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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서재지기 삭정이 입니다. 

 삭정이는 실험실에서 불리는 제 별칭이랍니다. 삭정이,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느낌, 마른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없어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죠. 삭정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정의돼 있네요. [삭정이: 살아 있는 나무에 붙어 있는, 말라 죽은 가지] 

 아직 한창 때인 제가 말라 죽은 가지라 불리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퍽 마음에 든답니다. 삭정이라는 단어가 주는 가벼움이 저는 좋습니다. 사실 삭정이는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주제인 '죽음'을 상징하는데 말이죠. 어쩌면 그 무게가 다른 모든 것들을 가볍게 하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여기서 삭정이로 불리는 저는 어느 날 실제로 삭정이 같이 말라 죽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말라 죽는다 해서 제가 붙어 있는 나무까지 죽진 않겠죠.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삭정이의 운명이니까요. 

 그 운명이란 게 너무나 아득합니다. 아니, 죽음이라니요. 삶이 다 무엇입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 자각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 사춘기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삶에의 의지와 죽음의 운명 사이에서 끝없는 방황이 제 인생입니다. 그리고 방황의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삭정이는 언젠가 삭정이가 되겠죠. 저는 이곳을 떠나고 세계는 남을 것입니다. 이 자명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직 전 잘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자각한 순간 저는 비로소 세계와 나 사이에 놓인 경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독자가 되었습니다. 세계는 텍스트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죽어도 남게 될 내 바깥의 것이었으며, 내가 읽지 않으면 나와 관계맺음을 할 수 없는 타자였습니다. 저는 세계를 열렬히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나와 세계의 관계 맺음이 독서라는 일방향적 소통뿐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양방향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텍스트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글뿐 아니라 나의 말과 눈물, 그리고 나에 대한 기억이 누군가에게 읽힐 때 나는 하나의 텍스트가 됩니다. 누군가의 세계의 일부가 됩니다. 그것들은 내가 죽어도 남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닙니다. 텍스트를 남기는 한.

 글쓰기는 가장 직접적이고 또 적극적인 텍스트 창조 행위입니다. 저는 글을 쓰는 이 순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짜릿함을 느낍니다. 근원적 고독으로부터 탈출하는 해방감을 느낍니다. 텍스트는 세계에 부치는 내 편지이며 나는 당신의 답장을 기다립니다. 누군가를 만날 생각에 조금은 설렙니다.

 창밖의 무수한 삭정이를 바라봅니다. 진한 동지애를 느낍니다. 삭정이 역시 나처럼 삶과 죽음의 존재입니다. 정확히 말해, 삶과 죽음의 경계적 존재입니다. 나무가 생명이고 삭정이가 죽음이라면 경계는 어디일까요? 삶과 죽음의 존재가 한몸을 이루는 모습을 저는 봅니다. 그리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죽었다고 말하는 저 삭정이가 실은 말라서 떨어질 날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양분을 나무 밑둥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평생 모은 빛을 나무에게 남기려는 저 삭정이들처럼, 저도 그렇게 이 세계에 텍스트를 남기렵니다. 설령 그 치열함이 삭정이의 그것처럼 잘 보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끝으로 여러분께 이렇게 묻습니다. 삭정이는 정말, 죽은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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