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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자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백영옥 작가의 『스타일』은 소설인 동시에 한국 현대사회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하나의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오늘날 우리네 삶의 여러 모습과 모순들을 진단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현대병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47킬로그램의 여자는 자신이 45킬로그램의 여자보다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45킬로그램의 여자는 자신이 왜 배우 김민희나 모델 장윤주처럼 가는 다리가 아닌지 탄식한다. 세상에 자신이 충분히 말랐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없다(백영옥 20).
이 또한 현대병이다.
반짝이는 볼보C30, 검정색 아우디, … 거리가 2백미터도 안되는 편의점에 갈 때도 자신의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다리는 피트니스 클럽이나 에스테틱 숍에서만 쓰는 신체기관이고, 발은 ‘지미추’나 ‘마놀로 블라닉’을 신을 때만 쓰고 싶은 연봉 3천만 원짜리들. … 예금, 통장, 펀드, 하다못해 보험 하나 없으면서 그들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80-81).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질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로도 번역할 수 있는 이런 현대병이 만성적으로 퍼져있다. 백영옥 작가는 패션지 에디터인 주인공 ‘이서정’을 내세워 이러한 세태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극단적으로 외모지향적, 소비지향적, 물질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를테면 상업자본주의의 최극단에 위치한 ‘패션잡지’ 기자가 규정하는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이다.
사람보다 많은 차들이 갤러리아 백화점 앞을 막고 서있었다. BMW, 아우디, 벤츠와 벤틀 리가 나란히 서 있는 그곳을 나는 웃으며 내려다본다. 거대한 욕망의 주차장. 맞다. 이곳이 내가 일하는 곳이다(327).
『스타일』은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한국의 벌거벗은 자화상을 비추고 있지만 단지 현실세태를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스타일』에서 현대병의 갖가지 증상뿐 아니라 발병 원인과 치료법까지 고민하며 모색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백영옥 작가와 『스타일』의 이러한 노력에서 ‘페티시즘’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내고, 이들이 제시하는 ‘치유’의 길이 실은 정신분석학이 오래전에 안내한 적 있는 낯설지 않은 길임을 보일 것이다.
성수대교의 기이한 낯설음
『스타일』은 《A》라는 패션지의 피쳐팀에서 일하는 주인공 이서정의 좌충우돌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서정의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일’과 ‘연애’. 일 파트에선 이서정의 좌충우돌은 1년 동안 공을 들여 유명배우 정시연을 인터뷰한 것과 닥터 레스토랑이라는 익명의 레스토랑 비평가의 정체를 밝혀내는 두 가지 주요 사건이 전개된다. 연애 파트에선 직장 동료 김민준과의 므훗한 해프닝과 백마 탄 왕자 박우진과의 러브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리고 『스타일』을 흐르는 이 두 강줄기는 ‘성수대교’에서 만난다.
이 소설에서 성수대교는 각별한 공간이자 강박의 공간이다. 등장인물들이 건너는 다리는 어김없이 바로 이 성수대교이다. 만나기로 한 영화사 이미정 홍보팀장은 성수대교에서 정체가 심해 약속 시간을 늦고, 택시를 타고 가던 이서정은 하필이면 동호대교에서 사고가 나서 성수대교로 우회하다 한참을 차 안에 꼼짝 없이 갇힌다. 서정은 집으로 가는 길, 저 멀리서 부유하는 성수대교의 불빛을 바라본다.
주인공 서정은 1994년에 성수대교 근처 현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인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서정의 삶은 성수대교와 함께 붕괴해버린다. “그렇게 내 세계를 지탱하던 한 축이 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져버렸다(160).” 그리고 그는 목도한다. “그 속에서 나는 근원적인 어둠을 보았다고 믿었다. 보고 싶지 않던 삶의 이면을.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뜯겨 파헤쳐진 채로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161).” 서정은 성수대교 붕괴로 자신이 우상처럼 따르던 친언니 서은을 잃는다.
서정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고 따르던 언니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의식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어릴 적 언니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자기가 언니가 수영을 못한다고 놀려 언니가 수영을 포기했기에 언니가 익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때 내가 내뱉은 말 때문에 서은 언니가 수영 배우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말이, 한때의 치기어린 장난이 언니를 깊고 차가운 한강 물속에 수장시켰을지도. 내가 언니를 익사시킨 건지도 모른다(300).
성수대교 붕괴라는 ‘트라우마’는 이렇게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단단히 결합하게 된다. 그 결과 서정은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놓지 않고선 성수대교를 건너지 못한다. 마치 프로이트가 <모래 사나이>에서 모래 사나이가 나타나엘의 죄의식과 거세공포를 상기시켜 기이한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듯, 『스타일』에서 언니 서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일깨우는 성수대교는 붕괴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기이한 낯설음’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왜 이서정은 패션지 에디터가 되었을까
성수대교의 붕괴와 언니의 죽음이 가져온 트라우마는 엄청났다. 그 트라우마란 프로이트가 유아성욕론에서 설파한 ‘거세당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서정의 세계 자체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죄의식은 우선 ‘기억 상실’로 이어졌다. 소설 속에서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하는 박우진은 사실 서정의 소꿉친구였다. 다만 그는 ‘우진 오빠’라 부르며 뛰어다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 무의식적으로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뿐이다.
서정이 박우진과의 기억을 상실한 이유는 박우진이 그 트라우마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박우진은 여섯 살인 서정에게 수영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우진과 함께 했던 그 수영장에서 서정은 언니 서은이 수영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우진에 대한 기억은 항상 수영장으로, 그리고 언니 서은으로 이어져 엄청난 트라우마를 다시 호출했다. 그래서 서정은 선택한 것이다. “내 기억은 완전히 닫혀버렸다. 내가 닫아버린 것이다. 밤마다 물속에 휩쓸리는 언니의 모습을 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선 그래야 했다(300).”
트라우마는 어릴 적 기억 일부를 봉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트라우마는 서정의 삶의 방식 자체를 규정짓는다. 그를 현대병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현대병 환자의 주요 증상을 요약하자면 현재주의, 물질주의, 욕망주의다. 이런 식이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미래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언제든 이 삶이 무너져 버릴 수 있는데, 현재를 빼면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뭔가. … 그러므로 나에겐 언제나 지금이 가장 중요했다. 내가 원하는 걸 당장 취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것만이 훌륭한 인생의 본보기 같았다. … 그것이 왜 부당한가! 아름다운 물건을 취하고자 하는 당장의 욕망이 미래를 어떻게 붕괴시킬 거란 말인가(166).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세계의 한 축이 붕괴되는 것을 체험한 서정에게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내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붕괴하고 있지 않은 ‘오늘’만이 있을 뿐.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함께일 것 같던 언니 ‘서은’의 죽음을 목격한 서정은 죽을 수 있는(mortal) 사람보다 죽지 않는(immortal) 물질에 집착한다. 가치나 이상 역시 욕망에 질식당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내일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오늘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내일이 없을 지도 모르는데. 더 많이 가지고, 더 아름다워지려는 순간의 충동에 충실한 것이 서정의 삶에서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 현대병 발병 과정은 프로이트가 말한 그 무엇과 매우 닮아있다. 바로 ‘페티시즘(fetishism)’이다.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에서 페티시스트들이 집착하는 여성의 속옷 같은 절편음란물이 사실은 남근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자아이는 여성이 자신과 같이 남근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를 부인하려는 동시에 자신도 여성처럼 거세에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불쾌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에게는 남근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전에 자신이 알던 남근과는 다른 종류”라는 생각을 만들어 낸다. 프로이트는 그 남근의 대체물로 대개는 여성의 생식기를 목격한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어떤 물체가 절편음란물이 된다고 주장했다(프로이트, 「페티시즘」 320-323).
서정에게 있어 성수대교의 붕괴는 남자아이가 남근 없는 어머니의 생식기를 목도한 것과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거세’가 생명력의 상실을 ‘상징’한다면 서정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인간의 죽음(mortality) ‘그 자체’였다. 프로이트가 말한 페티시즘을 확장해 존재한다고 혹은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라질 때 그 ‘존재’를 대체할 무언가를 모색하는 행위로 규정한다면 서정의 페티시즘이란 성수대교 붕괴 후 서정의 삶과 세계 그 자체다. 언니의 죽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삶 자체의 붕괴를 경험한 서정은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자신이 사라져도 남아 있을 외부의 ‘존재’들로 대체해버린다. 즉,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히는 물질세계를 자신의 삶 전체와 맞바꿔버린 것이다.
페티시즘에 걸린 서정에게 ‘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입은 옷과, 내가 걸친 핸드백과, 내 체중과, 내 연봉이 된다. 나를 가꾸는 일은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비싼 구두를 신는 것이다. 내가 갑자기 죽는다 한들 내 옷과, 내 구두와, 내가 벌어 논 돈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자신이 존재하리라 믿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서정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다시 성수대교가 붕괴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남을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집착한다. 마치 여자 속옷에 열광하는 페티시스트처럼. 성인이 된 그가 물질세계의 엣지(edge)인 ‘패션지’ 에디터가 된 것은 남다른 재능이나 적성 탓이 아니라 성수대교가 가져온 ‘페티시즘’의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정’이 소설 속에서만 등장할 법한 인물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성수대교 붕괴의 분신과 서정의 분신이 넘쳐난다. 얼마 전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씨랜드 유치원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이 대형 사건의 희생자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서정’과 비슷한 그림자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가 커다란 상처를 받고 제2, 제3의 서정이 늘어가면서 우리는 덧없는 것을 기억하고 기리기보단 덧없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남근상을 세우는데 골몰하게 됐다. 한국사회를 장악한 물질성장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더 큰 남근상을, 눈에 분명히 보이고 만져질 수 있는 거대한 남근상을 세우자는 것이다. 페티시즘의 극치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것도 없이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9·11 테러, 다르푸르 내전, 소련 붕괴, 천안문 사태, 킬링필드 등 전쟁, 테러, 집단 학살, 대형 사고로 점철된 현대사회는 전 세계인들에게 ‘거세 충격’에 맞먹는 공포를 집단적으로 선사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페티시즘’이라는 PTSD(Post-traumatic Syndrome Disorder)를 앓게 됐다. 그 결과 오늘날 인류는 죽을 수 있는 인간보단 죽지 않는 물질을, 허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이데올로기보단 당장의 욕망에 집착하게 됐다. 『스타일』의 주인공 서정처럼.
프라다를 향한 욕망과 기아를 돕고 싶은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류에겐 아이폰의 애플뿐 아니라 인도주의 기구인 유니세프(UNICEF)도 있다. 현대 사회가 물질주의 사회이긴 하지만 모두가 물질만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아직 살만한 것은, 그래도 삶이 아름다운 것은 말초적인 욕망 그 이상의 숭고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숭고한 욕망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비율에서 차이를 보일 뿐 물질적 욕망과 비-물질적 욕망을 모두 갖고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수대교의 붕괴로 심각한 페티시즘을 앓게 된 서정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서정은 돈이 궁해 때려치우고 싶은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면서도 꾸준히 기부를 한다.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기부금 때문에 엄마에게 돈을 꾼 적도 있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205).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감싸주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지금 ‘나’의 생존을 위한 페티시즘 사이의 타협은 쉽지가 않다. 명품과 기부 사이의 간극, 이 간극을 메우려는 서정의 투쟁, 이를테면 ‘욕망의 황금비율 찾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러나 멀고 험하지만 분명 길은 있다. 『스타일』은 그 길의 안내자로 ‘요리’를 제안한다. 우진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진에게 몇 번이나 상처를 받은 서정은 그가 만들어준 따뜻한 백합국을 한 그릇 먹고 나자 비로소 닫혀있던 자신의 기억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진’의 백합국이 아니라 직장동료 ‘지선’의 백합국이었다면, 혹은 우진의 ‘백합국’이 아니라 우진의 ‘3분 카레’ 였다면, 아마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20년 동안 멀리서 서정을 지켜보며 사랑한 우진이었기에, 그 우진이 이태리에서 요리를 배우던 시절 자신이 아플 때마다 끓여 먹었던 애틋함이 담긴 백합국이었기에 상처받은 서정의 마음은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었다. 우진의 레스토랑이 극찬을 받는 이유도 호화스러운 인테리어나 번뜩이는 마케팅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료를 선택하는 정성, 음식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음식이 가진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우진의 요리가 우리 사회에서 한 쪽으로 과도하게 쏠린 욕망 화해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던지는 안내말은 분명하다. 그것은 진심을 다한 이해와 사랑에 기반한 믿음,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상처를 응시하고 치유할 수 있으며 보다 함께 행복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의 근본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통한 치유의 근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가 저항을 무릅쓰고 분석의 기본 규칙을 따라 분석작업을 계속함으로써 그에게 이제 알려진 저항에 몰두할, 그것을 훈습할, 그것을 극복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One must allow the patient time to become more conversant with this resistance with which he has now become acquainted, to work through it, to overcome it, by continuing, in defiance of it, the analytic work according to the fundamental rule of analysis.)(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119-120)”
우진이 서정에게 행한 치유는 고전적인 정신분석학적 치료다. 그는 환자(patient)인 서정이 저항을 이겨내고 그것을 응시하고 또 극복해내기까지 십 수 년을 인내(patient) 했다. 그는 분명 더 많은 것, 이를테면 서정이 잊고 있던 기억을 일깨운 후 그 상처를 끊임없이 보듬어준다던가 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우진은 독자의 속을 터뜨릴 만큼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몇 년이고. 그는 아마 프로이트의 열렬한 신봉자였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옛날 옛적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서 의사에게는 잠자코 기다리며 일이 진행되도록 놔두는 것 이외에 다른 할 일이 없다.(The doctor has nothing else to do than to wait and let things take their course, a course which cannot be avoided nor always hastened.)(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120)”
그러나 이 기다림과 따뜻한 백합국 한 그릇이 끝끝내 서정을 치유한다. 서정은 고백한다.
나는 이제 패션을 위해 내 삶을 희생시키진 않겠다. 더 이상 스키니 진을 입기 위해 무모한 다이어트를 감행하지도, 15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구르지도 않을 것이다.(백영옥 326)
서정은 마침내, 성수대교의 페티시즘을 넘어선 것이다.
상처받은 우리는 서로의 정신분석가가 되어주어야 한다
서정은 성수대교 붕괴로 언니를 잃고, 자신이 믿어온 세계를 잃고, 기억을 잃고, 페티시즘을 얻는다. 서정의 영혼에 깊숙이 난 상처는 자신의 왕자님인 박우진을 외면하게 하고, 다이어트를 위해 끼니를 담배와 커피로 때우며 건강을 망가뜨리게 한다.
하지만 서정은 끝끝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닫아 두었던 기억을 열고, 페티시즘을 버리고 사랑과 사람을 받아들인다. 그가 이렇게 치유의 길로 더디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우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진은 마치 프로이트의 현현(顯現)인 마냥 정신분석학적 치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환자로 하여금 고통스럽지만 저항을 이겨내고 상처를 들여다보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주제넘게 서정의 상처를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고 덤벼들기 보단 서정이 스스로 자신의 상흔을 보듬을 수 있도록 멀찍이서 지켜보고 백합국 한 그릇 끓여줄 뿐이었다.
그 결과 서정은 자기 상처의 핵심, 즉 언니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그에 따른 죄의식을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블랙홀 같은 검은 그림자에서 마침내 벗어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우진의 말을, 비로소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알고, 바라보고, 보듬을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음을 서정은 보여주고 있다.
‘위험 사회’라고도 불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서정과 같은 그림자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상처 받은 자이며 우리 안에도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가 있다.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우린 서로에게 ‘우진’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스타일』은 이야기한다. 이 세기말의 페티시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서로 정신분석가가 되어주라고.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지긋이 응시하여 어루만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고, 이야길 들어주고, 때론 따뜻한 백합국 한 그릇 끓여주라고. 그래야만 과거와, 진정한 자기 자신과, 헝클어진 욕망들과, 또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과 화해할 수 있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