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주경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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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들어가며

『대항해시대』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책은 근대 세계사를 해양 세계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려는 하나의 시론이다.”

책의 첫 문장은 600페이지에 이르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분명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저자 주경철 교수가 ‘새롭다’고 부르는 그 문제의식이란 대륙 문명 중심의 기존 역사 서술방식에서 탈피해 ‘해양’이라는 프레임으로 근대 세계사를 포착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책의 첫머리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책 전체에 팽팽하게 깔려있는 문제의식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특정 지역 혹은 국가가 역사 서술의 주체가 되는 ‘중심주의’, 그 중에서도 오늘날 지구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서양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새로운 관점을 끈질기게 붙잡고 현대 사회의 뿌리가 된다고 불리는 근대 초기(15-18세기)를 다시 검토한다.

근대의 형성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한권의 책에 모든 내용을 담아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에 저자는 몇 가지 핵심주제를 선정했다. 그가 오늘날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한 주제들은 책의 구성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화됐다. 제1부 「근대 세계 구조의 형성」은 <제1장: 세계의 팽창, 세계의 불균형> <제2장: 세계와 유럽의 조우: 유럽의 해상 팽창> <제3장: 국가와 자본의 결합: 동인도회사에서 제국으로>로 구성돼있으며 근대 세계 구조의 형성 과정을 전반적으로 조망한다. 제2부「폭력의 세계화」에서는 그 과정이 ‘폭력적’이었다고 규정하고 <제3장: 근대 해양 세계의 내면: 선박․선원․해적> <제4장: 근대적 폭력, 폭력적 근대: 군사혁명과 유럽의 팽창> <제5장: 화폐와 귀금속의 세계적 유통> <제6장 노예무역: 근대 세계의 비극>에서 피로 얼룩진 근대 세계의 형성을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제3부 「세계화․지역화된 문화」에서는 폭력적 세계화의 결과 형성된 지구 네트워크가 전 세계의 환경과 문화에 끼친 영향을 <제7장: 환경과 인간> <제8장: 기독교의 충격: 사회의 위기와 의식의 위기> <제9장 문화의 교류: 언어․음식․과학 기술>를 통해 살펴본다.

지금부터 본론에서는 저자가 채택하고 있는 두 가지 관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저자가 다루고 있는 방대한 내용이 그의 야심찬 의도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본론1]에서 저자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이 맺고 있는 관계의 속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분석한 후 해양 중심의 역사 서술에 어떤 한계나 문제점은 없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본론2]에서는 저자가 내세운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 어떠한 방식으로 본문에서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확인한 후 이것이 진정으로 유럽의 신화를 깨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달성하고 있는지를 비판할 것이다.

 

 

2. 본론1: 해상 팽창=근대 세계의 형성?

이 책의 부제는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로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이 맺고 있는 관계의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항해시대』에서 저자는 해상 팽창이 근대 세계 형성의 본질적 요소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정적 계기’라고 판단하고 있다. 일례로 그는 근대사의 발전에서 구조적 전환의 결정적 계기로 중국의 해상 후퇴와 유럽의 해상 팽창을 지목하고 있다. 15세기 전만해도 군사적․경제적으로 유럽에 우위를 점했던 중국이 바다 문을 걸어 잠근 동안 유럽이 다른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종국에는 유럽식 근대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유럽은 육지가 아닌 바다를 통해 전체 대륙을 집어삼키거나(중남미), 중요 거점들을 확보(인도와 동남아)하는 방식으로 야금야금 세력권을 확대해나갔다. 이들은 이곳에서의 인적․경제적 탈취와 착취를 바탕으로 경제력 강화→군사력 강화→경제력 강화의 선순환을 일으키며 19세기 들어서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성장했다. 전지구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유럽이 자신들의 유럽식 근대를 세계에 이식해 나갔다는 큰 그림에는 별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해상 팽창이 이 전체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였다는 저자의 주장은 미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유럽의 해상 팽창이 근대 세계의 형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벌어진 하나의 ‘사건’을 넘어 ‘원인’에 해당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해상팽창을 유럽식 근대 세계 형성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15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구축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군사적 혁신이 일어나는 사회적 상황이었고, 유럽식 해상팽창은 이러한 사회적 요건이 촉진한 특수한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포르투갈 성인 남성의 30% 가까이가 바다로 나가고 적은 숫자의 군인들이 현지를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이는 정화의 원정과 유럽인의 해상 진출을 비교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서구식 자본주의도, 무자비하고 사악한 전쟁문화도 깃들지 않은 정화의 함대는 원정길에서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정화의 원정으로 자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고 해서 아주 먼 지역까지 수많은 주민들이 이주하는 대량 인구 송출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다.

정화의 원정함대 이후에도 중국의 해상활동이 계속 이어졌다고 해서 중국이 서구처럼 군사적․경제적 제국을 구축했을까? 저자도 유럽의 해상팽창의 특수성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유럽 본토에서 벌어진 특수한 상황, 자본주의의 태동과 신분제의 동요가 해상팽창에 미친 영향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2부 『폭력의 세계화』에서 유럽 해상 팽창의 가장 특수한 성격인 ‘폭력성’의 문제를 다루는데 노력을 쏟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해상에서 이뤄진 폭력적 활동은 유럽 본토에서의 군사적 상황이 야기한 하나의 ‘결과’로 바라보고 책의 많은 지면도 유럽 본토에서 이뤄진 군사적 혁신을 다루고 있다. 요컨대 해상 활동이 유럽 세계가 비유럽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을 촉진했지만 종국에 유럽식 세계체제를 형성하는 것은 결국 육지에서 일어난 일이며, 해상 확장은 육지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일으킨 하나의 결과이자 근대세계의 성립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단계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유럽의 해상 팽창이 근대 세계의 형성의 근인은 아니더라도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일임하고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러 가지 기여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것은 세계화, 즉 진정한 의미의 ‘세계’의 형성이다. 유럽인들은 자연환경의 장애물 외에도 또다른 인간들이 가로막고 있는 육지가 아닌 해양을 통해 전지구적인 네트워크의 형성을 현실화했다. 해상 팽창이 ‘세계의 성립’을 야기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 해상 팽창이 성립한 것은 보통 세계가 아니라 ‘근대’ 세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해상 팽창이 ‘근대화’와 함께 진행된 것은 해상 팽창과 근대의 성립은 그저 나란히 일어났는지 인과의 순환사슬을 이루며 함께 하나의 세계를 형성해 나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 수 있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서 근대 세계의 형성에 유럽식 근대의 세계화 외에도 해상 팽창 자체가 어떤 고유한 근대적 특성을 갖고 있고, 이것이 육지와 조우하며 오늘날의 근대 형성에 기여한 바가 있는지를 검토했다. 구체적으로는 선원들의 생활과 해적 문화를 통해 이러한 기여가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선원들의 삶에서 산업시대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특성을 읽어내고 해적의 세계에서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질서를 엿보았다. 레디커의 견해에 따르면 선원은 가장 초기의 그리고 최대의 자유 임금노동자 집단들 가운데 하나였다. 자본과 인력이 대규모로 집중된 선상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위계구조가 최초로, 극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위계구조는 선상폭력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출됐는데 이러한 자본주의 질서에 극단적으로 저항한 존재가 바로 해적이다. 저자는 억압적이고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는 선원 집단이 대규모로 형성되는 현상에서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자본과 노동 간 갈등의 전조를 읽고, ‘해적’을 그 상징으로서 포착한다.

안타깝게도 논의는 이 지점에서 걸음을 멈춘다. 바다의 프롤레타리아들이나 그 후예들이 육지로 돌아가 노동계급을 형성하고 바다 위에서의 경험과 영감을 바탕으로 계급투쟁을 이끌었는지는 이 책에선 파악할 수 없다. 해상 팽창과 ‘근대’가 맺는 관계에 대한 좀 더 엄밀한 논리를 전개했다면 근대 세계의 성립에서 해상 팽창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저자의 견해를 탄탄히 보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본문 내용만으로는 그 관계가 모호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3. 본론2: 또다른 신화, ‘유럽 벗어나기’

지금부터는 『대항해시대』의 유럽중심주의 극복 시도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유럽중심주의란 오늘날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서구가 역사 서술의 주체가 되고 나머지 대륙들은 그 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유럽의 패권 장악을 필연적인 귀결로 전제한 상태에서 세계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의미를 부여해 주체-승리자인 유럽이 대상-패배자인 비유럽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해나가는 이야기를 낳는다. 유럽중심주의적 사관은 우연적 요소들마저도 유럽의 헤게모니 장악의 필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역사 왜곡을 야기해왔고, 그 문제의 심각성이 지난 20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저자는 『대항해시대』에서 이러한 유럽중심주의적 서술의 대안으로 지구사(global history)를 들고 나왔다. 지구사 연구자들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비교사적 연구 방법’이다. 특정 집단이나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고 동일 사건에 대한 다양한 역사 서술을 비교함으로써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레판토 해전의 재해석을 든다. 기존의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은 레판토 해전이 16세기에 오토만 제국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노리고 침략을 기도했다가 패배한 전투로 그 이후 세력이 쇠퇴해 유럽을 더 이상 별로 위협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터키 측에서는 육군 위주로 육상 팽창을 추진하던 오토만 제국으로서는 지중해로 공격해 들어갈 의도가 없었고, 레판토 해전 시기에 오토만 제국은 유럽 세력에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쇠퇴를 맞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대 팽창의 시대였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이를 균형 잡힌 역사 서술의 표본으로 삼고 『대항해시대』에서 군사적 정복 과정, 노예무역, 과학기술의 발전과 교류 등의 주제를 이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공정하게 다루고자 노력했다.

단지 상반된 입장의 역사적 사료를 단순히 비교하고 한쪽 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는 지구사적 서술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을 벗어나려면 특정 이데올로기, 즉 ‘~주의’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특정 존재가 서술의 주체가 되지 않는, 즉 역사 서술에 ‘주인공’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하나의 전범으로 삼는 레판토 해전의 재해석은 진정으로 ‘균형잡힌 시각으로 근대사를 지구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목표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 해석은 분명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레판토 해전의 ‘~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을 극복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레판토 해전’이라는 특수한 사건에 대해서 투르크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이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에 대해 객관적 사료를 바탕으로 승리를 거둬 레판토 해전에 대한 역사 서술의 주인공이 유럽에서 오토만 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혹은 비슷한 사례에서 어느 한쪽의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 사료가 근거가 없을 때는 상대주의적 견지에서 두 가지 관점 모두 나란히 보여주는, 순전한 의미의 ‘비교’만 이루어진다면 이는 일종의 탈중심주의라기 보다는 혼합중심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레판토 해전의 재해석 방식을 따르는 『대항해시대』 역시 마찬가지로 여전히 주인공을 상정하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실과 상인들,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들 같은 ‘유럽 세력’이 그 주연이다. 종종 다른 문명의 다른 문화들도 잠시 역사 행위의 주체로 서술되지만 이는 앞서 말했듯 탈중심주의적 서술이라기보다는 혼합중심주의에 가깝다. 근본적인 한계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항해시대』를 지구사적 서술이라고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15세기부터 유럽이 앞서나가고 있었다는 강한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인식에 비판을 가하며 이를 반박하는 많은 역사적 사료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서구 역사학계와 터키 역사학계를 비교사적으로 연구한 레판토 해전의 재해석을 기준에 비춰봤을 때 객관성이나 균형감이 충분하지 않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례들은 서양학자와 일부 일본학자들의 서로 다른 시각을 종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 선정 자체도 서구의 폭력적 군사 지배, 기독교의 전파에 따른 문화적 변화 등 서구를 기준으로 선정한 것이다. 전체 내용을 종합해 볼 때도 결과적으로 이 책이 수행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사료와 근거 없는 추측에서 비롯된 역사적 왜곡을 수정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를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항해시대』가 ‘유럽이 15세기부터 손쉽게 세계를 장악했다’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난 후 도착한 곳은 아무래도 ‘유럽이 우여곡절 끝에 세계를 장악했다는’ 보완된 유럽중심의 서술인 듯하다.

 

그렇다면 저자와 『대항해시대』는 유럽중심주의 극복이라는 목표달성에 실패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른 문제 하나를 먼저 풀어야 한다. 그것은 애초에 주인공 없는 역사 서술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주인공 없는 역사 서술이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지구사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했듯 세계 모든 지역의 역사를 공평하고 자세하게 기술하는 일이란 하나의 ‘이상’일뿐 현실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 덧붙여 애초에 역사 서술이란 주관적 행위일뿐더러 필연적으로 어떤 문제의식이나 주제의식이 기저에 깔릴 수밖에 없다. 앞서 제기한 현실적인 문제를 떠나 역사가가 서술의 주체를 상정하는 것도 문장에 주어가 있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벗어나려고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중심적 서술’과 ‘~주의적 서술’ 모두가 아니라 후자뿐이다. 즉, 특정 대상을 역사 서술 주체로 삼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의 채택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대항해시대』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서술하면서도 그들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고 그 집단의 역사적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유럽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매우 적절하게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주인공으로 삼되, 영웅으로 모시지는 않고 있다.

반대로 이제 저자는 그 지난한 줄타기 끝에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라는 원대한 꿈을 완전히 이뤘다고 평할 수 있을까? 그는 정말 유럽의 신화를 벗겨 낸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대항해시대』가 다루는 주제설정 자체가 주인공이 승리하는 헤피엔딩의 프레임 안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서구와 근대세계의 형성에 관한 문제자체가 이미 일종의 중심주의의 속박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애초에 서양의 것이며, 아무리 근대적 요소를 비유럽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근대의 기준은 서양이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도 가능하다. 유럽이라는 신화를 벗어나려는 탈유럽중심주의는 ‘상징적 행위’에 불과하며 이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유럽의 신화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세계의 형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유럽은 언제나 종국에는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역사 서술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며 ‘객관적 인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 엄밀한 유럽중심주의적 사관을 구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아무리 기존 주장들을 정밀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하더라도 ‘근대’라는 문제설정 안에서는 큰 결론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지구사 연구가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고 진정한 상호주관적 객관성 추구 행위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프레임’의 편향에 의한 왜곡이 없어야 한다. 특정 존재를 서술의 주체로 채택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주관성의 문제를 극복하는 동시에 상대주의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역사적 인식들을 서로 겹쳐보며 최대한 균형 잡힌 서술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같은 프레임에 대한 상이한 입장의 사관이 파악한 역사적 인식들 외에도 프레임 자체도 한쪽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하게 설정해 여기서 얻은 역사적 인식들도 덧대야만 우리는 역사의 객관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에서 18세기의 세계사 서술이 진정한 의미의 ‘지구사’적 서술이 되려면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과 같은 서구 중심의 프레임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레임을 설정해 총체적인 역사인식 노력을 도모해야만 할 것이다.

 

4. 결론: 『대항해시대』의 실천적 함의

이상으로 저자의 해양 중심의 관점과 탈유럽중심주의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대항해시대』를 살펴보았다. [본론1]에서는 유럽의 해상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이 맺는 관계의 속성에 대한 저자의 판단을 고찰해보았다. 이에 대해 저자가 해상팽창이 근대 세계의 형성에 근본적 원인이라고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결정적 계기’라는 언급은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해상 팽창이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성’을 세계화하고 그 결과로서 전 세계가 유럽식 근대 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에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근대 체제 자체의 ‘근인’으로 확대해석할 가능성에 대해 비판했다.

[본론2]에서는 저자가 유럽중심주의적 서술 방식의 극복을 위해 시도한 지구사적 접근, 즉 비교사적 연구를 통한 객관적 역사 서술을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검토했다. 이에 대해 저자가 표본으로 삼고 있는 레판토 해전 재해석의 비판에서부터 시작해 『대항해시대』가 채택하고 있는 탈유럽중심주의가 오히려 유럽의 신화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에 대해 논증했다. 결론적으로 『대항해시대』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객관적 역사 인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상반된 입장의 비교가 아니라 프레임 자체를 재설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대항해시대』가 던지고 있는 실천적 함의에 대해 고찰해보겠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근대 세계 구조의 뿌리가 형성된 15-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대항해시대’를 살펴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선 『대항해시대』의 바다가 근본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이다. 육지는 대륙으로 나뉘어있지만 바다는 하나로 연결돼 전 대륙을 감싸고 있다. 그 바다를 장악한 자가 세계를 제패했다는 대항해시대의 전설은 지구의 다른 구성원들과 가장 폭넓게 교류하는 동시에 자신의 강점을 이용해 그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늘과 우주, 그리고 인터넷이 또다른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에 누가 이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대항해시대의 전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많은 돈을 들여 조만간 외나로도에서 인공위성을 자력발사 하고, 선진국들이 IT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계 네트워크에서 우월한 지위를 잃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재편되는 세계체제의 위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대항해시대』가 시도하고 있는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에서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함의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저자가 결론의 말미에서 짧게 밝히고 있기도 한 그것은 평화적 세계화이다. 유럽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지난 5세기 동안 진행된 폭력적 세계화의 과정을 어느정도 합리화하게 돼있다. 유럽중심주의를 현실인식에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오늘날 세계화 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행태들도 예전에도 그랬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수천만의 노예와 전사자를 만들어낸 이 유럽식 근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을 단호하게 배격하기 위해선 유럽의 신화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세계화와 근대화 과정의 폭력성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배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이것이 평화적 세계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대항해시대』와 같은 객관적 역사 인식을 위한 노력이 부단히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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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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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해야 해.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뱇이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 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그래서 생존해야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며,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pp.180~181)


 

박민규의 소설은 '단숨에 읽힌다'라는 표현이 그 어느 작품에 비할 수 없이 잘 어울린다. '핑퐁' 역시 그러했다. 마치 세트스코어 3대 3에서 자리를 바꿔 다음 세트로 넘어가는 기분으로 한 쪽 한 쪽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그리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처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강렬한 인상이 남았다.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어느날 네바다 주 실버스프링에서 볼링을 치던 한 남자는 자신의 볼링공이 지구공을 바뀐 걸 깨닫는다. 그가 '지구고 뭐고 간에 빨리 던져'라는 '중요한' 술내기를 건 동료들의 독촉에 지구를 마루 위에 던지자 지구 곳곳에서 지진과 산사태가 일어난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음에도 그는 '생활'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서' 계속 지구를 던진다. 남미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가라앉고, 아프리카가 세 대륙으로 쪼개질 때까지 말이다. 그제서야 그는 볼링공을 놓고 탁구채를 잡는다.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이 탄생한 것이다.

존 메이슨의 <핑퐁맨>의 지구를 던지는 '핑퐁맨'까지는 아니더라도 , 우리가 직렬로 늘어선다면 한 사람을 죽이고, 전쟁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9볼트의 건전지라는 박민규의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고, 참신하고, 멋지다. 분명 나도 9볼트의 건전지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건데, 나도 분명 직렬회로의 한 부호가 되어 어떤 이의 저항을 애써 달군적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교 시절에 그러했거늘, 머리가 한 없이 굵어진 전지가 된 지금, 혹은 나중에야 어떤 곳에 지진을 일으키고 산사태를 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 그래서 박민규는 그러한 9볼트가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우리는 탁구를 쳐야한다고 말한다. '핑' '퐁' 하면서 말이다.

문학에 별 조예가 깊지 않은 내가 하기엔 건방진 소리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박민규는 천재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은 '새롭다'. '최고급' 혹은 '신소재' 따위로 치장하지 않아도 더할나위 없이 신선하다. 이런 식이다. 태양을 구슬만한 크기라 해도 지구와의 사이에 놓은 200km 만큼의 거리로 개별화 된 현대(modern) 사회의 개인들은 '인류가 <깜빡>한 인간'들이 된다. 인류의 역사가 밟아온 문명과 야만의 앞서거니와 뒷서거니, 이를테면 인류애와 홀로코스트 같은 대립은 어드벤테이지와 어게인이 끊임없이 이어져,  '173845792629921:173845792629920'에 이른 듀스포인트다. 그의 작품 작품, 장 장, 쪽 쪽은 파격 파격의 연속이다. 하, 문학이란, 문학을 통한 창조란, 진정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오라. 나에게 박민규는 '창작가'를 넘어 '창조가'이다.

결국, 모아야할 컬렉션이 또 하나 늘어난 밤이다.   

 (2009년 4월 2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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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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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낮과 밤은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낮과 밤을 살아가는 나도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떻게든 살아야한다는 낮과 왜 살아야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밤. 나는 하루하루 낮을 보내고 밤을 버텨낸다. 이유없이 몸이 뜨거워지고 목이 타는 그날 밤에도 나는 '밤은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 나는 지난 번 2009년 이상문학상에 밀려 내 손과 눈을 차지하지 못했던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집어들었다. 그 쓸쓸하기 그지없는 밤을 김연수는 '노래한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에 문득 노래하는 밤과 쓸쓸한 밤이 같은 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태양아래 모든 존재가 '나는 진실이야'라고 외치는 낮이 아닌 그 모든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밤. 빛의 세계가 한낱 꿈이 되어버리는 그 시간,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둠을 꿈꾸지 않는다. 

  ‘밤은 노래한다’는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낮의 세계에서 밤의 세계로 추락하는 김해연의 이야기다. 혁명의 격랑에 빠진 1930년대 간도는 그저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일 뿐인 그가 낮의 세계에만 머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자 해연은 결국 사람을 죽이게 된다. 사람을 죽인 자가 어찌 다시 낮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오. 500여 명의 혁명가들이 주적인 일제나 친일분자가 아닌 동지들에 의해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민생단 사건’의 연루자들도 모두 한 때는 낮의 존재들이었다. 그 누구도 살인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살인자가 되었다. 도대체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박길룡은 박도만을 죽였고. 박도만은 최도식의 존재이유를 앗아갔다. 최도식은 이정희를 죽였고, 이정희를 사랑한 김해연은 박길룡을 죽였다. 결국 박길룡은 박길룡이 죽였고, 박도만은 박도만이 죽였다. ‘자주’를 부르짖던 낮의 박길룡을 과대망상에 빠진 밤의 박길룡이 죽였으며, 냉혹한 현실주의자인 낮의 박도만을 적의에 불타는 밤의 박도만이 죽여버렸다. 낮의 그들과 밤의 그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겠는가. 혁명은 세계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옛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새우는 파괴와 창조의 과정이다. 옛 것은 옛 것으로 파괴할 수 없다. 

  따라서 세계를 향한 싸움은 나 자신의 파괴와 창조를 선결조건으로 한다. 값비싼 술과 숱한 미인을 거느리려는 깊은 밤의 오래된 욕망을 파괴해야만 그 위에 혁명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 안세훈과 박길룡과 박도만과 최도식은 이정희를 향한 구태한 욕망을 파괴했어야만 한다. 정희의 퇴장과 함께 식어버리는 그들의 토론이야말로 그들이 논하는 혁명의 냉혹한 현실이다. 그들의 욕망을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변명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혁명을 거스리는 사랑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혁명을 파괴했고 정희와 해연의 사랑은 혁명을 소생시켰다. 아무래도 김연수는 맑스보다 톨스토이를 편애하는 듯하다.

  요즘 ‘김연수’는 나에게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언제나 내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정말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근래에 난 지금 ‘위선’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있었다. 뻔히 제 밥그릇을 키우려는 목적이 훤히 보이는데도 거짓말을 일삼는 위정자들과 노동운동을 부르짖는 노조간부가 성폭행을 자행하는 현실, 그리고 그 위선이 내 생활과 언어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더욱더 비참한 현실에서 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김연수는 혁명가들의 위선, 그리고 그로 인한 스스로와 혁명의 파멸을 담담히 보여주었다. 네 생각이 맞다고, 부조리한 세계를 대면하는 일이란 곧 너 스스로의 위선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그 위선을 뛰어넘지 않고 자신의 몫(moira)를 넘어서는 행위를 하는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그 존재의 파멸뿐임을 '밤을 노래한다'는 보여주고 있다.

  누가 학문을 ‘자기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이라 했던가. 아직 너무나 어린 나에게 학문은 ‘자기모순을 발견하는 과정’에 겨우 미치고 있는 듯하다. 낮의 내가 밤의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랄까. 욕망과 허영에 사로잡힌 내가 낮의 나를, 이성과 윤리의 내가 밤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끝없이 밀려온다. 하지만 아직 난 사람을 죽일 수 없다. 한 사람을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다. 

  밤은 노래하고 낮은 춤을 춘다. 나의 밤은 무엇을 노래하는가. 나는 뜨겁게 춤추고 있는가. 내 생각에는 어디에도 해연은 없다. 김연수가 말하는 촛불시위에서 춤추는 남총련 대학생들도 박길룡이오, 박도만이오, 최도식일 것이다. 혹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위선과 대작하는 길, 그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일은 이 세계를 혁명하는 일에 버금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세계는 혁명된 적이 없다. 물론 단 한번도 혁명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적도 없다.

  밤은 쓸쓸하고 나는 노래한다. 내 삶과 내 세계에 대한 혁명과, 그 혁명에 대한 희망을.  

 (2009년 2월 1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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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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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뚝 떨어진 김사과

2005년, “하늘에서 사과가 떨어졌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984년생, 22살의 김사과가 「영이」로 창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것이다. 당시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새내기였고 소속도 문학과 다소 거리가 먼 영화학과였다. 그는 2년 뒤 첫 장편소설 『미나』를 발표했고 오는 16일 두 번째 장편소설 『풀이 눕는다』을 출간할 예정이다. 단편소설 「정오의 산책」은 2009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등단, 유력 출판사에서 장편 두 권 출간, 권위 있는 문학상 최종 후보까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26살 신인이 일군 열매라고는 믿기 힘들다. 여기에 ‘사과’라는 특이한 필명과 외고를 자퇴한 특별한 이력까지 보태면 그의 ‘포스’는 범인(凡人)들을 주눅 들게 한다. 괴물이거나, 최소한 천재일 것으로 추측되는 소설가 김사과, 그를 만나러 갔다.

그에게서 먼저 소설가 지망생들의 ‘꿈’이자 ‘벽’인 등단을 단박에 해낸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과에 입학했는데 영화에 별 관심이 없어 방황하면서 우울한 첫 학기를 보냈어요. 방학 때 앞으로 뭘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니 그나마 제일 잘하는 게 글 쓰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2학기에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잘 쓴다고 계속 칭찬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좋아서 계속 썼어요. 선생님이 그동안 쓴 것 중 문학상 공모에 하나 내보라고 하셔서 냈어요.” 그래서 그는 등단한다. 참 쉽다. 학부 글쓰기 수업에 제출한 작품으로 등단하다니, 모르긴 몰라도 한국 문단 등단사(史)에서 흔한 일은 아닐 게다.

쎄게, 끝까지 밀어 부친다

서사창작과로 전과한 그는 지난해 첫 장편소설 『미나』를 펴낸다. 『미나』는 주인공인 ‘수정’이 한때 ‘절친’이었던 ‘미나’를 부엌칼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이야기다. 수정은 안정적인 계급의 재창출을 위한 교육제도에 완벽히 순응한 여고생으로 시스템이 요구하는 문법을 완벽히 구사한다. 그녀는 시험지 위의 세계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이 군림하는 그 세계를 경멸한다. 그런데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미나가 친구의 자살로 세계에 대한 경멸의 포즈를 동정의 포즈로 바꾼다. 수정은 미나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미나를 갖고 싶다. 결국 그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미나를 죽인다.

한국의 부조리한 교육시스템이 빚어낸 비극 『미나』에는 김사과 작가가 학창시절 동안 경험한 부조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제가 공부를 못하게 생겼는지 처음엔 열등생 취급을 하던 선생님들이 제 성적을 보고 나면 태도가 바뀌더라고요. 같은 잘못을 해도 제가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덜 받기도 했고요. 결국 공부만 잘하면 아무 말도 못하는구나. 어린 마음에 그런 냉소적인 생각을 하게 됐죠. 저는 이렇게 공부만 잘하면 좌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미나』가 던지는 메시지는 교육 제도를 향한 일격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엔 ‘신자유주의’, ‘개발지상주의’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의 지배적 관념에 대한 경계도 담겨 있다. “주인공 ‘수정’으로 상징되는 극우적 관념, 그것을 신자유주의로 부르든 박정희식이라 부르든 이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어요. 무한 경쟁 속에서 타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비유적으로 짓밟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이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어요.”

이번엔 ‘확’ 부드러워 졌다

『미나』는 파괴적 소설이다. 친구를 죽이기 위해 고양이를 벽에 던져 살인을 예행연습 하는 내용에 욕설이 난무하는 여고생의 대화를 그대로 옮긴 듯한 문체까지 파괴적인 기운을 물씬 풍긴다. 그러나 이번에 출간될 『풀이 눕는다』는 다르다. 낭만적인 연애소설에다 문체도 무난하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제 기준에서는 그다지 심하지 않은 『미나』 정도의 파괴성에도 사람들의 거부반응이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많이 읽히고 싶어서 최대한 파괴적인 걸 지양했어요. 살인이나 폭력의 등장을 최대한 자제하고 읽기 쉽도록 소설 문법에 맞게 쓰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재미가 좀 없어진 것도 같아요.”

자신만의 스타일이나 신인 작가의 패기를 자제해가면서까지 『풀이 눕는다』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미나』가 쓰고 싶어서 쓴 소설이라면 『풀이 눕는다』는 써야 해서 쓴 소설이에요. 전 개인적으로 세대론에 별 관심이 없는데, 그럼에도 20대로서 우리 세대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무를 한편으로 느껴왔거든요. 지난 촛불 정국 때도 그렇고 20대가 무기력하다고 비판받는데, 사실 20대가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건 사회 시스템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풀이 눕는다』에서는 우리 20대가 놓인 비관적 현실을 보여주려 했어요.”

『풀이 눕는다』는 20대인 주인공이 길을 가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무조건 쫓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기생하는 주인공은 화가 지망생인 ‘풀’과 함께 옥탑방에서 빈궁하지만 낭만적인 동거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을 볶음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돈 없이 사랑 속에서 굶어 죽고자 한다. 그러나 막상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둘의 동거생활은 파탄 나고, ‘풀’은 비참한 고시원 생활로 내몰린다.

『미나』처럼 『풀이 눕는다』도 다분히 사회비판적이다.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20대가 오늘날 처해있는 생존투쟁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풀이 눕는다』는 소위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20대의 비극을 시스템의 잘못으로 돌리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김사과 작가는 ‘히피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대책 없는 낭만적 삶으로 20대들을 초대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LA의 부랑자가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한다. “LA에 가서 거지가 되는 삶을 긍정하는 자세, 그게 이 책의 주제예요.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고. 되게 낭만적이잖아요.” 그렇게 살면 ‘풀’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지 않겠냐는 반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원래 정말 잘 노는 사람들의 말로는 비참해요. 히피들을 보세요. 그런데 말로가 그렇다고 잘 논 게 사라진 건 아니잖아요. 결말이 좀 암울하긴 하지만 이걸 읽은 사람들이 걔네들처럼 한번 놀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또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

이상한 유혹이다. 작가가 독자를 LA 부랑자의 삶으로 초대하다니. 그런데 앞으로 사과의 유혹은 더 이상해질 예정이란다. “『풀이 눕는다』를 쓰고 나서 대중적인 소설은 안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힘들었어요. 앞으론 진짜로 작정하고 이상한 거 쓰려고요. 사람들이 제 소설이 너무 잔인하다고 그러는데 진짜 잔인한 게 어떤 건지 보여주려고요. 포르노그래피도 써 볼 생각이고 폭력 자체를 탐구하는 소설도 쓰고 싶어요. 앞으로는 더 발전된 이상함을 추구할 생각이에요.” 김사과, 그가 작정하면 소설은 어디까지 이상해질까. 언제 어디선가 느닷없이 떨어질지 모르는 이상한 사과에 다들 바짝 긴장하시라. 

(대학신문, 2009년 11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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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중독 - 새것보다 짜릿한 한국 고전영화 이야기
조선희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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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퀴즈 두 문제. 「바람난 가족」의 원조 격인 「자유부인」이 개봉한 것은 언제일까? 1974년 반공영화의 걸작 「증언」을 만든 감독은?

정답은 1956년, 임권택 감독이다. 자유당 치하인 1956년 “어떻게 하면 짧은 인생을 엔조이하냐가 문제지”라고 말하는 가출주부가 등장하는 영화가 개봉됐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35년 전 국가주도로 기획된 반공영화 「증언」을 찍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몇 안 될 것이다.

미지의 한국 고전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클래식 중독』이 지난달 20일 출간됐다. 저자는 한국 고전영화의 세계를 하길종, 이장호, 장선우 등 전설적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 ‘생생함’은 저자의 경력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그 느낌이 남다르다. 저자는 1995년부터 5년간 영화 주간지 『씨네21』의 편집장을 지냈고 2006년 9월부터 3년 동안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일했다.

조선희씨가 소개하는 필모그래피는 단순한 감독 연대기 그 이상이다. 그는 감독의 작품을 자신의 경험과 밀접하게 엮어가며 오랜 친구를 소개하듯 나긋나긋하게 들려준다. 이런 식이다. 그는 1996년 장선우 감독의 「꽃잎」을 시사회에서 만난다. 첫인상이 퍽 나빴던 이 친구를 10년 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재회한 그는 그제야 「꽃잎」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흑백과 컬러를 조합하는 표현의 자유자재로움과 노래 「꽃잎」으로 영화의 이미지를 견인해내는 모습에서 그는 「꽃잎」이 걸작임을 확신한다.

이야기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와 장선우의 다른 걸작에 대해 주고받은 문자로 이어진다. 문자 한통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작정하고 사회통념에 싸움을 건 영화 「거짓말」,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걸작 「만추」(이만희 감독)의 뒤를 잇는 「경마장 가는 길」 등 장 감독의 여러 작품의 영화사적 의의를 이해하게 된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흥행 실패 후 제주도에 은둔해버린 장 감독을 만나 포구에서 새벽까지 소주를 마신 이야기를 통해 그의 근황까지 알 수 있다.

저자는 영화인들의 친일행각, 군사정권 시대의 사전검열, 홀대받는 영화사 등 읽는 이를 자못 심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동명의 사실주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지만 계속되는 검열 끝에 ‘에로영화’로 전락했다. 우울한 역사는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임기를 보장받은 기관장이 정치적 이유로 부당한 사퇴압력을 받는 현실은 바로 지금, 2009년 이야기다. 앞으로도 한국 영화의 부흥이 계속 이어지려면 한국 영화사의 화려한 전설뿐 아니라 저자가 생생하게 들려주는 암울했던 시간 역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대학신문, 2009년 10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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