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질환을 앓는 A씨. 그의 심전도와 맥박은 언제 어디서나 측정된다. 특수 소재로 된 침대시트와 바이오 셔츠는 자나깨나 그의 심전도와 맥박을 감지해 무선송신장치로 전달한다. 이상 증후가 나타나면 이는 바로 담당의사에게 보고되고 담당의사는 즉시 조치를 취한다.

전남 신안군의 한 섬에 혼자 거주하는 B 할머니. 할머니가 사는 섬엔 병원이 없지만 할머니의 당뇨병은 24시간 관리된다. 할머니가 팔목에 찬 혈당관리 팔찌는 간호사의 채혈 없이도 온종일 혈당량을 감지하며 적절한 인슐린 복용량을 알려준다.

먼 미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러한 기술들은 현재 개발 중이거나 이미 개발이 완료됐다. 건국대병원과 한 IT업체는 심전도 측정 장치를 휴대전화에 연결해 의사에게 환자의 심전도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는 의복형 생체신호 모니터링 시스템, 즉 바이오 셔츠를 개발해 지난 2006년부터 시범적용 중이다. 무채혈 혈당 측정기 역시 활발하게 연구・개발되고 있다. 인체의 건강관련 정보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Ubiquitous) 수집・처리・전달・관리하는, 이른바 U-Health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기존의 의학이 IT(정보기술), BT(생명기술), NT(나노기술)를 만나면서 병원에 가지 않고도 원격지에서 첨단 의료 서비스가 24시간 이뤄지는 의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U-Health 시대를 열 ‘지능형 의료기기’


   
 
 

바이오 셔츠: 셔츠의 특수 소재인 전도성 섬유가 심박수, 호흡수, 체온, 운동량 등 생체정보를 측정하고 이를 셔츠에 부착된 무선송신기를 통해 분석장치로 전송한다.

 
 
U-Health 시스템은 크게 의료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 이들을 연결하는 통신 네트워크, 그리고 지능형 의료기기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통신 네트워크는 초고속 유・무선통신의 발달로 이미 U-Health의 구현을 선도할 수준을 갖췄다. 제공자는 병원 업무에 큰 지장 없이 추가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수익을 올린다. 수혜자는 병원 이용에 드는 의료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지능형 의료기기로 양질의 서비스를 편리하게 받아 제공자와 수혜자의 이해관계는 큰 틀에서 일치한다. 따라서 U-Health 시대를 현실화하는 관건은 지능형 의료기기의 개발이다. 김희찬 교수(의학과)는 “제공자와 수혜자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통신 네트워크가 마련되더라도 원격 진단・치료에 필요한 지능형 의료기기가 개발돼야 U-Health 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지능형 의료기기의 기본 기능은 증상의 감지, 모니터링, 분석 등이지만 치료까지 추가로 수행하기도 한다. 감지는 센서가 인체에서 발생하는 물리적・화학적 현상의 변화를 측정하는 단계다. 센서의 전기 신호는 이를 필터링하고 시각화하는 모니터링 과정과 축적된 생체신호를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 U-Health 시스템 관리자에게 전송된다. 생체정보 처리의 최초 단계를 수행하는 센서는 수집하는 생체 정보에 따라 크게 물리 센서와 생화학 센서로 나뉜다. 물리 센서는 이미 상당한 기술 수준을 확보했다. 반도체 압력 센서나 가속도 센서는 개발이 완료돼 시중에서 구할 수 있으며 이들은 손목형 혈압측정기나 운동량 분석기에 이용된다. 혈압, 심전도, 체온, 체중 등 여러 항목을 동시에 측정하는 통합형 의료기기도 출시됐다.


   
 
 

바이오칩: 작은 칩 안에 마이크로미터(μm) 크기의 수많은 모세관들이 배열돼있다. 극미량의 생체시료는  이 모세관을 따라 흐르면서 환자의 건강상태를 알려줄 수 있는 많은 시험 반응을 거친다.

 
 
물리 센서를 기반으로 한 지능형 의료기기는 최근 ‘무자각적 측정’을 향한 진화를 준비 중이다. 박광석 교수(의학과)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무의식중에도 건강상태를 측정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U-Health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박광석 교수팀은 침대, 변좌, 의자 등에 센서를 장착해 여러 생체신호를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수집하는 방안을 연구・개발하고 있다.

한편 이미 상용화 단계에 접어든 물리 센서와 달리 생화학 센서는 아직 초기 개발 단계에 머물고 있다. 김희찬 교수는 “시장규모가 큰 혈당 센서를 제외하곤 상용화된 기술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환자의 전반적 건강상태는 물리 센서를 통해 측정할 수 있지만 구체적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혈액과 같은 생체 시료의 분석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생화학 센서의 개발은 병원 밖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려는 U-Health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기술적 난관이라 할 수 있다.

BioMEMS(Micro ElectroMechanical Systems)는 이 난관을 극복할 방안으로 주목받는 NT 분야의 첨단 기술이다. BioMEMS는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법을 의생명과학 분야에 적용해 만들어진 초소형 정밀기계를 말한다. 최근 이 분야에서는 극미량의 유체(流體)를 다루는 미세유체공학(Microfluidics)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권성훈 교수(전기공학과)는 “미세유체공학을 이용하면 아주 작은 바늘로 찔러 통증 없이 채취한 극소량의 생체 시료를 작은 칩 안에서 마이크로미터(μm) 크기의 모세관으로 흘려 환자의 건강 상태를 분석할 수천 가지의 다양한 시험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병원과 실험실에서 상당한 전문인력과 시간이 투입되는 분석과정을 이렇게 작은 칩 안에서 자동화하는 기술은 U-Health 시대를 앞당긴다. Bio-MEMS 기술은 이밖에도 초소형 수술 기구, 인공장기, 약물전달장치를 제작하는 데도 활발히 응용되고 있다.

U-Health의 치명적 결점 보완할 정보보안 기술


   
 
 

의자센서: 심전도 측정 센서가 달린 이 의자에 앉으면 옷을 입고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심전도가 자연스럽게 측정된다.

 
 
지능형 의료기기 개발이 잘 진행되면 장밋빛 U-Health 시대가 열랄까. U-Health의 도입은 무엇보다 정보보안과 사생활 보호에 대한 심각한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U-Health 시스템에서는 건강정보라는 매우 민감한 사생활 정보가 저장・처리・전달돼 정보보안이 확실히 뒷받침되지 않으면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자통신 김신효 연구원은 “개인 건강정보가 온라인으로 접근 가능하기 때문에 보안 위험이 가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보안 기술이 현재 연구・검토되고 있다.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방법으로는 익명화 기술과 P3P(Platform for Privacy Prefe-rences Project)가 논의된다. 익명화 기술은 암호화 과정을 통해 개인 정보로부터 어떤 개인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P3P는 사용자 PC에 설치된 도우미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사용자의 개인정보 보호정책과 서비스 제공 업체의 개인정보 사용정책을 비교해 약관 동의 여부 등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P3P는 이용하는 서비스 종류에 따라 개인 정보 노출 수준도 조절하며 자신의 정보를 서비스 제공자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를 모니터링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환자에 대한 전자 기록의 안전한 교환과 공유에 관한 기술도 연구・개발 중이다. 의료정보 표준화 실현을 위한 촉진기구인 IHE(Int-egration of Healthcare Enterprise)를 중심으로 의료 기관 간에 환자 정보를 유출 위험 없이 안전하게 접근・활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모델이 개발되고 있다. 여기에는 정보에 대한 접근 통제, 보안 감사 방법 등의 보안 기술이 포함돼 있다. U-Health 시스템의 위험성을 평가하는 표준도 제정할 예정이다. 국제표준화기구(ISO)는 시스템의 위험 평가 결과에 따라 시스템 접근 권한을 관리하고 발생 가능한 사고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보안 관리 기술을 활발히 개발하고 있다.


(대학신문, 2009년 10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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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송아지의 엄마는 얼룩소다.  송아지의 얼룩 유전자는 엄마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되는 유전정보는 핵산이라는 물질에 저장돼 있다.  일반인도 모두 아는 DNA(Deoxyribonucleic Acid)가 핵산의 대표적인 한 종류로 대부분의 생명체가 DNA에 유전정보를 모아두고 있다. 그런데   이 외에도 우리 세포 안에는 풍부한 핵산이 하나 더  있다. 바로 ‘RNA(Ribonucleic Acid)’다.

RNA는 DNA나 단백질 연구에 밀려 수십년간 분자생물학 연구의 외곽에 밀려나 있었다. 세포 내에서 안정적으로 보존되는 DNA와 달리 RNA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따라서 RNA는 유전 현상의 일시적인 매개체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전자 발현 과정의 보조자로만 여겨지던 RNA가 유전자 연구의 주연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마이크로RNA(miRNA)와 같은 RNA계의 신인들이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RNA로 암을 치료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도대체 RNA의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큰 RNA 시대에서 작은 RNA 시대로

DNA 구조를 밝힌 크릭은 1958년에 DNA에 담긴 유전정보가 RNA를 거쳐 단백질로 발현된다는 중심원리를 제안한다. 중심원리에 따르면 RNA는 유전정보의 발현 과정을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생물학자들은 유전자의 발현을 보조하는 전령RNA, 리보솜RNA, 운반RNA를 발견해냈다. 전령RNA는 DNA의 염기서열을 복사해 단백질 합성 기구에 전달하는 역할을, 리보솜 RNA는 단백질 합성 기구를 구성하며 유전정보를 단백질로 번역하는 역할을, 운반RNA는 단백질 합성 기구에 단백질의 조립 재료인 아미노산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한동안 RNA 연구는 이들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데 집중됐다.

1993년, RNA 연구계에 miRNA라는 초신성이 등장했다. 미국 다트머스 대학 빅터 앰브로스팀이 예쁜꼬마선충에서 lin-14라는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miRNA를 처음 발견했다. 이는 lin-4라는 유전자로 20개 남짓한 뉴클레오티드(RNA를 이루는 단위체) 길이다. 이 발견은 두 가지 점에서 놀랍게 받아 들여졌다. 하나는 RNA가 유전 발현을 직접 조절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전까지 생물학자들은 단백질이 유전 발현을 조절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작은 RNA도 기능을 갖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 연구자들은 이 작은 RNA의 매운 위력을 알아채지 못했다. 놀라운 현상이었지만 선충류라는 특정 집단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기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작은 RNA들은 자신의 시대가 열리기까지 5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작은 RNA가 맵다?

작은 RNA의 진면목은 우연한 과정에 의해 드러났다. 1990년대 후반 생물학자들은 유전자 발현이 이중가닥 RNA에 의해 간섭받는 RNA 간섭(RNA interference)이라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중나선인 DNA와 달리 세포 내에서 발견되는 RNA는 대개 단일가닥 구조다. 1998년에 크레이그 멜로와 앤드류 파이어 연구팀은 예쁜꼬마선충에 이중가닥 RNA를 세포 안에 주입하니 이 RNA와 같은 서열을 포함한 유전자의 발현이 억제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선충에서 RNA 간섭이 처음 발견된 이후 곧이어 다른 동물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잇따라 보고됐다. 같은 해 초파리와 트리파노소마에서도 이중가닥 RNA에 의한 간섭현상이 관찰됐고 2000년대 들어서는 척추동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보고됐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식물체나 균류에서 보고된 ‘동시억(Cosupression)’ ‘진압(Quelling)’과 같은 현상들도 RNA 간섭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됐다.

이어서 생물학자들은 이중가닥 RNA에 의한 RNA 간섭 기작을 밝히는 연구에 착수했다. 연구초기인 1999년 데이비드 발콤 팀은 식물에 침입한 바이러스의 RNA가 20 뉴클레오티드 남짓한 작은 조각으로 잘려 간섭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관찰했다. RNA 간섭 작용에 작은 RNA가 발견되자 연구자들은 수년전 보고된 작은 RNA의 존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곧이어 예쁜꼬마선충이 아닌 다른 동물에서 small RNA와 그것에 의한 RNA 간섭 작용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바야흐로 작은 RNA의 시대가 도래했다.

수백에서 수천 뉴클레오티드 길이 이상의 전령RNA, 리보솜RNA, 운반RNA 들에 비해 그 크기가 매우 작은 small RNA는 기존의 수동적이고 정적이던 RNA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RNA에게서 유전 정보 발현과정의 적극적인 조절자로서의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Small RNA들은 RNA 간섭을 통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며 세포의 대사, 번식, 분화, 죽음에 이르는 거의 모든 생명 현상에 관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천여 종류의 small RNA들이 인체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은 RNA와 그것의 간섭현상에 대한 발견이 가져온 파급력은 거대했다. 기존의 복잡한 절차 대신 목표 유전자의 서열을 가진 RNA를세포 안으로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유전자의 활성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준호 교수(생명과학부)는 “RNA 간섭의 발견과 응용은 유전자 발현 조절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관련 연구 분야에서 방법론적 혁신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간단한 방법으로 유전자발현을 조절할 수 있게 돼 연구시간을 단축시키고 인간과 같은 복잡한 생명체도 효과적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중가닥 RNA에 의한 RNA 간섭을 최초로 규명한 멜로와 파이어는 8년 만에 그 공로로 2006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DNA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도 노벨상을 수상하기까지 9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다.

◇생성기작 연구에서 기능 연구로

최근 들어 small RNA 연구는 생성기작을 연구하는 단계를 지나 그 기능을 연구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지금까지 수십 종류의 miRNA의 기능이 확인됐고 다른 small RNA들의 기능도 분석 중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이들은 특히 발생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추측된다. 줄기세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보고도 이어지고 있다.

질병과의 관련성도 주목받고 있다. 특히 암과의 관련성이 보고되면서 최근 몇 년간 small RNA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miRNA가 대부분의 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실제로 폐암의 경우 let-7이라는 miRNA의 수치가 낮은 환자들의 생존력이더 낮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되기도 했다. 김빛내리 교수(생명과학부)는 “현재 암과 관련된 miRNA가 계속해서 동정(同定)되고 있으며 치료제로서의 개발 가능성도 높아 일부는 현재 임상 실험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암세포의 miRNA를 분석해 암의 발생 경로를 추측하는 새로운 진단법도 개발되고 있다. 작은 RNA의 거침없는 행보는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대학신문, 2009년 9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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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은 단순하고 보편적이다. 더 잘 적응한 존재가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명제는 진화 이론 분야에도 적용 가능하다.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총론에 동의하는 생물학자들도 세부이론에서는 주도권 경쟁을 벌여왔다. 『종의 기원』 출간 이후 150년간 이어져온 이론의 ‘적자생존’ 경쟁에서 ‘자연선택’된 진화 이론은 무엇일까.

다윈이 자연선택설을 내놓을 당시 유력한 진화 이론은 ‘용불용설’로 불리는 라마르크주의였다. 용불용설은 기린이 높이 있는 나뭇잎을 따먹으려는 노력으로 목이 길어지게 되고, 이 형질이 자손에게 전달돼 더 목이 길어지도록 진화한다는 획득형질의 유전을 가정하고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자 라마르크주의와 자연선택설은 경쟁관계에 놓였고 수십년간 각각의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들이 제시되며 팽팽한 논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DNA 구조가 밝혀짐에 따라 유전학자들이 “후천적으로 얻은 형질은 유전자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중심원리를 입증하면서 라마르크주의는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된다.

이보디보의 등장으로 최근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반복설’도 20세기 초에는 유전학에 의해 낙오된 이론 중 하나였다. 독일 생물학자인 헤켈은 1866년 “수정란이 완전한 성체가 되는 개체발생 과정은 그 종이 진화해온 계통발생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반복설을 주장했다. 이 이론은 포유류의 수정란이 성체로 발생하는 과정에서 어류, 양서류, 파충류의 형태가 나타난다는 관찰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반복설을 입증하기에는 발생학은 막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유전학은 수십년간 쌓아온 눈부신 성과들을 진화론에 적용해 ‘현대적 종합’이라 불리는 진화 이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반복설이 발표된 이후 발생학이 진화론의 중심무대로 돌아오는 데는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진화 이론의 경쟁에 정치, 사회학적 요소가 개입하기도 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20세기 중엽 소련에서 새롭게 주목 받은 라마르크주의다. 쇠락해가던 라마르크주의는 ‘사회주의의 영웅’ 리센코의 등장과 함께 사회주의 세계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우연한 결과로 생물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은 리센코는 “사회 향상을 위한 개인적 노력과 고통이 보상받는다”는 사회주의 이념과 상통하는 라마르크주의를 추종했다. 엄밀한 사실에만 입각해야 하는 과학이 정치와 결탁한 결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 결과는 왜곡돼야 했다.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은 리센코가 생물학계를 통치한 25년 동안 정직한 과학자들은 숙청됐다. 세계적인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도 옥사했다. 왜곡된 이론이 현실 농업에 반영된 결과 소련과 중국은 급격한 생산량 감소를 겪어야 했다.

최근까지도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 논쟁으로는 굴드와 도킨스의 ‘적응주의’ 논쟁이 있다. 적응주의는 자연선택만이 진화의 유일무이한 결정적인 원동력이라는 주장이다. 굴드는 도킨스를 비롯한 적응주의자들이 진화의 부산물까지 자연선택의 결과인 ‘적응’이라고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 마르코 성당의 스팬드럴과 빵글로스적인 패러다임」에서 마치 『깡디드』에 나오는 빵글로스가 “코는 안경을 받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입증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 적응 형질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적응주의자들은 “일부 사례가 억지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전히 생명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자연선택 이외의 방법으론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며 자신의 주장을 고수했다. 다만 적응주의자들은 적응주의가 끼워맞추기가 아니냐는 비판을 수용해 적응과 부산물을 구분하는 세련된 기준과 절차를 개발하고 있다. 적응주의 논쟁은 지난 2002년 굴드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격렬하게 진행됐으며 그의 사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떤 이론이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을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대학신문, 2009년 3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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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됐다. 인류와 침팬지의 기원이 같다는 다윈의 주장은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자연선택설은 우생학으로 악용되기도 했고 진화심리학을 비롯한 새로운 학문 분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다윈이 내린 결론은 이전의 어떤 이론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다. 지구상의 수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생명 현상을 설명하기엔 자연선택의 논리는 너무나도 단순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생물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자연선택설은 진화 이론의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발생학의 성과와 다윈의 진화론이 통합된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이보디보evo-devo)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생명 형태의 비밀을 벗겨내고 있다. 『대학신문』에서는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아 진화론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는 기획 ‘진화론은 아직도 진화한다’를 준비했다.

핀치의 부리와 다윈 진화론

 

핀치새는 ‘부리’로 유명하다. 20년간 핀치의 부리를 관찰한 기록을 담은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다. 핀치가 유명세를 타게 된 데는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는 다윈의 공이 컸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 중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핀치새를 만난다. 핀치 부리의 다양한 모양에서 진화론의 영감을 얻은 그는 훗날 자연선택설을 발표한다. 그 후 핀치는 『핀치의 부리』의 한 구절처럼 ‘진화과정을 상징하는 토템’으로 추앙받게 된다.
자연선택설은 크게 두 가지 관찰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는 핀치 부리의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핀치가 각자 먹이를 다루기 유리한 모양과 크기의 부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딱딱하고 큰 열매를 먹는 핀치의 부리는 크고 뭉뚝했고 나무 속 벌레를 먹는 핀치는 부리가 가늘고 끝이 휘었다. 다윈은 이로부터 ‘변이의 존재’와 ‘적자 생존’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30여년 동안 증거들을 모은 끝에 자연선택설을 발표한다.
자연선택설 발표 이후 다윈은 종교계 뿐만 아니라 진화론자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생물종이 변화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진화론자들이 왜 다윈을 공격했을까. 장대익 교수(동덕여대 교양학부)는 “당시엔 자연선택이 새롭고 참신한 형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먹이에 알맞은 부리가 ‘왜’ 진화하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어도 ‘어떻게’ 그런 부리가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자연선택설은 명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지구상에 지금껏 살았던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하나의 개체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는 대범한 가설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반진화론자는 “고물상에 태풍이 불어닥쳐 우연히 보잉747기가 조립될 확률과 같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형태는 발생을 통해 만들어진다

 

언뜻 허무맹랑해 보이는 다윈의 주장과 거의 유사한 현상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관찰된다. 바로 하나의 수정란이 완전한 형태와 기능을 갖춘 성체가 되는 과정인 ‘발생’이다. 이건수 교수(생명과학부)는 “말미잘 같은 2배엽 동물이 우리와 같은 3배엽 동물로 진화했듯 발생 과정에서도 2배엽 구조가 비슷한 방식으로 3배엽 구조로 변형된다”며 “진화와 발생의 유사점은 오래전부터 관찰됐다”고 설명했다. 다윈 진화론은 하나의 원시세포가 서로 다른 진화과정을 거치며 물고기도 되고 닭도 됐다고 주장한다. 이는 거의 똑같이 생긴 수정란들이 다른 발생과정을 겪으면서 어떤 것은 물고기가 되고 어떤 것은 닭이 되는 것과 비슷한다.
다윈은 발생과 진화의 놀라운 유사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듬해 미국 식물학자 아서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생학은 형태의 변화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사실들이 담긴 학문인데, 내 책을 평하는 사람들 중 그 점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동료 생물학자들의 무지를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발생학은 진화생물학의 주인공이 될 때까지 한 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다양하고 복잡한 동물을 빚어내는 발생에 대한 지식이 쌓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동안 형태의 기원에 대한 비밀은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보디보, 진화의 블랙박스를 열다

 

20세기 중반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성과가 발생학에 파급되면서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진화발생생물학(이보디보)이라는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이보디보가 진화 이론에 미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장대익 교수는 이보디보의 등장이 “여지껏 생물학자들이 생각해오던 진화의 방식에 대해 재검토하게 된 계기가 됐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혁명의 시작은 ‘괴물 초파리’에서부터 시작됐다. 1915년 유전학자 브리지스는 ‘호메오 돌연변이’라고 불리는 괴물 초파리를 최초로 분리해냈다. 브리지스가 얻은 초파리는 뒷날개 자리에 커다란 앞날개가 발달해서 ‘바이소락스(bithorax, 가슴thorax이 두개라는 뜻)’라고 불리는 기형이었다. 이후에도 더듬이 자리에 다리가 자라는 ‘안테나페디아(Antennapedia, 더듬이Antenna 자리에 발pedi이 생겼다는 뜻)’와 같은 호메오 돌연변이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그보다더 충격적인 발견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루이스를 비롯한 유전학자들은 초파리의 염색체에서 각각의 호메오 돌연변이에 대응하는 8개의 ‘혹스 유전자’를 찾아냈다. 안테나페디아라는 변종이 단 하나의 유전자가 고장난 결과라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혹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독일 생물학자 폴하르트와 비샤우스가 한낱 미물로 여겨지는 초파리의 혹스 유전자와 흡사한 유전자를 지렁이, 쥐는 물론 인간에게서도 발견한 것이다.
혹스 유전자처럼 모든 동물에서 발견되며 몸 전체나 일부를 형성하고 무늬를 결정하는 유전자는 ‘마스터 유전자’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션 캐럴은 마스터 유전자의 발견을 “모든 형태들이 공통 선조로부터 유래했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이고 새로운 증거”라고 평가했고 루이스, 폴하르트, 비샤우스 세 과학자는 그 공로로 199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충격적인 발견은 혹스 유전자에서 그치지 않았다. 많은 종류의 마스터 유전자들이 계속해서 보고됐다. 생물학자들은 벌레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들이 공통의 마스터 유전자 세트가 들어있는 ‘툴킷(tool kit, 도구상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진화의 가지에서 오래 전에 갈라진 동물도 거의 똑같은 툴킷을 공유하고 있어서 초파리 눈을 발생시키는 마스터 유전자를 쥐에다 넣어도 쥐의 눈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땜질하는 수선공, 자연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진 동물들이 거의 동일한 툴킷을 갖고 있다는 발견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다양한 형태는 다양한 유전자가 빚어낸 결과라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진화생물학자인 마이어가 “매우 가까운 동물들끼리가 아니고는 상동 유전자를 찾아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툴킷의 기능이 밝혀지면서 생물학자들은 형태의 다양성과 복잡성의 진화에 대해 새로이 접근했다. 생명의 블랙박스는 발생과 진화라는 반쪽짜리 열쇠가 합쳐지자 드디어 열리기 시작했다.
툴킷은 다른 유전자들의 작동을 조절하는 ‘스위치’를 끄고 켜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유전자 스위치는 DNA에 저장된 유전정보의 발현여부를 결정하는 조절단위다. 하나의 스위치는 여러 개의 툴킷에 의해 조절되는데, 툴킷이 단 500개 뿐이라도 조합을 통해 수많은 스위치들이 정밀하게 조절될 수 있다. 두 번만 조합해도 인간 유전자 수에 맞는 2만 5천가지, 세 번 조합하면 무려 1억 가지 이상의 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각 스위치는 고유한 조합에 의해 조절되므로 같은 툴킷을 갖고도 동물종마다 스위치가 조절되는 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몇가지 색깔과 모양의 레고블럭으로도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진화는 레고블럭, 즉 툴킷이나 유전자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스위치를 켜고 끄는 방식을 조합해 무한히 다채로운 형태를 만들어 온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자콥은 『진화와 땜질』에서 자연을 “손에 닿는 재료들을 모아 뚝딱뚝딱 만들어낸 뒤 영겁의 시간을 거치며 끝없이 개량하고 고치는 수선공”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종의 기원’의 신비를 향한 긴 여정

 

이보디보라는 구원투수의 등장으로 생물학자들은 많은 형태들에 대한 명쾌하고도 ‘시각적인’ 설명을 내놓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보디보를 다윈 진화론의 완성판이라고 하기엔 아직 섣부르다. 장대익 교수는 “이보디보는 아직 유아기 단계”라며 “발생과 관련된 더 많은 유전자들과 그 유전자들이 이루는 네트워크를 밝혀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윈도 고민했던 이타적 행동이나 인간의 사회성 같은 복잡한 행동의 진화도 해결 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전중환 교수(경희대 학부대학)는 “이보디보의 영향으로 마음에 대한 ‘발생체계이론’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실체를 잡기 어렵다”면서 “이보디보는 아직까진 진화심리학자들에게 많은 통찰을 제공해주는 정도”라고 말했다. 핀치 부리의 기원은 이제 거의 완벽하게 풀렸지만 아직도 ‘종의 기원’이라는 신비를 풀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생물학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대학신문, 2009년 3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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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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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언젠가 한번 봐야지 했던 장은진 작가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준호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다. 한 달 가까이 책꽂이에 방치하다 오늘 밤에야 완독했다.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 할 때 가슴이 뭉클했고 눈가도 촉촉해졌다. 이 느낌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간만에 키보드를 잡았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우리가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답장을 받기 위해서다. 그것이 비록 내가 보낸 것과 같은 형태의 답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신인의 반응, 그것이 없다면 편지는 고지서에 불과하다. 아니, 고지서조차도 받는 자의 납부를 바란다. 편지는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지지도, 더더군다나 버려지지도 않았음을 확인하려는 희망수단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위험하다. 답장은, 오지 않을 수도 있기에.

나는 여행을 한다. 눈 먼 할아버지의 눈 먼 개 와조와 함께 모텔을 전전하면서.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기 위한 것이다. 수학선생님의 아들인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숫자를 붙이고 주소를 묻는다. 모텔에서 매일 밤 편지를 쓰고 공중전화로 매일 옆집 친구에게 편지가 왔는지 묻는다. 지하철에서 만난 그녀에게 751이라는 숫자를 부여할 때까지 단 한통의 답장도 받지 못한다. 오늘도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는 말은 일과가 되었고, 답장을 받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여행은 3년째 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751을 만난다.

751은 자기 손으로 쓴 소설을 자기 손으로 파는 작가이자 장사꾼이다. 751도 모텔을 전전하는 여행자다. 751이 이런 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나와 비슷하다. 751은 소설을 썼고 출판을 했으나 751의 책은 서점 창고에서 발견됐다. 그녀는 세상에 편지를 부쳤으나 세상은 편지를 홀대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답장을 직접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런 751은 나를 한눈에 간파했는지 성가시게 끝까지 따라온다. 여자는 나에게 모텔을 소개해준다. 화가의 이름이 객호인 보기드문 여행자 숙소에 나는 여자와 가까워진다. 각방을 쓰던 사이는 한방을 쓰던 사이가 되지만 한 침대를 쓰는 사이가 되진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둘은, 둘이 된다. 친구와 각본을 쓰다 단어 하나를 두고 절교해 버린 751과, 말을 더듬어 누군가와 함께 있단 사실 그 자체가 불편한 내가 둘이 있는데 익숙해지고 의지하게 된다. 최소한 둘은 서로에게 보낸 편지에 서로 답장을 해주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부터, 편지는 오지 않았지만 나는 답장을 받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 여행은 나 혼자 누군가의 답장을 간절히 기다리는 외로운 여행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치면 노인의 몸으로 3년 가까이 거리를 떠돈, 장기가 다 망가질 지경에 이를 때까지 나에게 답장 한 장 독촉하지 않은 나의 개 와조, 와조는 늘 나에게 편지하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가 높다랗게 쌓여있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 우체통이 아니라 답장으로 가득찬 나날이다.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엔, 어쩌면 편지 한 통으로 충분할 지 모른다. 그들이 거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답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으니.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의 '나'처럼 수신인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엔 편지 한 통은 더 절박하다. 아직 내 앞으로 도착할 편지가 한 통 있다면, 삶은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다.

삭막한 이 세상에 엄하게 툭 떨어진 편지 한 통이, 그 종이 한 장이 마음을 얼마나 채우는지를, 받아본 자는 알 것이다. 안다면, 편지 한 통 보내자.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어, 하며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에게. 여기, 아직 편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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