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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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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엇보다도 <불안의 시대>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강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저자의 서술방식과 문장력이다. 저자 기디언 래치먼은 마치 한편의 역사추리소설처럼 독자들을 자신의 서사로 흡입시킨다. 칼럼니스트답게 문장이 늘어지지 않고 박력이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저자의 능력을 거의 손상시키지 않은 번역이다. 아무리 원저자가 좋은 글을 쓰더라도 번역가가 성의가 없거나 능력이 없으면 결국 독자들에게 전혀 친근하지 않은 번역서가 되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상당히 깔끔하다. 거의 번역투를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에게 불편했다. 헤게모니를 쥐어온 서구 중심의 역사관과 접근이 불온해보였다. 책의 표지에는 '우리가 낙관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써있다. 영어 부제는 'Zero-Sum Future: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이다. 이 둘을 합치면 결국 우리는 세계가 아니라 '영미' 중심의 서구세계이며 낙관은 오로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낙관의 시대라 부르는 지난 30년 동안 과연 한국인들은 낙관의 시대를 살았는가. 우리네 삶은 바로 그들로 인하여 수도 없이 흔들리지 않았던가. 세계 자본 시장과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의 손짓 하나에 IMF라는 국가적 재앙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정말 그들은 낙관의 시대를 보냈는가? 대처리즘과 레이건주의 밑에서 얼마나 많은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은 더 부유해졌고 더 행복해졌는가? 그 부유와 행복은 소수의 것이 아니었나? 한 발 양보해서 만약 더 부유했고 더 행복해졌다하더라도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세계가 제로섬의 미래로 나아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낙관의 시대동안 세계는 함께 번영했던가? 오히려 전세계적인 빈부격차 커지고와 강대국들의 세련된 약소국 착취가 더 심해지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말하는 낙관의 시대를 마감시킨 원흉인 그린스펀에 대해 어찌 이리도 관대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과 역사에 대한 판단 착오는 미래에 대한 그릇된 비전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대담(?)하게 선언한다. 
'강하고 성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모습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다.'
한마디로 웃기는 짬뽕이다.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은 강하고 성공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미국'이 아니라 '세계'이다. 너님들의 안정과 번영이 어찌 논리적으로 세계의 희망이 되는가.  그것도 범죄적 탈규제로 세계 경제를 파탄내고, 재정이 파산지경에 이르고, 아프간 전쟁은 10년째 절절매고 있는, 종전 이후 가장 볼품없는 너님들이 어찌 이리 당당히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은 변했다. 세계가 바라는 미국은 절대 군주가 아니라 책임있는 국가이다.  

 이러한 주장이 영미권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는 지 모르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이렇게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한 세계는 미국에게 그들이 바라는 권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이 불온으로 이어질 때,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 할 때, 세계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미국이 세계라고 착각하는 머저리가 얼마나 많은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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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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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시민의 정치 좌표 그리기


  『국가란 무엇인가』는 ‘유시민의 정치 좌표 그리기’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플라톤, 홉스, 루소, 마르크스를 망라하며 정치철학의 좌표를 깔끔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서 있는 좌표를 명료하게 선언하고 있다.

  지식 소매상을 자처하는 그답게 대중들에게 정치철학의 계보를 맛깔스럽게 설명한다. 그가 간략하게 그려내는 계보는 국가주의-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는 여기에 플라톤의 ‘목적론적 국가론’을 끼워 넣는다.

  홉스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국가론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게 한 ‘국가’를 신격화한다. 국가가 국민의 안보를 위하는 한 국민은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국가를 계급 지배의 도구로 보고 철폐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과 ‘악마’ 사이에 위치한 자유주의 국가론은 그 스펙트럼이 꽤 넓다. 로크의 법치주의, 스미스의 시장경제, 밀의 자유주의,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까지 자유주의 진영 내 이념적 다양성이 높으나, 이들은 국가가 선을 행하려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주류적 정치이념이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에 걸쳐있다고 진단한다.

  유시민은 어찌 보면 진부한 국가론의 x축에 오랫동안 배격된 플라톤의 ‘목적론적 국가론’을 불러들인다. 플라톤은 만물이 고유의 텔로스(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 역시 예외가 아닌데, 그는 국가의 텔로스가 정의라고 주장했다. 유시민은 플라톤의 견해를 자유주의자의 견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가’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로 규정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과 정치인 유시민의 ‘독창성’이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구체적인 정의의 개념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채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국가의 정의란 국민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일 테다. 유시민은 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 이를테면 자유적 기본권, 교육권, 환경권, 행복추구권 등이 ‘헌법’을 통해 규정돼있다고 설명한다. 헌법이 없던 플라톤의 시대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이 전제 군주나 일부 귀족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헌법이 정해지는 현대 정치체제에는 권리의 주체들이 권리를 정할 수 있다. 바로 그 차이로 인해 유시민은 다시 지금, 여기에 목적론적 국가론을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라는 관념적인 조직은 인간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을 통해 실제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운영하는 인간주체들이 그러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 유시민은 도덕적 국가 실현을 위한 정치인의 도덕 이념으로 베버의 ‘책임윤리’를 내세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진보주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베버식의 윤리보다 의도의 순수함을 중시하는 칸트의 ‘신념윤리’을 추구한다. 신념윤리에 입각한 진보주의자는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할 때엔 사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적지만, 그들이 국가권력에 참여할 때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동기만 중시하면서 정치적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단적인 예시로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을 든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여러 정치 주체들이 결과보다는 동기만을 중시하며 투쟁에 골몰한 결과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나치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베른슈타인을 옹호하며 혁명보다는 개혁주의자를 표방한다.

  이 지점에서 최근 진보정당과의 합당 논의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유시민 대표가 던진 메시지의 뜻이 분명해진다. 그는 진보정당이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변화해 스스로 국가권력 운영을 맡으려는 전략으로 나아갈 의사가 확인된다면 국민참여당이 함께 하는 문제를 검토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책임윤리론자’인 유시민은 그동안 ‘신념윤리’를 내세워 왔다고 보여지는 진보정당이 ‘책임윤리’를 추구한다면, 달리 말해 ‘사회주의’라는 ‘동기’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책임’을 중시한다면 합당을 고려하겠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유시민은 최근 대세라 할 수 있는 야권연대에 대해서도 결과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책임윤리로 바라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 진단한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던 타협 없이 자기 당의 후보를 내기보다, 선거를 이기기 위해 적절한 타협을 하는 것은 신념윤리를 중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유시민은 목적론적 자유주의자이자, 개량주의자이며, 책임윤리자이다. 그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통해 깔끔히 그린 좌표 위에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나는 그가 여기서 쓴 것들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아직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정치와 그가 보이려 하는 정치 사이의 간극을 부정하기 힘든 것 같다. 그가 그 간극을 좁혀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한, 나는 유시민의 정치를 응원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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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주경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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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대항해시대』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책은 근대 세계사를 해양 세계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려는 하나의 시론이다.”

책의 첫 문장은 600페이지에 이르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분명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저자 주경철 교수가 ‘새롭다’고 부르는 그 문제의식이란 대륙 문명 중심의 기존 역사 서술방식에서 탈피해 ‘해양’이라는 프레임으로 근대 세계사를 포착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책의 첫머리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책 전체에 팽팽하게 깔려있는 문제의식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특정 지역 혹은 국가가 역사 서술의 주체가 되는 ‘중심주의’, 그 중에서도 오늘날 지구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서양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새로운 관점을 끈질기게 붙잡고 현대 사회의 뿌리가 된다고 불리는 근대 초기(15-18세기)를 다시 검토한다.

근대의 형성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한권의 책에 모든 내용을 담아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에 저자는 몇 가지 핵심주제를 선정했다. 그가 오늘날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한 주제들은 책의 구성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화됐다. 제1부 「근대 세계 구조의 형성」은 <제1장: 세계의 팽창, 세계의 불균형> <제2장: 세계와 유럽의 조우: 유럽의 해상 팽창> <제3장: 국가와 자본의 결합: 동인도회사에서 제국으로>로 구성돼있으며 근대 세계 구조의 형성 과정을 전반적으로 조망한다. 제2부「폭력의 세계화」에서는 그 과정이 ‘폭력적’이었다고 규정하고 <제3장: 근대 해양 세계의 내면: 선박․선원․해적> <제4장: 근대적 폭력, 폭력적 근대: 군사혁명과 유럽의 팽창> <제5장: 화폐와 귀금속의 세계적 유통> <제6장 노예무역: 근대 세계의 비극>에서 피로 얼룩진 근대 세계의 형성을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제3부 「세계화․지역화된 문화」에서는 폭력적 세계화의 결과 형성된 지구 네트워크가 전 세계의 환경과 문화에 끼친 영향을 <제7장: 환경과 인간> <제8장: 기독교의 충격: 사회의 위기와 의식의 위기> <제9장 문화의 교류: 언어․음식․과학 기술>를 통해 살펴본다.

지금부터 본론에서는 저자가 채택하고 있는 두 가지 관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저자가 다루고 있는 방대한 내용이 그의 야심찬 의도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본론1]에서 저자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이 맺고 있는 관계의 속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분석한 후 해양 중심의 역사 서술에 어떤 한계나 문제점은 없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본론2]에서는 저자가 내세운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 어떠한 방식으로 본문에서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확인한 후 이것이 진정으로 유럽의 신화를 깨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달성하고 있는지를 비판할 것이다.

 

 

2. 본론1: 해상 팽창=근대 세계의 형성?

이 책의 부제는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로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이 맺고 있는 관계의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항해시대』에서 저자는 해상 팽창이 근대 세계 형성의 본질적 요소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정적 계기’라고 판단하고 있다. 일례로 그는 근대사의 발전에서 구조적 전환의 결정적 계기로 중국의 해상 후퇴와 유럽의 해상 팽창을 지목하고 있다. 15세기 전만해도 군사적․경제적으로 유럽에 우위를 점했던 중국이 바다 문을 걸어 잠근 동안 유럽이 다른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종국에는 유럽식 근대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유럽은 육지가 아닌 바다를 통해 전체 대륙을 집어삼키거나(중남미), 중요 거점들을 확보(인도와 동남아)하는 방식으로 야금야금 세력권을 확대해나갔다. 이들은 이곳에서의 인적․경제적 탈취와 착취를 바탕으로 경제력 강화→군사력 강화→경제력 강화의 선순환을 일으키며 19세기 들어서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성장했다. 전지구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유럽이 자신들의 유럽식 근대를 세계에 이식해 나갔다는 큰 그림에는 별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해상 팽창이 이 전체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였다는 저자의 주장은 미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유럽의 해상 팽창이 근대 세계의 형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벌어진 하나의 ‘사건’을 넘어 ‘원인’에 해당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해상팽창을 유럽식 근대 세계 형성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15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구축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군사적 혁신이 일어나는 사회적 상황이었고, 유럽식 해상팽창은 이러한 사회적 요건이 촉진한 특수한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포르투갈 성인 남성의 30% 가까이가 바다로 나가고 적은 숫자의 군인들이 현지를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이는 정화의 원정과 유럽인의 해상 진출을 비교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서구식 자본주의도, 무자비하고 사악한 전쟁문화도 깃들지 않은 정화의 함대는 원정길에서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정화의 원정으로 자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고 해서 아주 먼 지역까지 수많은 주민들이 이주하는 대량 인구 송출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다.

정화의 원정함대 이후에도 중국의 해상활동이 계속 이어졌다고 해서 중국이 서구처럼 군사적․경제적 제국을 구축했을까? 저자도 유럽의 해상팽창의 특수성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유럽 본토에서 벌어진 특수한 상황, 자본주의의 태동과 신분제의 동요가 해상팽창에 미친 영향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2부 『폭력의 세계화』에서 유럽 해상 팽창의 가장 특수한 성격인 ‘폭력성’의 문제를 다루는데 노력을 쏟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해상에서 이뤄진 폭력적 활동은 유럽 본토에서의 군사적 상황이 야기한 하나의 ‘결과’로 바라보고 책의 많은 지면도 유럽 본토에서 이뤄진 군사적 혁신을 다루고 있다. 요컨대 해상 활동이 유럽 세계가 비유럽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을 촉진했지만 종국에 유럽식 세계체제를 형성하는 것은 결국 육지에서 일어난 일이며, 해상 확장은 육지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일으킨 하나의 결과이자 근대세계의 성립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단계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유럽의 해상 팽창이 근대 세계의 형성의 근인은 아니더라도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일임하고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러 가지 기여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것은 세계화, 즉 진정한 의미의 ‘세계’의 형성이다. 유럽인들은 자연환경의 장애물 외에도 또다른 인간들이 가로막고 있는 육지가 아닌 해양을 통해 전지구적인 네트워크의 형성을 현실화했다. 해상 팽창이 ‘세계의 성립’을 야기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 해상 팽창이 성립한 것은 보통 세계가 아니라 ‘근대’ 세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해상 팽창이 ‘근대화’와 함께 진행된 것은 해상 팽창과 근대의 성립은 그저 나란히 일어났는지 인과의 순환사슬을 이루며 함께 하나의 세계를 형성해 나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 수 있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서 근대 세계의 형성에 유럽식 근대의 세계화 외에도 해상 팽창 자체가 어떤 고유한 근대적 특성을 갖고 있고, 이것이 육지와 조우하며 오늘날의 근대 형성에 기여한 바가 있는지를 검토했다. 구체적으로는 선원들의 생활과 해적 문화를 통해 이러한 기여가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선원들의 삶에서 산업시대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특성을 읽어내고 해적의 세계에서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질서를 엿보았다. 레디커의 견해에 따르면 선원은 가장 초기의 그리고 최대의 자유 임금노동자 집단들 가운데 하나였다. 자본과 인력이 대규모로 집중된 선상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위계구조가 최초로, 극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위계구조는 선상폭력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출됐는데 이러한 자본주의 질서에 극단적으로 저항한 존재가 바로 해적이다. 저자는 억압적이고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는 선원 집단이 대규모로 형성되는 현상에서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자본과 노동 간 갈등의 전조를 읽고, ‘해적’을 그 상징으로서 포착한다.

안타깝게도 논의는 이 지점에서 걸음을 멈춘다. 바다의 프롤레타리아들이나 그 후예들이 육지로 돌아가 노동계급을 형성하고 바다 위에서의 경험과 영감을 바탕으로 계급투쟁을 이끌었는지는 이 책에선 파악할 수 없다. 해상 팽창과 ‘근대’가 맺는 관계에 대한 좀 더 엄밀한 논리를 전개했다면 근대 세계의 성립에서 해상 팽창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저자의 견해를 탄탄히 보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본문 내용만으로는 그 관계가 모호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3. 본론2: 또다른 신화, ‘유럽 벗어나기’

지금부터는 『대항해시대』의 유럽중심주의 극복 시도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유럽중심주의란 오늘날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서구가 역사 서술의 주체가 되고 나머지 대륙들은 그 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유럽의 패권 장악을 필연적인 귀결로 전제한 상태에서 세계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의미를 부여해 주체-승리자인 유럽이 대상-패배자인 비유럽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해나가는 이야기를 낳는다. 유럽중심주의적 사관은 우연적 요소들마저도 유럽의 헤게모니 장악의 필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역사 왜곡을 야기해왔고, 그 문제의 심각성이 지난 20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저자는 『대항해시대』에서 이러한 유럽중심주의적 서술의 대안으로 지구사(global history)를 들고 나왔다. 지구사 연구자들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비교사적 연구 방법’이다. 특정 집단이나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고 동일 사건에 대한 다양한 역사 서술을 비교함으로써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레판토 해전의 재해석을 든다. 기존의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은 레판토 해전이 16세기에 오토만 제국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노리고 침략을 기도했다가 패배한 전투로 그 이후 세력이 쇠퇴해 유럽을 더 이상 별로 위협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터키 측에서는 육군 위주로 육상 팽창을 추진하던 오토만 제국으로서는 지중해로 공격해 들어갈 의도가 없었고, 레판토 해전 시기에 오토만 제국은 유럽 세력에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쇠퇴를 맞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대 팽창의 시대였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이를 균형 잡힌 역사 서술의 표본으로 삼고 『대항해시대』에서 군사적 정복 과정, 노예무역, 과학기술의 발전과 교류 등의 주제를 이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공정하게 다루고자 노력했다.

단지 상반된 입장의 역사적 사료를 단순히 비교하고 한쪽 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는 지구사적 서술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을 벗어나려면 특정 이데올로기, 즉 ‘~주의’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특정 존재가 서술의 주체가 되지 않는, 즉 역사 서술에 ‘주인공’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하나의 전범으로 삼는 레판토 해전의 재해석은 진정으로 ‘균형잡힌 시각으로 근대사를 지구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목표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 해석은 분명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레판토 해전의 ‘~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을 극복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레판토 해전’이라는 특수한 사건에 대해서 투르크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이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에 대해 객관적 사료를 바탕으로 승리를 거둬 레판토 해전에 대한 역사 서술의 주인공이 유럽에서 오토만 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혹은 비슷한 사례에서 어느 한쪽의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 사료가 근거가 없을 때는 상대주의적 견지에서 두 가지 관점 모두 나란히 보여주는, 순전한 의미의 ‘비교’만 이루어진다면 이는 일종의 탈중심주의라기 보다는 혼합중심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레판토 해전의 재해석 방식을 따르는 『대항해시대』 역시 마찬가지로 여전히 주인공을 상정하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실과 상인들,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들 같은 ‘유럽 세력’이 그 주연이다. 종종 다른 문명의 다른 문화들도 잠시 역사 행위의 주체로 서술되지만 이는 앞서 말했듯 탈중심주의적 서술이라기보다는 혼합중심주의에 가깝다. 근본적인 한계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항해시대』를 지구사적 서술이라고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15세기부터 유럽이 앞서나가고 있었다는 강한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인식에 비판을 가하며 이를 반박하는 많은 역사적 사료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서구 역사학계와 터키 역사학계를 비교사적으로 연구한 레판토 해전의 재해석을 기준에 비춰봤을 때 객관성이나 균형감이 충분하지 않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례들은 서양학자와 일부 일본학자들의 서로 다른 시각을 종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 선정 자체도 서구의 폭력적 군사 지배, 기독교의 전파에 따른 문화적 변화 등 서구를 기준으로 선정한 것이다. 전체 내용을 종합해 볼 때도 결과적으로 이 책이 수행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사료와 근거 없는 추측에서 비롯된 역사적 왜곡을 수정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를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항해시대』가 ‘유럽이 15세기부터 손쉽게 세계를 장악했다’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난 후 도착한 곳은 아무래도 ‘유럽이 우여곡절 끝에 세계를 장악했다는’ 보완된 유럽중심의 서술인 듯하다.

 

그렇다면 저자와 『대항해시대』는 유럽중심주의 극복이라는 목표달성에 실패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른 문제 하나를 먼저 풀어야 한다. 그것은 애초에 주인공 없는 역사 서술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주인공 없는 역사 서술이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지구사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했듯 세계 모든 지역의 역사를 공평하고 자세하게 기술하는 일이란 하나의 ‘이상’일뿐 현실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 덧붙여 애초에 역사 서술이란 주관적 행위일뿐더러 필연적으로 어떤 문제의식이나 주제의식이 기저에 깔릴 수밖에 없다. 앞서 제기한 현실적인 문제를 떠나 역사가가 서술의 주체를 상정하는 것도 문장에 주어가 있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벗어나려고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중심적 서술’과 ‘~주의적 서술’ 모두가 아니라 후자뿐이다. 즉, 특정 대상을 역사 서술 주체로 삼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의 채택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대항해시대』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서술하면서도 그들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고 그 집단의 역사적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유럽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매우 적절하게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주인공으로 삼되, 영웅으로 모시지는 않고 있다.

반대로 이제 저자는 그 지난한 줄타기 끝에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라는 원대한 꿈을 완전히 이뤘다고 평할 수 있을까? 그는 정말 유럽의 신화를 벗겨 낸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대항해시대』가 다루는 주제설정 자체가 주인공이 승리하는 헤피엔딩의 프레임 안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서구와 근대세계의 형성에 관한 문제자체가 이미 일종의 중심주의의 속박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애초에 서양의 것이며, 아무리 근대적 요소를 비유럽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근대의 기준은 서양이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도 가능하다. 유럽이라는 신화를 벗어나려는 탈유럽중심주의는 ‘상징적 행위’에 불과하며 이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유럽의 신화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세계의 형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유럽은 언제나 종국에는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역사 서술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며 ‘객관적 인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 엄밀한 유럽중심주의적 사관을 구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아무리 기존 주장들을 정밀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하더라도 ‘근대’라는 문제설정 안에서는 큰 결론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지구사 연구가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고 진정한 상호주관적 객관성 추구 행위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프레임’의 편향에 의한 왜곡이 없어야 한다. 특정 존재를 서술의 주체로 채택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주관성의 문제를 극복하는 동시에 상대주의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역사적 인식들을 서로 겹쳐보며 최대한 균형 잡힌 서술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같은 프레임에 대한 상이한 입장의 사관이 파악한 역사적 인식들 외에도 프레임 자체도 한쪽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하게 설정해 여기서 얻은 역사적 인식들도 덧대야만 우리는 역사의 객관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에서 18세기의 세계사 서술이 진정한 의미의 ‘지구사’적 서술이 되려면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과 같은 서구 중심의 프레임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레임을 설정해 총체적인 역사인식 노력을 도모해야만 할 것이다.

 

4. 결론: 『대항해시대』의 실천적 함의

이상으로 저자의 해양 중심의 관점과 탈유럽중심주의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대항해시대』를 살펴보았다. [본론1]에서는 유럽의 해상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이 맺는 관계의 속성에 대한 저자의 판단을 고찰해보았다. 이에 대해 저자가 해상팽창이 근대 세계의 형성에 근본적 원인이라고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결정적 계기’라는 언급은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해상 팽창이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성’을 세계화하고 그 결과로서 전 세계가 유럽식 근대 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에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근대 체제 자체의 ‘근인’으로 확대해석할 가능성에 대해 비판했다.

[본론2]에서는 저자가 유럽중심주의적 서술 방식의 극복을 위해 시도한 지구사적 접근, 즉 비교사적 연구를 통한 객관적 역사 서술을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검토했다. 이에 대해 저자가 표본으로 삼고 있는 레판토 해전 재해석의 비판에서부터 시작해 『대항해시대』가 채택하고 있는 탈유럽중심주의가 오히려 유럽의 신화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에 대해 논증했다. 결론적으로 『대항해시대』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객관적 역사 인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상반된 입장의 비교가 아니라 프레임 자체를 재설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대항해시대』가 던지고 있는 실천적 함의에 대해 고찰해보겠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근대 세계 구조의 뿌리가 형성된 15-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대항해시대’를 살펴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선 『대항해시대』의 바다가 근본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이다. 육지는 대륙으로 나뉘어있지만 바다는 하나로 연결돼 전 대륙을 감싸고 있다. 그 바다를 장악한 자가 세계를 제패했다는 대항해시대의 전설은 지구의 다른 구성원들과 가장 폭넓게 교류하는 동시에 자신의 강점을 이용해 그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늘과 우주, 그리고 인터넷이 또다른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에 누가 이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대항해시대의 전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많은 돈을 들여 조만간 외나로도에서 인공위성을 자력발사 하고, 선진국들이 IT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계 네트워크에서 우월한 지위를 잃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재편되는 세계체제의 위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대항해시대』가 시도하고 있는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에서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함의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저자가 결론의 말미에서 짧게 밝히고 있기도 한 그것은 평화적 세계화이다. 유럽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지난 5세기 동안 진행된 폭력적 세계화의 과정을 어느정도 합리화하게 돼있다. 유럽중심주의를 현실인식에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오늘날 세계화 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행태들도 예전에도 그랬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수천만의 노예와 전사자를 만들어낸 이 유럽식 근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을 단호하게 배격하기 위해선 유럽의 신화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세계화와 근대화 과정의 폭력성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배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이것이 평화적 세계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대항해시대』와 같은 객관적 역사 인식을 위한 노력이 부단히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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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 웰스 : 붐비는 지구를 위한 경제학
제프리 삭스 지음, 이무열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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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류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동시에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경제 위기, 지구온난화, 자원 고갈, 인구 폭증은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다. 이러한 전 지구적 위기 한가운데에서 한 경제학자가 주목받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로 지목한 제프리 삭스다. 그의 경제학은 탁상공론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당면 과제들을 해결한다. 삭스는 1980년대 말 볼리비아에서 인플레이션을 연 4만%에서 10%대로 끌어내렸고 세계은행, UN 등 국제기구에서 자문을 맡으며 빈곤문제 해결에 앞장서왔다.

삭스의 경제학은 일종의 ‘의술’이다. 그는 객관적 수치를 분석해 세계 경제 환부를 진단하고 현대경제학과 과학기술이라는 메스로 종양을 도려낸다. 이번에 번역된 『커먼 웰스(Common Wealth)』는 병에 걸린 세계에 대한 진단서와 처방전이다. ‘경제과 임상의’ 삭스는 이제 『빈곤의 종말』의 ‘빈곤’이라는 국소 부위 치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후변화, 인구 팽창, 에너지 고갈 등 전 세계적 문제 해결을 고민한다.

삭스가 그리는 세계의 미래는 상당히 밝다. 그는 21세기가 공동번영과 대수렴의 세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과학기술의 전파로 빈국들이 신속히 경제성장을 이뤄 부국과의 소득 격차를 줄이고 경제적 번영 위에 국제사회도 더 안정될 것으로 전망한다. 지속가능한 기술의 개발로 환경 재앙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엔 분명한 전제가 있다. 인류 스스로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현재 직면한 위험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만약 전 세계가 이를 위한 공동 목적과 실질적 수단을 합의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쇠망할 것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시대의 인류에게 분명한 처방을 내놓고 있다. 그는 앞으로 △에너지·토지·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 시스템 구축 △2050년까지 세계 인구를 80억명 이하로 안정화 △2025년까지 극단적 빈곤의 종식이라는 목표를 달성한다면 무서운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삭스는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는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방대한 본문에서 풍부하게 제시한다. 예를 들어 인구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가족계획 및 피임 보조와 같은 즉각적 대책과 적게 낳고 잘 기를 수 있는 육아 환경 조성을 위한 아동생존율 향상과 같은 근본적 대책을 함께 제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목표 달성에 필요한 재원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기후변화 완화, 기후변화 적응, 생물다양성 보존, 사막화 방지, 세계인구 안정, 지속가능기술개발, 최빈국 구제 전부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재원은 놀랍게도 연간 원조국 GNP의 2.4%에 불과하다. 기후변화를 완화하는 데는 원조국 GNP의 1%, 최빈국들이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도록 하는 데는 원조국 GNP의 0.7%면 충분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독자들이 개인으로서 공동의 번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목록도 제시한다. ‘「네이처」 같은 과학잡지를 보며 우리 세대의 과제를 학습하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단체에 가입하라’는 등 그의 제안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약간의 돈과 시간만 들이면 될 이러한 노력의 부재가 초래할 결과는 인류의 쇠망이라고 삭스는 분명하게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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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된 신 - 종교는 왜 정치를 욕망하는가
마크 릴라 지음, 마리 오 옮김 / 바다출판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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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크 릴라는 『사산된 신』에서 오늘날 분쟁의 씨앗을 통찰하기 위해 해묵은 논쟁거리를 다시 꺼낸다. 그것은 지난 수백 년간 서구 철학계와 신학계를 뜨겁게 달군 ‘정치신학’ 논쟁이다. 근대 들어 철학자들은 정치에서 신학을 분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합리적 정신이 태동하면서 정치적 결단을 하늘의 계시에 맡기는 것의 불합리함을 깨닫고 종교를 정치에서 떼어내려 한 것이다.

중세 유럽 사회를 지배한 신학-정치적 악순환의 고리를 처음 끊은 것은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였다. 홉스는 ‘신의 뜻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은 왜 종교를 믿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논쟁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치환했다. 그는 종교의 존재 이유를 인간의 무지와 공포에서 찾으며 종교를 오로지 인간적인 현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홉스의 영국과 달리 유럽대륙에서는 어떻게든 종교와 정치를 조화시키려는 제3의 길이 적극적으로 모색됐다. 마크 릴라는 여기서 비극이 잉태됐다고 판단한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에게 종교의 유익을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유익이란 ‘도덕성’이다. 그는 『에밀』에서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상 종교는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정서나 양심에 뿌리를 둔 신앙은 ‘도덕 종교’로서 인간 정신에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칸트는 도덕 종교의 기반을 더욱 견고히 다졌다. 그는 기독교가 바르게만 개혁된다면 인간의 도덕성 향상에 가장 적합한 종교라고 주장했다. 칸트에게 이성적 인간은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최고의 선은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두 가지 공리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신교가 ‘절대지(絶對知)’라는 인간 지식의 정점에 이르렀으며 독일은 개신교 중심의 도덕 생활을 통해 인류의 화합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적 바탕 위에 19세기 독일에서 낙관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종교가 바람직한 사회 건설에 기여할 수 있고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킬 일은 없다고 낙관했다. 또 이들은 예수의 신성은 부인하되 복음의 도덕적 메시지는 합리화해 근대 정치와 문화생활에 적용하고자 했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독일의 전쟁 기도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으로 독일 부르주아 사회가 무너지면서 이를 지지하던 자유주의 신학도 함께 몰락하게 된다. 자유주의의 부푼 꿈은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진정한 확신을 심어줄 수 없는 ‘사산된 신’임이 드러난 것이다. 부르주아 생활에 대한 진부한 도덕관과 역사적 낙관론으로 점철된 자유주의 신학은 애초에 “왜 기독교인이 돼야 하는가?”라는 신앙의 근본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선 극도의 정치·사회·경제적 혼란 속에 다시 인간을 성서 속 구원의 신, 구세주 하느님과 화합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났다. 독일은 자신의 몰락을 가져온 신학을 정치에서 완전히 배격하는 홉스의 지혜를 선택하기보다 새로운 신학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구원에 대한 강렬한 갈증을 해결해줄 새로운 계시였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고자 했던 바르트와 로렌츠바이크의 메시아주의적[]종말론적 구원사상은 독일에서 정치적 구원에 대한 신학적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악용됐고, 이는 결국 신격화된 히틀러를 만들어내며 20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마크 릴라가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과 그들의 신이 사산된 역사를 되짚으면서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3의 길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철학과 정치신학을 구분하는 강은 좁고 깊다”며 “그 물에서 파도타기를 시도하는 이들은 통제 불능의 영적 세력에 휩쓸려 내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신은 개인의 영성 생활 안에 머물러야 하며, 신이 정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회는 극단적인 메시아주의가 도래할 잠재적 위협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대학신문, 2009년 9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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