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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쑤 아줌마 쑤쑤 코이카 KOICA 해외봉사단원 활동경험담
김경희 지음 / 한국국제협력단(KOICA)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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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을 아내로, 엄마로 살아왔던 한 평범한 아줌마가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선발되어 태국에서 2년간 한국어를 가르치는 동안의 좌충우돌에 대한 이야기. 해외봉사는 젊은 청년들만 할 수 있다는 통념을 깨뜨릴 화이팅 넘치는 한 아줌마의 경험담. 이 땅의 모든 아줌마들에게 쑤쑤(화이팅)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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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

 

 

두 벽 사이에

길이 있다

포위당했다

 

물이 흐르지 않고

시간도 떠내려 간다

덩그라니 남겨졌다

 

화살 한 발 툭 놓아져

나를 관통한다

화살도 머물지 않는 골짜기

 

 


 

 

동전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프소리

성당

성모와 아기 예수

먹구름과 찬 바람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나는 감추려 한 것이 아니라

지키려 한 것이다

 

하프 소리

잉카 전통 옷

유모차와 아기

 

비가 오고

무덤은 녹아내릴 것이고

나는 여기 표지석을 세웠다

 

돌은 천천히 부스러질테니

나 여기 편히 잠드노라

 

 


 

 

열역학

 

 

우리는 모두 울부짖는 분자들이다

 

거리를 가로 지르는 걸음들

자전거가 남기고 간 바퀴들

가만히 진동하는 눈빛들

 

불안한 분자들의 움직임에서

집단적으로 온도가 발생한다

온도는 운동의 평균

 

나를 둘러싼 것들과의 거리가

나를 차갑게 만든다

누가 나를 스쳐 지나갔으면

 

분자가 충돌하는 사건을

반응이라고 부른다

PV=nRT

 

 


 

 

진실

 

 

뉘른베르크 최고의 소시지집에

다시 찾아왔다

 

비밀을 찾아 홀에 들어갔다

 

중국인 넷이 소시지를 뒤집고 있네

 

쉐쉐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 프란츠는 속수무책이었다.

-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우리의 인생은 단 한번 사는 것이기에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이것은 한번뿐인 삶이므로 신중히 살아야 한다는 통념에 반하며, 파르나데스 식의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의 전이다. 어떤 선택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선택에 더 신중을 기할 것이나, 그 선택이 단 한번의 사건에 불과하다면 어떠해도 좋을 것이다.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니. 십자군 전쟁에서 해자에 뛰어들던 병사나, 지뢰를 밟고 갈갈이 찢긴 사진기자나, 그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 지상에서 금새 휘발돼 버린다.

 

  어떤 무거운 것은 키치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을 은닉한다. 혐오스러운 것은 우리 자신, 인간 그 자체이므로 그 은닉은 혐오스럽다. 완전무결한 키치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으며, 무대가 좁아져 더 이상 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때 대장정은 종료된다. 아니, 종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시는 키치에 저항한다. 키치가 은닉하는 것을 들추어낸다. 그래서 시는 똥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 똥은 아무 쓸모 없지만 그것은 필사적으로 은폐된다. 시는 은폐된 똥에 대한 증언이나 르포다.

 

  인간, 그리고 그 삶 그 자체는 필연적으로 시적이다. 똥을 싸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은닉하거나 배제한다. 예수가 똥을 싸지 않았을 거라는 신학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경박스럽게 똥을 싸는 현장은 은폐된다. 시는 거기에 있고 우리는 시를 훼손한다. 어디선가 대장정을 시작하는 무리가 있고 그 무리는 수많은 시들을 휩쓴다. 희생당한 시는 찬란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다. 그 가벼움이 거의 무한히 반복된다. 먼지들이 굴러다니며 거대한 먼지 덩어리를 형성한다. 지구도 먼지들이 뭉쳐 탄생했다. 훼손된 깃털같은 시들이 뭉쳐 행성이 된다. 인간은 그 행성에 산다.

 

  인류사는 대장정의 역사가 아니라 문학사이다. 비열한 자들은 살아남았고 기록되었다.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시들이 화석도 남기지 않고 지구를 점유했었다. 시는 오염된 언어의 최소한의 오용이다. 기록된 것은 적으며 그것은 기록되지 않은 것을 의도치 않게 호출하는 통로일 뿐이다. 시는 트로이 목마가 되어 오염된 언어의 세계에 똥을 던진다. 그 똥이야 말로 언어로 조형된 어떤 인간보다 인간답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간이란 존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행성에서 살아간다. 그 중력에서 늘 비극이 발생한다. 키치라는 중력. 키치는 질서를 만들며 질서있게 인간을 살해한다. 살해는 치욕적이며 탈옥은 치명적이다. 아직까지 지구를 떠난 인간은 한 명도 없다. 폭발한 우주인의 잔해는 슬프게도 지구로 추락했단다. 다만 누군가는 그 동안 시를 쓰거나, 시를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가능한 전부이다.

 

  누구도 스스로를 장사 지내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자신의 추도사에 흡족해할 시체는 어디에도 없다. 장례는 조악한 번역과도 같다. 그것은 시를 훼손할 뿐 아니라 거짓을 씌운다. 그래서 한 번 더 우리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장례를 치르며 우리는 완벽히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의 슬픔은 기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귀신이 잇다면, 모든 귀신은 묘지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슬픔을 두고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다.

 

  모든 시는 자기 손으로 쓴 묘비명이다. 묘비명이 없는 자들은 풍화되는 백골에 희미한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귀신을 믿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슬픔을 찾아오기 위해 손수 묘비명을 남길 이유가 없다. 우리는 모두 공동묘지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나와 세계의 본질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나는 그저 실려갔다 실려오고 올라탔다 내려갈 뿐이다. 나의 의지는 무엇도 해소할 수 없다. 그저 바람따라 날려다니는 먼지 같이 한없이 가벼이 대기 중을 떠돌 뿐이며, 그 궤적이 바로 운명이며 먼지의 숙명이다.

 

  남은 의문은 먼지의 숙명이 법칙에 따른 운동인 것처럼 우리의 운명 역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리의 존재가 한없이 가볍다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다만 그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순 있다. 인간은 필연 앞에서는 희망을 거두므로. 희망 없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길이다. 혹은 우연 앞에 웃고 또 웃는, 그리하여 삶의 문턱을 넘나드는 삶이 인간의 것일지도.

 

  하여간에 나는 지금 절망할 기력도 없으므로 교체될 비행기를 희망없이 기다리도록 한다.

 

 



위로

 

 

언어의 느낌, 느낌이라는 언어

마음의 여백은 곧 신의 영역, 비어 있는

자만이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니

사랑은 낯선 이에게도 혼신을 다해 어떤

느낌을 전달하려는 것

느낌은 따뜻하나니

세상엔 아직 온기가 남아있고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으니

이 밤 잠들고 싶지 않아라

목소리는 찾아야만 들리는 것이었네

목소리는 어쩌면 찾으면 들리는 것일 수도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찾아 헤메이니

그 목소리를 빌어 달래주기 위함이네

괜찮아 사랑 받고 있어 사랑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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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고두고 보려 했던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2000)를 드디어 보았다. 이 영화를 보고야 말리라는 생각을 한 것은 공교롭게도 내 연구 때문에었는데, 우리 프로젝트를 프리젠테이션 할 때 항상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바로 캐스트 어웨이의 한 컷이기 때문이다.

 

   선충이 궁핍한 서식처를 탈출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 벌이는 특이한 행동을 연구하는 우리 프로젝트에게, 무인도를 탈출하기 위해 산 정상을 오르는 척(톰 행크스)이 적절한 유비였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직접 본 적이 없었고, 보지도 않은 영화를 두고 유비를 한다는 모종의 부채의식 때문에 언젠가는 이 영화를 봐야지 하고 있었던 차에, 어젯밤 드디어 빚을 청산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캐스트 어웨이가 대략 무인도 생존기 혹은 탈출기 정도의 영화라고 추측했다. 톰 행크스가 무인도에 추락해 거기서 생존해서 탈출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영화 전개 대부분은 그의 생존 및 탈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느낀 영화의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이 영화는 나에게 살아남냐, 살아서 나가냐의 문제를 넘어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즉 실존의 문제를 던지고 있었다.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극적으로 살아남은 척은 잠깐 구조에 대한 희망을 걸지만, 이내 포기하고 생존 투쟁에 나선다. 불을 만들고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며 코코넛과 크랩으로 최소한의 생존 스킬을 획득한다. 그리고 영화는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3년 후로 넘어간다. 척은 완전히 원시인이 되어 바닷속 물고기를 창을 던져 손쉽게 잡아 낸다. 그에게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것은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런 그가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한다. 나름 안정된(?) 삶을 확보했는데, 아니, 태평양 한 가운데로 나무 뗏목을 타고 나아간다니, 대체 어떤 동기가 저런 무모한 행동을 하게 한단 말인가.

 

  뗏목을 만드는데 필요한 로프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 실마리가 드러난다. 섬에 있는 모든 줄나무로 로프를 만든 뒤에도 여전히 로프가 부족하자, 그는 30피트나 되는 로프를 떠올린다. 1년 전, 그가 섬 정상에서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로프이다.

 

  생존의 문제, 즉 '살아남냐, 죽어나가냐'의 문제에서 해방된 척에게 그전까지는 생존투쟁에 가려져 있던 문제,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드러났을 것이다. 생존이 위협받을 때는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맹목적인 지향이 되었지만, 막상 그렇게 살아남게 되자 '이 삶은 무엇인가'라는 자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구조가능성도 거의 없는, 탈출의 방법도 묘연한, 태평양 한 가운데의 무인도에서의 삶은 지난 3년과 마찬가지로 처절한 생존투쟁의 연속일 뿐, 그 이상은 없다. 그의 삶에 주어진 능동적인 선택지는 오직 하나 뿐이다. 언제, 어디서 죽을 것인가. 척은 아마 인간적인 삶은, 그의 자살로만 겨우 확보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완벽주의자인 척은 확실한 자살을 위해, 나무 인형을 만들어 로프에 건 후 정상의 통나무에 걸어 시험을 해보았다. 그런데 그 통나무가 나무인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부러져 버린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해졌다. 자살은, 나의 의지로 달성할 수 있는 '자유'라 여겼건만, 그것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절망은 더 큰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죽음조차 그의 선택이 될 수 없다면, 그는 삶이냐 죽음이냐의 선택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무조건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처음 그가 무인도에 도착해서 맹목적으로 살아남았듯이, 이제 맹목적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자와 후자가 다른 것은, 척에게 이제 죽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삶은 죽음을 피하는 삶이지만, 살아가는 삶에서 죽음은 삶의 함수가 되지 못한다. 척이 뗏목을 이끌고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그에게 삶은 '살아갈' 대상이지 '살아남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음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그에게 어디에 갈 수 있는 가는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만을 결정하면 될 뿐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진대, 파도나 폭풍 따위가 어찌 그를 막아서겠는가.

 

  죽음을 넘어선 척이 뗏목을 이끌고 태평양을 건너 닿으려고 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 곳은 분명 그의 사랑 켈리이다. 그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와중에도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켈리의 사진이 담긴 시계를 선택한다. 그렇게 그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사랑이 수단이고, 연인이 조건이었다면 삶을 포기할 수도 있는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없다. 맹목적인 사랑은 맹목적 삶을 지탱하고 이끌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보루이다. 그의 뗏목은 그가 단 하루도 잊지 않고 바라본 시계 속의 켈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에게 켈리를 다시 만날 수 있냐 없냐는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켈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이며 그것 만으로도 충분한 삶이라고 받아들인 척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이 정도에서 망망대해에 떠있는 뗏목을 배경으로 끝이났어도 훌륭했을텐데, 이 영화의 진면목은 그 이후의 전개에서 드러난다. 척이 구조돼 켈리를 만난 것이다.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 그가 나무 뗏목으로 태평양을 헤쳐 멤피스로 돌아왔는데, 그의 모든 여정을 감내해내게 한 그 켈리가 없어진 것이다. 척의 환영리셉션이 끝나는 장면에서 나는 조마조마했다. 그가 자살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켈리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러 간 것일게다. 켈리를 만난 척은, 왜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냐고 추궁하는 대신, 무인도에서 몇 년간 척의 켈리였던 시계를 돌려준다.

 

  이제 삶의 모든 것이자 단 하나의 것이었던 켈리를 청산한 척이 아마도 죽음의 길을 향해 떠날 때, 빗속을 뚫고 켈리가 척에게 달려온다. 그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키스한다. 척이 찾아온 켈리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다만, 3년이라는 시간 전에 멎어버렸을 뿐. 켈리는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기다렸고, 그를 사랑했다. 다른 남자와 꾸린 집에서 그는 여전히 척의 차를 타고 다니고, 척의 구조 정보를 수집했다. 척의 실종 이후, 모든 게 멈춰버린 켈리는, 척의 귀환과 함께, 잠시 동안의 혼란 후에 다시 척의 켈리로 돌아온 것이다. 생명이어라, 척!

 

  놀라운 것은, 3년 전과 같이 척의 차에 탄 켈리와 척이 둘의 사랑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한 키스를 나눈 뒤, 척은 켈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켈리는 별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켈리는 다른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고, 척은 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척을 사랑하는 켈리가, 켈리를 사랑하는 척이 살고 있을 것임을. 그 사실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살만하며 아름다운 것임을!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켈리를 집으로 보낸 척은, 무인도에서 건져온 천사의 날개가 찍힌 택배물을 배달하러 떠난다. 천사 날개의 주인공은 부재중. 아쉽게 소포만 두고 메시지를 남겨 놓고 길을 떠나는데, 북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네거리에서 천사 날개의 주인공을 만난다. 그녀가 소포가 기다리는 집으로 떠날 때, 척은 네거리 위에 서서 세상으로 뻗은 네 갈래의 길을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짓는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나는 안다. 척이 천사의 날개를 좇을 것임을. 그는 삶을 긍정하는 존재이기에. 살아가는 한 끝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할 척이기에. 켈리든, 천사든, 중요한 것은 사랑이오, 문제는 사랑이다. 사랑이 있는 한 삶은 가능하다.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한다면, 사랑을 삶을 가능케 하리라.

 

  사실, 이 영화가 내게 큰 위로를 주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내 영혼이 조난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서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꿈도 없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의 무참한 맹목이 너무나도 버거웠다. 나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쾌락을 좇는 삶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이 나의 마음을 지배했고, 일상과 습관만이 내 생활을 지탱했다. 그저 나뿐인 시간은 최대한 피하려 했고, 불가피할 땐 술 없인 버티기 힘들었다.

 

  무인도에 떨어진 척처럼, 우리는 '타자'라는 '바다'로 둘러싸인 '삶'이라는 '무인도'에 불시착한 조난자들이다. 망망대해에서 뗏목을 타고 탈출에 성공한 척의 이야기는 영화일 뿐이다. 현실은, 진실은, 삶이라는 무인도는 기껏해야 탈출하려고 시도할 수 있을 뿐, 영원히 탈출할 수 없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나는 저 바다의 타자성에 압도되고 고립되어 왔다. 내가 띄운 뗏목들은 난파되어 해안으로 돌아왔고, 지금도 불안하게 파도들을 맞닥뜨리고 있다. 새로운 뗏목을 띄우는 일은 갈수록 버거워진다.

 

  이대로 무인도에서 늙어 죽는 일밖에 남지 않은 건가, 하고 털썩 주저앉아 있던 나에게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조난자들에게 사랑을!

 

  오직 사랑만이, 나와 너, 나와 세계 사이에 놓인 이 아득한 대양 위에 뗏목을 띄우는 힘이다. 뗏목 위에서 적어도 우린 서로 다른 무인도에서 왔지만 같은 바다에서 절망하는 존재다. 타자라는 바다 위에 절망의 공동체를 꾸리는 사랑이라는 작업은 얼마나 눈부시게 행복한 행위인가. 나는 기꺼이 그 절망을 위해 뗏목을 띄우겠다.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은 삶 그 자체이므로. 무인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랑뿐이므로.

 

  그래, 다시 난파되어 무인도로 돌아올지라도, 저 시꺼먼 바다를 향해 뗏목을 띄울거야. 지금,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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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자는 가까운 곳에 머물렀으나 글은 좀처럼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글을 쓰지 않은 날이 길어졌고, 그 날들은 무참히 기억 속에서 흩어졌으며, 나를 거쳐간 시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였고, 그 자리에 머문 시간만큼 조급해졌지만, 벗어나지 못한 그 자리만큼 좁은 감옥에 갇혔다. 답답함이 불안함에서 무력함으로 이어졌다. 글을 쓸 수 없어 무력했고, 무참했다.

 

  그러다 오늘 신형철의 산문을 읽었다. 그는 말했다. 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들로부터 진실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 말이 나를 쓰게 만들었다. 내 글을 해방시켰다.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는 언어이다. 언어는 세계가 아니다. 언어는 세계를 가리킬지언정 세계일 수 없다. 언어는 세계가 아니므로 진실일 수도 진리일 수도 없다. 나의 언어는 그저 나의 언어일 뿐이며, 나와 나의 언어 모두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세계에서 사라져 가는 존재이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었고, 한 발 더 나아가 그럴듯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고, 내가 말하는 진실이 누군가를 감화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말이 진실을 재단하는 순간, 진실은 손상된다. 닫힌 것은 무한한 것을 품을 수 없다. 문장은 폐쇄적이며 진실은 경계가 없다. 나는 너무나도 건방졌던 것이다.

 

  형식논리학에서 참을 얻는 방식은 두 가지다. 참된 전제로부터 참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 혹은 거짓된 전제를 말하는 것. 거짓을 얻는 방식은 한 가지다. 참된 전제로부터 거짓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 나는 참된 전제로부터 참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참된 글을 쓰고자 욕심을 부렸다. 그러나 그 과정에 수반되는 거짓의 위험성을 두려워했다. 참된 전제를 포기한다면, 역설적이게도 무조건 참이다. 참을 지키는 것은 간단하다. 참이라는 전제를 포기해버리면 된다. 나는 그 전제를 몹시도 움켜쥐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글은 참이 아니다. 고로 거짓이다. 이제 진실을 주장하지 않겠다. 대신 거짓을 써 진실을 지키겠다. 가슴저릿한 거짓말이다. 나는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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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마음이 어수선하고 복잡하다면,

오리온 성운에게 비춰보고 물어보라. 

답은 어찌 됐건 이 우주 안에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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