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삶과 죽음, 존재와 인식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메우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나이브하다. 그것은 필시 어떤 믿음에 기댄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포장될 수 있으나 모든 위장은 언젠가는 어설프다. 순진한 믿음과 가치체계 위에선 어떤 세련된 발화들도 결국은 유약한 대상들이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나는 그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유약함에 괴로워 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작업은 헛짓이다. 유약함을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것, 그 겸손으로부터 확장은 가능하다. 진리는 단순하며, 단순해야 한다. 보편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보편적인 유약함에 가닿는 진리 작업을 꿈꾸겠다. 내 유약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겠다. 그것을 더 들여다보겠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동안 조용하던 독도가 다시 떠들썩하다. 얼마 전 자민당 의원 셋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며 정치쇼를 한바탕 벌이면서 한일간의 불안한 정적은 다시 산산조각 났다. 그 이후 일본 정부 차원에서 방위백서에 다시 한번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면서 한일 관계는 급랭하고 반일 감정은 끓어 넘치고 있다. 심지어 이번 방위백서에는 한반도 유사시 독도에 자위대를 파견하겠다는 강한 도발까지 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 도발은 단순히 한 섬에 대한 영토분쟁을 걸어오는 것이 아니다. 독도 강제 편입은  폭력적 제국주의/군국주의의 상징이며 독도에 대한 권리를 지금와서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정당화 혹은 부활을 상징한다. 일본은 2차대전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공을 위한 미국의 전략과 한국전쟁의 전쟁 특수를 거치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의 지위까지 얻었다. 패전은 잠시의 충격이었을뿐, 그들의 자존심은 경제성장을 통해 어느정도 치유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거품경제 이후 일본의 자존심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경기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깔보던 중국에 추월당하더니, 지진과 쓰나미가 몰아닥쳐 원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타개할 정치적 리더십은 보이지 않으며, 정권교체로 집권한 민주당은 희망마저 잃게 했다. 경제적으로도 첨단사업은 한국 등에 밀리고 제조업 기반은 신흥국에 잠식 당하는 상황에서 고령화라는 악재까지 겹쳐있다. 심지어 절대 우위에 있던 문화산업도 세월이 변해 한류라는 역풍을 맞고 있다.

 이런 지점에서 정권교체 때 한일 우호적 관계 회복을 말했던 민주당 정권까지 독도 도발에 합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며 군국주의를 본격화했던 1930년대와 매우 닮아있다. 서구 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해 제국주의 국가 반열에 오른 일본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구강하고 한반도와 대만 등을 강제적으로 병합하는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성공신화를 구가했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이 밀어닥치면서 일본의 성공신화는 추풍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실업이 폭증하고 경제가 마비됐다. 영국과 미국에서 케인즈와 뉴딜이 등장하는 동안 일본은 독일처럼 군국주의적 확장을 통한 경제회복을 선택했다. 그들은 만주를 침략했고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한 때 동아시아, 동남아, 태평양을 아우르는 드넓은 영토를 가진 대 제국을 건설했다. 한반도 남쪽 좁은 땅에 갇힌 우리가 장수왕 시절 고구려의 영토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처럼, 일본의 우익과 그들을 지지하는 많은 국민들은 그 영광의 시절을 기억하며 그로부터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평화헌법 9조를 바꿔 자위대를 군대로 바꾸고, 다시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 식민지 시절 강제로 빼앗은 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드는 것, 영광의 시절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것을 넘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사실'이라 주입하는 것, 이런 것들은 그릇된 과거로 회귀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을 앞장서서 하는 이시하라 도쿄도지사 같은 사람들이 일본 국민들의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강하지 않은 일본에서 '강한' 일본을 말하는 우익인사들에게 국민들이 상처 받은 자존심을 위로받는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자민당 의원들이 입국거부를 당할 지 뻔히 알면서도 김포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자신들이 한 때 지배했던 한국으로부터 입국거부를 몸소 당하며 자신들의 상처난 자존심을 부러 한번 자극하고, 그 상처로부터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열망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그들의 정치적 술수이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땅인지 일본 땅인지는 그들에게 크게 중요치 않다. 그저 그것이 과거의 영광에 대한 상징이기만 하면 된다. 그들에게 독도는 정치적 자산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진정으로 문제시 하고 싶은 것은 우리네 정치의 태도다.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한 '정치적 자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권의 상징이자 침탈당한 우리네 역사와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이다. 독도는 지켜도 그만, 잃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그 자체이다. 우리 국가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건국되었으며, 일본에게 강탈당한 모든 것을 회복하며 수립된 국가이다. 그런데 지금의 독도는 일본 정치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인들에게도 한낫 정치적 자산으로 대접받고 있다. 독도쇼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벌인 것이라기보다는 한일 합작극에 가깝다.  

 이번 독도쇼를 통해 한국 정치인들은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 출생으로 아키하로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명박은 강단있게 입국을 거부시키는 이미지로 자신의 친일 이미지를 털어냈다. 정권 2인자 이재오는 독도까지 직접 가서 독도쇼를 펼치며 급격히 추락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일부 의원들은 독도특위를 만들어 오는 12일 독도에서 회의를 갖겠다고 한다. 폭력 시위로 악명이 높은 어르신들의 보수단체들이 김포공항 앞에서 일본 의원들의 사진을 불태우며 거친 시위를 하는 모습이 구국의 위인들처럼 보도됐다. 

 하지만 이번에 입국거부 당한 일본 의원들은 일본의 '야당'의원이면서도 '야당의 야당'인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다. 일본에서 그들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일본 언론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스타가 됐다. 한국이 대통령까지 나서서 요란하게 입국을 거부하면서, 김포공항 대기실에 9시간 동안 밥 먹이고 구슬리면서 그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것이다. 일본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자국 국회의원이 옛 식민지 국가 공항에서 입국 거부당했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며 그 여운은 무의식적일지라도 강렬하다. 앞서 말했듯, 일본인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되새겼을 것이며,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초라함을 비교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일장기를 불태우려는 지난 피식민지 국민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국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분명하다. 일본은 지난 역사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와 그에 상응하는 배상을 확실하게 하고, 한국은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번에 벌어진 독도쇼는 이러한 해결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네 반일 감정은 더욱 심해졌고, 일본에서는 우익 인사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우리는 더 사과를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가 됐고, 그들은 더 사과를 안 하려는 상태가 됐다. 

 물론 혹자는 저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 오는데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을 수 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싸움을 걸어온다 해서 이런 식으로 이로울게 없는 싸움을 하는게 아니라 한 수 위의 전략으로 대응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리는 한 수 위기 때문이다. 독도지배에 대한 훨씬 더 탄탄한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다. 가장 크게 이기는 길은 그들에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울릉도까지 고생해서 가서 그들이 관심있는 오징어나 먹고 오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별 이름도 없는 의원이 아무 일 없이 울릉도에 가서 오징어만 먹고 온다면 그게 기삿거리나 되겠는가. 그들이 만약 독도를 방문한다면 그건 더할나위 없이 우리의 큰 승리이다. 독도에 가기 위해선 한국 공항으로 입국해 한국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한국의 섬을 거쳐야만 갈 수 있다는 사실, 즉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를 몸소 입증해주는 길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을 무시하기엔 쇼를 벌이고 싶어하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너무 많다. 반일 감정은 거의 모든 국민들이 공유하는 감정이기에 그 감정을 자극할 수만 있다면 쿡쿡 찔러 자신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높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네들을 말릴 순 없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 나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미래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대통령이었다면, 자신의 인기를 위해 국민 감정을 조작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이득이 되는 단호하고 적절한 대처를 했어야 한다고 본다. 입국거부를 하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하며 요란을 떠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물밑으로 진행하거나 페인트 모션을 넣어 그들이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물 먹게 했어야 한다.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일본에 대한 단호하고 적절한 대처는 그들이 독도에 함정을 보내거나 한다면 전쟁을 불사하고 우리 함정을 내보내는 것, 별것도 아닌 꼴통 우익들이 오징어 먹으러 온다고 하면 오징어나 잔뜩 먹고 허탕치게 하는 것 그 둘 다이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일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잘 읽었습니다 2011-09-14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독도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유용한 정보 읽고 갑니다. 독도 쇼가 빨리 잠잠해졌으면 좋겠네요^^*감사합니다~~~~
 
[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무엇보다도 <불안의 시대>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강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저자의 서술방식과 문장력이다. 저자 기디언 래치먼은 마치 한편의 역사추리소설처럼 독자들을 자신의 서사로 흡입시킨다. 칼럼니스트답게 문장이 늘어지지 않고 박력이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저자의 능력을 거의 손상시키지 않은 번역이다. 아무리 원저자가 좋은 글을 쓰더라도 번역가가 성의가 없거나 능력이 없으면 결국 독자들에게 전혀 친근하지 않은 번역서가 되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상당히 깔끔하다. 거의 번역투를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에게 불편했다. 헤게모니를 쥐어온 서구 중심의 역사관과 접근이 불온해보였다. 책의 표지에는 '우리가 낙관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써있다. 영어 부제는 'Zero-Sum Future: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이다. 이 둘을 합치면 결국 우리는 세계가 아니라 '영미' 중심의 서구세계이며 낙관은 오로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낙관의 시대라 부르는 지난 30년 동안 과연 한국인들은 낙관의 시대를 살았는가. 우리네 삶은 바로 그들로 인하여 수도 없이 흔들리지 않았던가. 세계 자본 시장과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의 손짓 하나에 IMF라는 국가적 재앙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정말 그들은 낙관의 시대를 보냈는가? 대처리즘과 레이건주의 밑에서 얼마나 많은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은 더 부유해졌고 더 행복해졌는가? 그 부유와 행복은 소수의 것이 아니었나? 한 발 양보해서 만약 더 부유했고 더 행복해졌다하더라도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세계가 제로섬의 미래로 나아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낙관의 시대동안 세계는 함께 번영했던가? 오히려 전세계적인 빈부격차 커지고와 강대국들의 세련된 약소국 착취가 더 심해지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말하는 낙관의 시대를 마감시킨 원흉인 그린스펀에 대해 어찌 이리도 관대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과 역사에 대한 판단 착오는 미래에 대한 그릇된 비전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대담(?)하게 선언한다. 
'강하고 성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모습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다.'
한마디로 웃기는 짬뽕이다.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은 강하고 성공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미국'이 아니라 '세계'이다. 너님들의 안정과 번영이 어찌 논리적으로 세계의 희망이 되는가.  그것도 범죄적 탈규제로 세계 경제를 파탄내고, 재정이 파산지경에 이르고, 아프간 전쟁은 10년째 절절매고 있는, 종전 이후 가장 볼품없는 너님들이 어찌 이리 당당히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은 변했다. 세계가 바라는 미국은 절대 군주가 아니라 책임있는 국가이다.  

 이러한 주장이 영미권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는 지 모르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이렇게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한 세계는 미국에게 그들이 바라는 권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이 불온으로 이어질 때,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 할 때, 세계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미국이 세계라고 착각하는 머저리가 얼마나 많은지 궁금할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외면할 수 없는 진리를 외면하지 않은 자의 이야기
(<라이너스 폴링 평전>,
 테드 고어츨, 벤 고어츨 지음, 박경서 옮김, 실천문학사)

 라이너스 폴링은 노벨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걸로 유명하다. 그는 1954년에 노벨화학상을, 1962년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생화학의 개척자이자 반핵운동가인 그는 과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그렇게 그가 보여준 삶은 나의 지향점이다. 과학적 진리 추구와 사회적 정의 실현은 외면할 수 없는 진리를 외면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공통점을 공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핵전쟁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란 사실은 단백질이 아미노산 서열에 따라 특이한 3차원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자명한 진리이다. 자신의 이성과 양심이 진리라고 가리키는 것을 좇는 삶, 그 과학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삶의 표본, 라이너스 폴링의 내밀한 삶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한반도의 땅, 생명, 그리고 역사 
(<한반도 자연사 기행>, 조홍섭 지음, 한겨레출판)

 한국은 자연사의 불모지다. 서구의 과학은 자연사의 뿌리를 갖고 있지만 우리는 그 뿌리 없이 바로 그 뿌리에서 피어난 꽃인 현대과학에서부터 과학이 시작됐다. 그래서 우리네 과학은 불안하다. 늘 무언가를 쫓길 바쁘다. 과학이 자연을 향해 있지 않고 돈을 향해 있다. 한국에서 뛰어난 인재가 진화학을 하거나 생태학이나 분류학 같은 필드웍(Field Work)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반도 자연사 기행>이 자연사학자나 박물학자가 아닌, 기자의 손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이해가 된다.  그리고 고맙다. 과학자들도 잊고 사는 사실, 이 땅에도 고유의 생명과 자연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속살을 보여주고 들려준다니 말이다.

 

인간은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유사 이래 인류는 진보를 거듭해왔지만, 인간은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았다. 그것은 유한성을 운명으로 하는 인간의 불가피한 결론이다. 끝없는 탐욕이 파멸을 가져와도 인간은 이내 그 파멸의 기억을 망각하고 또 다시 탐욕의 길을 걸어왔다. 전쟁의 역사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역사학의 아버지인 투퀴디데스는 인간의 운명을 예리하게 직감하고 자신이 경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냉철하게 서술했다. 같은 일이 후대에 되풀이될 것이기에 후세에 하나의 거울을 제공하기 위하야. 그 거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정말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았다. 

   
불안한 시대의 불온한 인문학
(<불온한 인문학 >, 손기태 외, 휴머니스트> 

  수유너머 사람들이 인문학에 싸움을 걸어왔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란 기치 아래 본질을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인문학과의 싸움이다. 모든 것이 '쓸모'로 재단되는 시대에 인문학 역시 쓸모 있는 학문이 되려고 몸부림쳐왔다. 인문학의 위기론은 인문학 대중화 같은 담론의 대두로 이어졌으나 도무지 인문학이 대중화가 되고 있는지, 혹은 대중이 인문화가 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 그것은 이러한 인문학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헷갈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수유너머 사람들은 누구보다 그 길에 대해 많이 고민해왔을 터이니, 그들이 생각하는 길이 궁금하다. 

 

 

모든 길은 인간으로 통한다 
(<로드-여섯 개의 도로가 말하는 길의 사회학>, 테드 코노버 지음, 박혜원 옮김, 21세기북스) 

  인간은 길을 만들며, 길은 인간이 다닌다. 길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회적 본질이며 온갖 역사적 사건을 매개하는 역사 그 자체이다. 테드 코노버는 여섯 갈래의 길을 통해 지금, 여기 인간과 역사를 걸어 보이려 한다. 아마존의 원시림에서 파크애비뉴까지, 잔스카르의 얼음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로 난 길 등을 걸으며 그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는 길 위로 어떤 길을 내려 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유시민의 정치 좌표 그리기


  『국가란 무엇인가』는 ‘유시민의 정치 좌표 그리기’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플라톤, 홉스, 루소, 마르크스를 망라하며 정치철학의 좌표를 깔끔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서 있는 좌표를 명료하게 선언하고 있다.

  지식 소매상을 자처하는 그답게 대중들에게 정치철학의 계보를 맛깔스럽게 설명한다. 그가 간략하게 그려내는 계보는 국가주의-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는 여기에 플라톤의 ‘목적론적 국가론’을 끼워 넣는다.

  홉스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국가론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게 한 ‘국가’를 신격화한다. 국가가 국민의 안보를 위하는 한 국민은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국가를 계급 지배의 도구로 보고 철폐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과 ‘악마’ 사이에 위치한 자유주의 국가론은 그 스펙트럼이 꽤 넓다. 로크의 법치주의, 스미스의 시장경제, 밀의 자유주의,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까지 자유주의 진영 내 이념적 다양성이 높으나, 이들은 국가가 선을 행하려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주류적 정치이념이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에 걸쳐있다고 진단한다.

  유시민은 어찌 보면 진부한 국가론의 x축에 오랫동안 배격된 플라톤의 ‘목적론적 국가론’을 불러들인다. 플라톤은 만물이 고유의 텔로스(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 역시 예외가 아닌데, 그는 국가의 텔로스가 정의라고 주장했다. 유시민은 플라톤의 견해를 자유주의자의 견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가’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로 규정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과 정치인 유시민의 ‘독창성’이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구체적인 정의의 개념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채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국가의 정의란 국민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일 테다. 유시민은 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 이를테면 자유적 기본권, 교육권, 환경권, 행복추구권 등이 ‘헌법’을 통해 규정돼있다고 설명한다. 헌법이 없던 플라톤의 시대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이 전제 군주나 일부 귀족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헌법이 정해지는 현대 정치체제에는 권리의 주체들이 권리를 정할 수 있다. 바로 그 차이로 인해 유시민은 다시 지금, 여기에 목적론적 국가론을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라는 관념적인 조직은 인간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을 통해 실제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운영하는 인간주체들이 그러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 유시민은 도덕적 국가 실현을 위한 정치인의 도덕 이념으로 베버의 ‘책임윤리’를 내세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진보주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베버식의 윤리보다 의도의 순수함을 중시하는 칸트의 ‘신념윤리’을 추구한다. 신념윤리에 입각한 진보주의자는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할 때엔 사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적지만, 그들이 국가권력에 참여할 때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동기만 중시하면서 정치적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단적인 예시로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을 든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여러 정치 주체들이 결과보다는 동기만을 중시하며 투쟁에 골몰한 결과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나치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베른슈타인을 옹호하며 혁명보다는 개혁주의자를 표방한다.

  이 지점에서 최근 진보정당과의 합당 논의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유시민 대표가 던진 메시지의 뜻이 분명해진다. 그는 진보정당이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변화해 스스로 국가권력 운영을 맡으려는 전략으로 나아갈 의사가 확인된다면 국민참여당이 함께 하는 문제를 검토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책임윤리론자’인 유시민은 그동안 ‘신념윤리’를 내세워 왔다고 보여지는 진보정당이 ‘책임윤리’를 추구한다면, 달리 말해 ‘사회주의’라는 ‘동기’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책임’을 중시한다면 합당을 고려하겠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유시민은 최근 대세라 할 수 있는 야권연대에 대해서도 결과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책임윤리로 바라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 진단한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던 타협 없이 자기 당의 후보를 내기보다, 선거를 이기기 위해 적절한 타협을 하는 것은 신념윤리를 중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유시민은 목적론적 자유주의자이자, 개량주의자이며, 책임윤리자이다. 그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통해 깔끔히 그린 좌표 위에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나는 그가 여기서 쓴 것들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아직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정치와 그가 보이려 하는 정치 사이의 간극을 부정하기 힘든 것 같다. 그가 그 간극을 좁혀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한, 나는 유시민의 정치를 응원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