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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자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백영옥 작가의 스타일은 소설인 동시에 한국 현대사회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하나의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오늘날 우리네 삶의 여러 모습과 모순들을 진단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현대병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47킬로그램의 여자는 자신이 45킬로그램의 여자보다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45킬로그램의 여자는 자신이 왜 배우 김민희나 모델 장윤주처럼 가는 다리가 아닌지 탄식한다. 세상에 자신이 충분히 말랐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없다(백영옥 20).

이 또한 현대병이다.

반짝이는 볼보C30, 검정색 아우디, 거리가 2백미터도 안되는 편의점에 갈 때도 자신의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다리는 피트니스 클럽이나 에스테틱 숍에서만 쓰는 신체기관이고, 발은 지미추마놀로 블라닉을 신을 때만 쓰고 싶은 연봉 3천만 원짜리들. 예금, 통장, 펀드, 하다못해 보험 하나 없으면서 그들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80-81).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질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로도 번역할 수 있는 이런 현대병이 만성적으로 퍼져있다. 백영옥 작가는 패션지 에디터인 주인공 이서정을 내세워 이러한 세태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극단적으로 외모지향적, 소비지향적, 물질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를테면 상업자본주의의 최극단에 위치한 패션잡지기자가 규정하는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이다.

사람보다 많은 차들이 갤러리아 백화점 앞을 막고 서있었다. BMW, 아우디, 벤츠와 벤틀 리가 나란히 서 있는 그곳을 나는 웃으며 내려다본다. 거대한 욕망의 주차장. 맞다. 이곳이 내가 일하는 곳이다(327).

스타일은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한국의 벌거벗은 자화상을 비추고 있지만 단지 현실세태를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스타일에서 현대병의 갖가지 증상뿐 아니라 발병 원인과 치료법까지 고민하며 모색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백영옥 작가와 스타일의 이러한 노력에서 페티시즘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내고, 이들이 제시하는 치유의 길이 실은 정신분석학이 오래전에 안내한 적 있는 낯설지 않은 길임을 보일 것이다.

 

성수대교의 기이한 낯설음

 

스타일A라는 패션지의 피쳐팀에서 일하는 주인공 이서정의 좌충우돌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서정의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연애’. 일 파트에선 이서정의 좌충우돌은 1년 동안 공을 들여 유명배우 정시연을 인터뷰한 것과 닥터 레스토랑이라는 익명의 레스토랑 비평가의 정체를 밝혀내는 두 가지 주요 사건이 전개된다. 연애 파트에선 직장 동료 김민준과의 므훗한 해프닝과 백마 탄 왕자 박우진과의 러브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리고 스타일을 흐르는 이 두 강줄기는 성수대교에서 만난다.

이 소설에서 성수대교는 각별한 공간이자 강박의 공간이다. 등장인물들이 건너는 다리는 어김없이 바로 이 성수대교이다. 만나기로 한 영화사 이미정 홍보팀장은 성수대교에서 정체가 심해 약속 시간을 늦고, 택시를 타고 가던 이서정은 하필이면 동호대교에서 사고가 나서 성수대교로 우회하다 한참을 차 안에 꼼짝 없이 갇힌다. 서정은 집으로 가는 길, 저 멀리서 부유하는 성수대교의 불빛을 바라본다.

주인공 서정은 1994년에 성수대교 근처 현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인 1021일 오전 740, 서정의 삶은 성수대교와 함께 붕괴해버린다. 그렇게 내 세계를 지탱하던 한 축이 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져버렸다(160).” 그리고 그는 목도한다. 그 속에서 나는 근원적인 어둠을 보았다고 믿었다. 보고 싶지 않던 삶의 이면을.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뜯겨 파헤쳐진 채로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161).” 서정은 성수대교 붕괴로 자신이 우상처럼 따르던 친언니 서은을 잃는다.

서정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고 따르던 언니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의식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어릴 적 언니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자기가 언니가 수영을 못한다고 놀려 언니가 수영을 포기했기에 언니가 익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때 내가 내뱉은 말 때문에 서은 언니가 수영 배우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말이, 한때의 치기어린 장난이 언니를 깊고 차가운 한강 물속에 수장시켰을지도. 내가 언니를 익사시킨 건지도 모른다(300).

성수대교 붕괴라는 트라우마는 이렇게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단단히 결합하게 된다. 그 결과 서정은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놓지 않고선 성수대교를 건너지 못한다. 마치 프로이트가 <모래 사나이>에서 모래 사나이가 나타나엘의 죄의식과 거세공포를 상기시켜 기이한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듯, 스타일에서 언니 서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일깨우는 성수대교는 붕괴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기이한 낯설음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왜 이서정은 패션지 에디터가 되었을까

 

성수대교의 붕괴와 언니의 죽음이 가져온 트라우마는 엄청났다. 그 트라우마란 프로이트가 유아성욕론에서 설파한 거세당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서정의 세계 자체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죄의식은 우선 기억 상실로 이어졌다. 소설 속에서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하는 박우진은 사실 서정의 소꿉친구였다. 다만 그는 우진 오빠라 부르며 뛰어다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 무의식적으로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뿐이다.

서정이 박우진과의 기억을 상실한 이유는 박우진이 그 트라우마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박우진은 여섯 살인 서정에게 수영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우진과 함께 했던 그 수영장에서 서정은 언니 서은이 수영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우진에 대한 기억은 항상 수영장으로, 그리고 언니 서은으로 이어져 엄청난 트라우마를 다시 호출했다. 그래서 서정은 선택한 것이다. 내 기억은 완전히 닫혀버렸다. 내가 닫아버린 것이다. 밤마다 물속에 휩쓸리는 언니의 모습을 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선 그래야 했다(300).”

트라우마는 어릴 적 기억 일부를 봉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트라우마는 서정의 삶의 방식 자체를 규정짓는다. 그를 현대병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현대병 환자의 주요 증상을 요약하자면 현재주의, 물질주의, 욕망주의다. 이런 식이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미래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언제든 이 삶이 무너져 버릴 수 있는데, 현재를 빼면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뭔가. 그러므로 나에겐 언제나 지금이 가장 중요했다. 내가 원하는 걸 당장 취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것만이 훌륭한 인생의 본보기 같았다. 그것이 왜 부당한가! 아름다운 물건을 취하고자 하는 당장의 욕망이 미래를 어떻게 붕괴시킬 거란 말인가(166).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세계의 한 축이 붕괴되는 것을 체험한 서정에게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내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붕괴하고 있지 않은 오늘만이 있을 뿐.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함께일 것 같던 언니 서은의 죽음을 목격한 서정은 죽을 수 있는(mortal) 사람보다 죽지 않는(immortal) 물질에 집착한다. 가치나 이상 역시 욕망에 질식당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내일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오늘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내일이 없을 지도 모르는데. 더 많이 가지고, 더 아름다워지려는 순간의 충동에 충실한 것이 서정의 삶에서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 현대병 발병 과정은 프로이트가 말한 그 무엇과 매우 닮아있다. 바로 페티시즘(fetishism)’이다.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에서 페티시스트들이 집착하는 여성의 속옷 같은 절편음란물이 사실은 남근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자아이는 여성이 자신과 같이 남근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를 부인하려는 동시에 자신도 여성처럼 거세에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불쾌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에게는 남근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전에 자신이 알던 남근과는 다른 종류라는 생각을 만들어 낸다. 프로이트는 그 남근의 대체물로 대개는 여성의 생식기를 목격한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어떤 물체가 절편음란물이 된다고 주장했다(프로이트, 페티시즘320-323).

서정에게 있어 성수대교의 붕괴는 남자아이가 남근 없는 어머니의 생식기를 목도한 것과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거세가 생명력의 상실을 상징한다면 서정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인간의 죽음(mortality) ‘그 자체였다. 프로이트가 말한 페티시즘을 확장해 존재한다고 혹은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라질 때 그 존재를 대체할 무언가를 모색하는 행위로 규정한다면 서정의 페티시즘이란 성수대교 붕괴 후 서정의 삶과 세계 그 자체다. 언니의 죽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삶 자체의 붕괴를 경험한 서정은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자체를 자신이 사라져도 남아 있을 외부의 존재들로 대체해버린다. ,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히는 물질세계를 자신의 삶 전체와 맞바꿔버린 것이다.

페티시즘에 걸린 서정에게 가 아니라 내가 입은 옷과, 내가 걸친 핸드백과, 내 체중과, 내 연봉이 된다. 나를 가꾸는 일은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비싼 구두를 신는 것이다. 내가 갑자기 죽는다 한들 내 옷과, 내 구두와, 내가 벌어 논 돈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자신이 존재하리라 믿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서정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다시 성수대교가 붕괴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남을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집착한다. 마치 여자 속옷에 열광하는 페티시스트처럼. 성인이 된 그가 물질세계의 엣지(edge)패션지에디터가 된 것은 남다른 재능이나 적성 탓이 아니라 성수대교가 가져온 페티시즘의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정이 소설 속에서만 등장할 법한 인물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성수대교 붕괴의 분신과 서정의 분신이 넘쳐난다. 얼마 전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씨랜드 유치원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이 대형 사건의 희생자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서정과 비슷한 그림자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가 커다란 상처를 받고 제2, 3의 서정이 늘어가면서 우리는 덧없는 것을 기억하고 기리기보단 덧없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남근상을 세우는데 골몰하게 됐다. 한국사회를 장악한 물질성장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더 큰 남근상을, 눈에 분명히 보이고 만져질 수 있는 거대한 남근상을 세우자는 것이다. 페티시즘의 극치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것도 없이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9·11 테러, 다르푸르 내전, 소련 붕괴, 천안문 사태, 킬링필드 등 전쟁, 테러, 집단 학살, 대형 사고로 점철된 현대사회는 전 세계인들에게 거세 충격에 맞먹는 공포를 집단적으로 선사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페티시즘이라는 PTSD(Post-traumatic Syndrome Disorder)를 앓게 됐다. 그 결과 오늘날 인류는 죽을 수 있는 인간보단 죽지 않는 물질을, 허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이데올로기보단 당장의 욕망에 집착하게 됐다. 스타일의 주인공 서정처럼.

 

프라다를 향한 욕망과 기아를 돕고 싶은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류에겐 아이폰의 애플뿐 아니라 인도주의 기구인 유니세프(UNICEF)도 있다. 현대 사회가 물질주의 사회이긴 하지만 모두가 물질만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아직 살만한 것은, 그래도 삶이 아름다운 것은 말초적인 욕망 그 이상의 숭고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숭고한 욕망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비율에서 차이를 보일 뿐 물질적 욕망과 비-물질적 욕망을 모두 갖고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수대교의 붕괴로 심각한 페티시즘을 앓게 된 서정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서정은 돈이 궁해 때려치우고 싶은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면서도 꾸준히 기부를 한다.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기부금 때문에 엄마에게 돈을 꾼 적도 있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205).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감싸주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지금 의 생존을 위한 페티시즘 사이의 타협은 쉽지가 않다. 명품과 기부 사이의 간극, 이 간극을 메우려는 서정의 투쟁, 이를테면 욕망의 황금비율 찾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러나 멀고 험하지만 분명 길은 있다. 스타일은 그 길의 안내자로 요리를 제안한다. 우진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진에게 몇 번이나 상처를 받은 서정은 그가 만들어준 따뜻한 백합국을 한 그릇 먹고 나자 비로소 닫혀있던 자신의 기억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진의 백합국이 아니라 직장동료 지선의 백합국이었다면, 혹은 우진의 백합국이 아니라 우진의 ‘3분 카레였다면, 아마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20년 동안 멀리서 서정을 지켜보며 사랑한 우진이었기에, 그 우진이 이태리에서 요리를 배우던 시절 자신이 아플 때마다 끓여 먹었던 애틋함이 담긴 백합국이었기에 상처받은 서정의 마음은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었다. 우진의 레스토랑이 극찬을 받는 이유도 호화스러운 인테리어나 번뜩이는 마케팅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료를 선택하는 정성, 음식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음식이 가진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우진의 요리가 우리 사회에서 한 쪽으로 과도하게 쏠린 욕망 화해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던지는 안내말은 분명하다. 그것은 진심을 다한 이해와 사랑에 기반한 믿음,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상처를 응시하고 치유할 수 있으며 보다 함께 행복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의 근본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통한 치유의 근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가 저항을 무릅쓰고 분석의 기본 규칙을 따라 분석작업을 계속함으로써 그에게 이제 알려진 저항에 몰두할, 그것을 훈습할, 그것을 극복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One must allow the patient time to become more conversant with this resistance with which he has now become acquainted, to work through it, to overcome it, by continuing, in defiance of it, the analytic work according to the fundamental rule of analysis.)(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119-120)”

우진이 서정에게 행한 치유는 고전적인 정신분석학적 치료다. 그는 환자(patient)인 서정이 저항을 이겨내고 그것을 응시하고 또 극복해내기까지 십 수 년을 인내(patient) 했다. 그는 분명 더 많은 것, 이를테면 서정이 잊고 있던 기억을 일깨운 후 그 상처를 끊임없이 보듬어준다던가 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우진은 독자의 속을 터뜨릴 만큼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몇 년이고. 그는 아마 프로이트의 열렬한 신봉자였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옛날 옛적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서 의사에게는 잠자코 기다리며 일이 진행되도록 놔두는 것 이외에 다른 할 일이 없다.(The doctor has nothing else to do than to wait and let things take their course, a course which cannot be avoided nor always hastened.)(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120)”

그러나 이 기다림과 따뜻한 백합국 한 그릇이 끝끝내 서정을 치유한다. 서정은 고백한다.

나는 이제 패션을 위해 내 삶을 희생시키진 않겠다. 더 이상 스키니 진을 입기 위해 무모한 다이어트를 감행하지도, 15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구르지도 않을 것이다.(백영옥 326)

서정은 마침내, 성수대교의 페티시즘을 넘어선 것이다.

 

상처받은 우리는 서로의 정신분석가가 되어주어야 한다

 

서정은 성수대교 붕괴로 언니를 잃고, 자신이 믿어온 세계를 잃고, 기억을 잃고, 페티시즘을 얻는다. 서정의 영혼에 깊숙이 난 상처는 자신의 왕자님인 박우진을 외면하게 하고, 다이어트를 위해 끼니를 담배와 커피로 때우며 건강을 망가뜨리게 한다.

하지만 서정은 끝끝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닫아 두었던 기억을 열고, 페티시즘을 버리고 사랑과 사람을 받아들인다. 그가 이렇게 치유의 길로 더디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우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진은 마치 프로이트의 현현(顯現)인 마냥 정신분석학적 치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환자로 하여금 고통스럽지만 저항을 이겨내고 상처를 들여다보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주제넘게 서정의 상처를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고 덤벼들기 보단 서정이 스스로 자신의 상흔을 보듬을 수 있도록 멀찍이서 지켜보고 백합국 한 그릇 끓여줄 뿐이었다.

그 결과 서정은 자기 상처의 핵심, 즉 언니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그에 따른 죄의식을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블랙홀 같은 검은 그림자에서 마침내 벗어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우진의 말을, 비로소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알고, 바라보고, 보듬을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음을 서정은 보여주고 있다.

위험 사회라고도 불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서정과 같은 그림자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상처 받은 자이며 우리 안에도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가 있다.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우린 서로에게 우진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스타일은 이야기한다. 이 세기말의 페티시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서로 정신분석가가 되어주라고.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지긋이 응시하여 어루만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고, 이야길 들어주고, 때론 따뜻한 백합국 한 그릇 끓여주라고. 그래야만 과거와, 진정한 자기 자신과, 헝클어진 욕망들과, 또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과 화해할 수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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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11-10-0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상세한 분석 좋고 추천합니다. 하지만 너무 이 작품의 좋은 면만을 부각시키신 건 아닌지.. 저는 조금은 작위적인 플롯이 못 마땅하기도 했거든요. 여튼, 성실하고 좋은 글 쓰시는 분 만나게 되서 반갑습니다 :)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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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언젠가 한번 봐야지 했던 장은진 작가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준호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다. 한 달 가까이 책꽂이에 방치하다 오늘 밤에야 완독했다.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 할 때 가슴이 뭉클했고 눈가도 촉촉해졌다. 이 느낌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간만에 키보드를 잡았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우리가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답장을 받기 위해서다. 그것이 비록 내가 보낸 것과 같은 형태의 답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신인의 반응, 그것이 없다면 편지는 고지서에 불과하다. 아니, 고지서조차도 받는 자의 납부를 바란다. 편지는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지지도, 더더군다나 버려지지도 않았음을 확인하려는 희망수단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위험하다. 답장은, 오지 않을 수도 있기에.

나는 여행을 한다. 눈 먼 할아버지의 눈 먼 개 와조와 함께 모텔을 전전하면서.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기 위한 것이다. 수학선생님의 아들인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숫자를 붙이고 주소를 묻는다. 모텔에서 매일 밤 편지를 쓰고 공중전화로 매일 옆집 친구에게 편지가 왔는지 묻는다. 지하철에서 만난 그녀에게 751이라는 숫자를 부여할 때까지 단 한통의 답장도 받지 못한다. 오늘도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는 말은 일과가 되었고, 답장을 받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여행은 3년째 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751을 만난다.

751은 자기 손으로 쓴 소설을 자기 손으로 파는 작가이자 장사꾼이다. 751도 모텔을 전전하는 여행자다. 751이 이런 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나와 비슷하다. 751은 소설을 썼고 출판을 했으나 751의 책은 서점 창고에서 발견됐다. 그녀는 세상에 편지를 부쳤으나 세상은 편지를 홀대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답장을 직접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런 751은 나를 한눈에 간파했는지 성가시게 끝까지 따라온다. 여자는 나에게 모텔을 소개해준다. 화가의 이름이 객호인 보기드문 여행자 숙소에 나는 여자와 가까워진다. 각방을 쓰던 사이는 한방을 쓰던 사이가 되지만 한 침대를 쓰는 사이가 되진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둘은, 둘이 된다. 친구와 각본을 쓰다 단어 하나를 두고 절교해 버린 751과, 말을 더듬어 누군가와 함께 있단 사실 그 자체가 불편한 내가 둘이 있는데 익숙해지고 의지하게 된다. 최소한 둘은 서로에게 보낸 편지에 서로 답장을 해주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부터, 편지는 오지 않았지만 나는 답장을 받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 여행은 나 혼자 누군가의 답장을 간절히 기다리는 외로운 여행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치면 노인의 몸으로 3년 가까이 거리를 떠돈, 장기가 다 망가질 지경에 이를 때까지 나에게 답장 한 장 독촉하지 않은 나의 개 와조, 와조는 늘 나에게 편지하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가 높다랗게 쌓여있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 우체통이 아니라 답장으로 가득찬 나날이다.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엔, 어쩌면 편지 한 통으로 충분할 지 모른다. 그들이 거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답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으니.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의 '나'처럼 수신인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엔 편지 한 통은 더 절박하다. 아직 내 앞으로 도착할 편지가 한 통 있다면, 삶은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다.

삭막한 이 세상에 엄하게 툭 떨어진 편지 한 통이, 그 종이 한 장이 마음을 얼마나 채우는지를, 받아본 자는 알 것이다. 안다면, 편지 한 통 보내자.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어, 하며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에게. 여기, 아직 편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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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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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해야 해.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뱇이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 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그래서 생존해야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며,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pp.180~181)


 

박민규의 소설은 '단숨에 읽힌다'라는 표현이 그 어느 작품에 비할 수 없이 잘 어울린다. '핑퐁' 역시 그러했다. 마치 세트스코어 3대 3에서 자리를 바꿔 다음 세트로 넘어가는 기분으로 한 쪽 한 쪽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그리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처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강렬한 인상이 남았다.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어느날 네바다 주 실버스프링에서 볼링을 치던 한 남자는 자신의 볼링공이 지구공을 바뀐 걸 깨닫는다. 그가 '지구고 뭐고 간에 빨리 던져'라는 '중요한' 술내기를 건 동료들의 독촉에 지구를 마루 위에 던지자 지구 곳곳에서 지진과 산사태가 일어난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음에도 그는 '생활'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서' 계속 지구를 던진다. 남미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가라앉고, 아프리카가 세 대륙으로 쪼개질 때까지 말이다. 그제서야 그는 볼링공을 놓고 탁구채를 잡는다.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이 탄생한 것이다.

존 메이슨의 <핑퐁맨>의 지구를 던지는 '핑퐁맨'까지는 아니더라도 , 우리가 직렬로 늘어선다면 한 사람을 죽이고, 전쟁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9볼트의 건전지라는 박민규의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고, 참신하고, 멋지다. 분명 나도 9볼트의 건전지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건데, 나도 분명 직렬회로의 한 부호가 되어 어떤 이의 저항을 애써 달군적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교 시절에 그러했거늘, 머리가 한 없이 굵어진 전지가 된 지금, 혹은 나중에야 어떤 곳에 지진을 일으키고 산사태를 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 그래서 박민규는 그러한 9볼트가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우리는 탁구를 쳐야한다고 말한다. '핑' '퐁' 하면서 말이다.

문학에 별 조예가 깊지 않은 내가 하기엔 건방진 소리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박민규는 천재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은 '새롭다'. '최고급' 혹은 '신소재' 따위로 치장하지 않아도 더할나위 없이 신선하다. 이런 식이다. 태양을 구슬만한 크기라 해도 지구와의 사이에 놓은 200km 만큼의 거리로 개별화 된 현대(modern) 사회의 개인들은 '인류가 <깜빡>한 인간'들이 된다. 인류의 역사가 밟아온 문명과 야만의 앞서거니와 뒷서거니, 이를테면 인류애와 홀로코스트 같은 대립은 어드벤테이지와 어게인이 끊임없이 이어져,  '173845792629921:173845792629920'에 이른 듀스포인트다. 그의 작품 작품, 장 장, 쪽 쪽은 파격 파격의 연속이다. 하, 문학이란, 문학을 통한 창조란, 진정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오라. 나에게 박민규는 '창작가'를 넘어 '창조가'이다.

결국, 모아야할 컬렉션이 또 하나 늘어난 밤이다.   

 (2009년 4월 2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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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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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낮과 밤은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낮과 밤을 살아가는 나도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떻게든 살아야한다는 낮과 왜 살아야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밤. 나는 하루하루 낮을 보내고 밤을 버텨낸다. 이유없이 몸이 뜨거워지고 목이 타는 그날 밤에도 나는 '밤은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 나는 지난 번 2009년 이상문학상에 밀려 내 손과 눈을 차지하지 못했던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집어들었다. 그 쓸쓸하기 그지없는 밤을 김연수는 '노래한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에 문득 노래하는 밤과 쓸쓸한 밤이 같은 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태양아래 모든 존재가 '나는 진실이야'라고 외치는 낮이 아닌 그 모든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밤. 빛의 세계가 한낱 꿈이 되어버리는 그 시간,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둠을 꿈꾸지 않는다. 

  ‘밤은 노래한다’는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낮의 세계에서 밤의 세계로 추락하는 김해연의 이야기다. 혁명의 격랑에 빠진 1930년대 간도는 그저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일 뿐인 그가 낮의 세계에만 머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자 해연은 결국 사람을 죽이게 된다. 사람을 죽인 자가 어찌 다시 낮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오. 500여 명의 혁명가들이 주적인 일제나 친일분자가 아닌 동지들에 의해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민생단 사건’의 연루자들도 모두 한 때는 낮의 존재들이었다. 그 누구도 살인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살인자가 되었다. 도대체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박길룡은 박도만을 죽였고. 박도만은 최도식의 존재이유를 앗아갔다. 최도식은 이정희를 죽였고, 이정희를 사랑한 김해연은 박길룡을 죽였다. 결국 박길룡은 박길룡이 죽였고, 박도만은 박도만이 죽였다. ‘자주’를 부르짖던 낮의 박길룡을 과대망상에 빠진 밤의 박길룡이 죽였으며, 냉혹한 현실주의자인 낮의 박도만을 적의에 불타는 밤의 박도만이 죽여버렸다. 낮의 그들과 밤의 그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겠는가. 혁명은 세계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옛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새우는 파괴와 창조의 과정이다. 옛 것은 옛 것으로 파괴할 수 없다. 

  따라서 세계를 향한 싸움은 나 자신의 파괴와 창조를 선결조건으로 한다. 값비싼 술과 숱한 미인을 거느리려는 깊은 밤의 오래된 욕망을 파괴해야만 그 위에 혁명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 안세훈과 박길룡과 박도만과 최도식은 이정희를 향한 구태한 욕망을 파괴했어야만 한다. 정희의 퇴장과 함께 식어버리는 그들의 토론이야말로 그들이 논하는 혁명의 냉혹한 현실이다. 그들의 욕망을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변명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혁명을 거스리는 사랑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혁명을 파괴했고 정희와 해연의 사랑은 혁명을 소생시켰다. 아무래도 김연수는 맑스보다 톨스토이를 편애하는 듯하다.

  요즘 ‘김연수’는 나에게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언제나 내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정말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근래에 난 지금 ‘위선’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있었다. 뻔히 제 밥그릇을 키우려는 목적이 훤히 보이는데도 거짓말을 일삼는 위정자들과 노동운동을 부르짖는 노조간부가 성폭행을 자행하는 현실, 그리고 그 위선이 내 생활과 언어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더욱더 비참한 현실에서 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김연수는 혁명가들의 위선, 그리고 그로 인한 스스로와 혁명의 파멸을 담담히 보여주었다. 네 생각이 맞다고, 부조리한 세계를 대면하는 일이란 곧 너 스스로의 위선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그 위선을 뛰어넘지 않고 자신의 몫(moira)를 넘어서는 행위를 하는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그 존재의 파멸뿐임을 '밤을 노래한다'는 보여주고 있다.

  누가 학문을 ‘자기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이라 했던가. 아직 너무나 어린 나에게 학문은 ‘자기모순을 발견하는 과정’에 겨우 미치고 있는 듯하다. 낮의 내가 밤의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랄까. 욕망과 허영에 사로잡힌 내가 낮의 나를, 이성과 윤리의 내가 밤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끝없이 밀려온다. 하지만 아직 난 사람을 죽일 수 없다. 한 사람을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다. 

  밤은 노래하고 낮은 춤을 춘다. 나의 밤은 무엇을 노래하는가. 나는 뜨겁게 춤추고 있는가. 내 생각에는 어디에도 해연은 없다. 김연수가 말하는 촛불시위에서 춤추는 남총련 대학생들도 박길룡이오, 박도만이오, 최도식일 것이다. 혹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위선과 대작하는 길, 그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일은 이 세계를 혁명하는 일에 버금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세계는 혁명된 적이 없다. 물론 단 한번도 혁명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적도 없다.

  밤은 쓸쓸하고 나는 노래한다. 내 삶과 내 세계에 대한 혁명과, 그 혁명에 대한 희망을.  

 (2009년 2월 1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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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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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뚝 떨어진 김사과

2005년, “하늘에서 사과가 떨어졌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984년생, 22살의 김사과가 「영이」로 창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것이다. 당시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새내기였고 소속도 문학과 다소 거리가 먼 영화학과였다. 그는 2년 뒤 첫 장편소설 『미나』를 발표했고 오는 16일 두 번째 장편소설 『풀이 눕는다』을 출간할 예정이다. 단편소설 「정오의 산책」은 2009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등단, 유력 출판사에서 장편 두 권 출간, 권위 있는 문학상 최종 후보까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26살 신인이 일군 열매라고는 믿기 힘들다. 여기에 ‘사과’라는 특이한 필명과 외고를 자퇴한 특별한 이력까지 보태면 그의 ‘포스’는 범인(凡人)들을 주눅 들게 한다. 괴물이거나, 최소한 천재일 것으로 추측되는 소설가 김사과, 그를 만나러 갔다.

그에게서 먼저 소설가 지망생들의 ‘꿈’이자 ‘벽’인 등단을 단박에 해낸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과에 입학했는데 영화에 별 관심이 없어 방황하면서 우울한 첫 학기를 보냈어요. 방학 때 앞으로 뭘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니 그나마 제일 잘하는 게 글 쓰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2학기에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잘 쓴다고 계속 칭찬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좋아서 계속 썼어요. 선생님이 그동안 쓴 것 중 문학상 공모에 하나 내보라고 하셔서 냈어요.” 그래서 그는 등단한다. 참 쉽다. 학부 글쓰기 수업에 제출한 작품으로 등단하다니, 모르긴 몰라도 한국 문단 등단사(史)에서 흔한 일은 아닐 게다.

쎄게, 끝까지 밀어 부친다

서사창작과로 전과한 그는 지난해 첫 장편소설 『미나』를 펴낸다. 『미나』는 주인공인 ‘수정’이 한때 ‘절친’이었던 ‘미나’를 부엌칼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이야기다. 수정은 안정적인 계급의 재창출을 위한 교육제도에 완벽히 순응한 여고생으로 시스템이 요구하는 문법을 완벽히 구사한다. 그녀는 시험지 위의 세계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이 군림하는 그 세계를 경멸한다. 그런데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미나가 친구의 자살로 세계에 대한 경멸의 포즈를 동정의 포즈로 바꾼다. 수정은 미나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미나를 갖고 싶다. 결국 그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미나를 죽인다.

한국의 부조리한 교육시스템이 빚어낸 비극 『미나』에는 김사과 작가가 학창시절 동안 경험한 부조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제가 공부를 못하게 생겼는지 처음엔 열등생 취급을 하던 선생님들이 제 성적을 보고 나면 태도가 바뀌더라고요. 같은 잘못을 해도 제가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덜 받기도 했고요. 결국 공부만 잘하면 아무 말도 못하는구나. 어린 마음에 그런 냉소적인 생각을 하게 됐죠. 저는 이렇게 공부만 잘하면 좌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미나』가 던지는 메시지는 교육 제도를 향한 일격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엔 ‘신자유주의’, ‘개발지상주의’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의 지배적 관념에 대한 경계도 담겨 있다. “주인공 ‘수정’으로 상징되는 극우적 관념, 그것을 신자유주의로 부르든 박정희식이라 부르든 이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어요. 무한 경쟁 속에서 타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비유적으로 짓밟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이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어요.”

이번엔 ‘확’ 부드러워 졌다

『미나』는 파괴적 소설이다. 친구를 죽이기 위해 고양이를 벽에 던져 살인을 예행연습 하는 내용에 욕설이 난무하는 여고생의 대화를 그대로 옮긴 듯한 문체까지 파괴적인 기운을 물씬 풍긴다. 그러나 이번에 출간될 『풀이 눕는다』는 다르다. 낭만적인 연애소설에다 문체도 무난하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제 기준에서는 그다지 심하지 않은 『미나』 정도의 파괴성에도 사람들의 거부반응이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많이 읽히고 싶어서 최대한 파괴적인 걸 지양했어요. 살인이나 폭력의 등장을 최대한 자제하고 읽기 쉽도록 소설 문법에 맞게 쓰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재미가 좀 없어진 것도 같아요.”

자신만의 스타일이나 신인 작가의 패기를 자제해가면서까지 『풀이 눕는다』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미나』가 쓰고 싶어서 쓴 소설이라면 『풀이 눕는다』는 써야 해서 쓴 소설이에요. 전 개인적으로 세대론에 별 관심이 없는데, 그럼에도 20대로서 우리 세대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무를 한편으로 느껴왔거든요. 지난 촛불 정국 때도 그렇고 20대가 무기력하다고 비판받는데, 사실 20대가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건 사회 시스템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풀이 눕는다』에서는 우리 20대가 놓인 비관적 현실을 보여주려 했어요.”

『풀이 눕는다』는 20대인 주인공이 길을 가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무조건 쫓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기생하는 주인공은 화가 지망생인 ‘풀’과 함께 옥탑방에서 빈궁하지만 낭만적인 동거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을 볶음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돈 없이 사랑 속에서 굶어 죽고자 한다. 그러나 막상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둘의 동거생활은 파탄 나고, ‘풀’은 비참한 고시원 생활로 내몰린다.

『미나』처럼 『풀이 눕는다』도 다분히 사회비판적이다.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20대가 오늘날 처해있는 생존투쟁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풀이 눕는다』는 소위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20대의 비극을 시스템의 잘못으로 돌리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김사과 작가는 ‘히피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대책 없는 낭만적 삶으로 20대들을 초대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LA의 부랑자가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한다. “LA에 가서 거지가 되는 삶을 긍정하는 자세, 그게 이 책의 주제예요.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고. 되게 낭만적이잖아요.” 그렇게 살면 ‘풀’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지 않겠냐는 반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원래 정말 잘 노는 사람들의 말로는 비참해요. 히피들을 보세요. 그런데 말로가 그렇다고 잘 논 게 사라진 건 아니잖아요. 결말이 좀 암울하긴 하지만 이걸 읽은 사람들이 걔네들처럼 한번 놀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또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

이상한 유혹이다. 작가가 독자를 LA 부랑자의 삶으로 초대하다니. 그런데 앞으로 사과의 유혹은 더 이상해질 예정이란다. “『풀이 눕는다』를 쓰고 나서 대중적인 소설은 안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힘들었어요. 앞으론 진짜로 작정하고 이상한 거 쓰려고요. 사람들이 제 소설이 너무 잔인하다고 그러는데 진짜 잔인한 게 어떤 건지 보여주려고요. 포르노그래피도 써 볼 생각이고 폭력 자체를 탐구하는 소설도 쓰고 싶어요. 앞으로는 더 발전된 이상함을 추구할 생각이에요.” 김사과, 그가 작정하면 소설은 어디까지 이상해질까. 언제 어디선가 느닷없이 떨어질지 모르는 이상한 사과에 다들 바짝 긴장하시라. 

(대학신문, 2009년 11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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