의 힌트를 가지고 혼자서 홈스와 대결을 했다. 어른이 되면 탐정이 되고 싶었다. 아무도 나에게 장래희망을 묻지 않아서 대답은 못했지만 꽤 오래 가졌던 꿈이다. 탐정이 수수께끼를 잘 푸는 사람인 줄 알았다. - P18

붉은 벽돌을 두르고 초록 지붕을 얹은 집. 이층 창문에 발코니가 놓인 집. 두 개로 맞붙은 견고한 철대문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닫을 수 있는 집, 볕 좋은 날 긴 장대 두 개를 세우고 연결한 빨간 줄에 빨래를 널어 말릴 마당이 있는 집. 내게 있어 이층집은 단연코 그런 집이었다. 나는 그런 집 말고 다른 이층집은 알지도 못했다. 그때 나는 한 방에서 여섯 식구가 사는 가난이라는 게 어떤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런 횡재 없이도 단칸방에서 그런 성처럼 우뚝한 이층집으로 아무렇지 않게 건너갈 수 있는 줄 알았다. - P18

무서움을 누르느라 숨어서 책을 읽었다. 얼른 가라 얼른 가라 주문을 외우며 책을 읽다보면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주위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도 그즈음 생긴 버릇 같다. (중략)
일부러 그런 적은 없었다. 정말로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빚쟁이 목소리도, 엄마의 잔소리도, 화가 난 아빠가 밥상을 엎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가 좋아서, 모두가 있는 세상에서 아무도 없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하루종일 책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 P19

고아들은 모험을 통해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나는 책 속의 세계를 믿었다. - P20

기적이 뭐 별건가. 꿈을 꾸면 기적이지. - P22

책에 대한 허세는 나도 엄마 못지않았다. - P23

내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 삶이라는 것. 그 삶을 끝끝내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 P24

인생은 비극이고, 비극이 곧 성장이라는 사실을 나는 조금 깨달았던 것 같다. (중략)
작가로서도 고민은 남는다. 무엇을 쓸 것인가. 빛과 어둠, 무엇을 증명해야 할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삶들에 대해 쓸 때 어떻게 말해야 할까. 희망을 노래해야 하나. 희망을 조롱해야 하나. 인생은 비극이고, 인간은 비극을 통해 성장한다는 서사는 궁극의 비극일까, 아니면 희망일까. 나는 지금도 그 잡을 잘 알지 못하겠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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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2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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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2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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