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이냐 교육이냐- 법인화 전선(戰線)에서 국민들께 부치는 편지

 

서울대에선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민주화 시대 선배들이 너무 얌전하다고 하시던 학생들이 6년 만에 비상총회를 열어 서울대의 광장 아크로폴리스에 2,000명이나 집결했고, 본부 점거를 의결했습니다. 본부는 학생들이 사과하고 불법점거를 풀 때까지 대화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비상총회의 열기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관악에 맴돌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왜 벌어진 것이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요?

 

엄밀히 말해 대학원생인 저는 비상총회 의결권은 없는 후방지원군 정도의 신분으로 지금 여기, 법인화 전선에서 이 편지를 부칩니다. 이것은 단지 학부생들만의 싸움이 아닐뿐더러, 서울대 학생들의 싸움이 아닌 우리 모두의 싸움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여기가 한국 사회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론 현실을 볼 때 저희의 저항은 불법과 구태로 매도되거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얼마나 많은 국민들에게 가 닿을 진 모르지만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저희의 투쟁을 알아주시길 바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저희들이 비상총회를 열고 의결한 것은 현재 강행 중인 서울대 법인화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 법인화는 현재 교과부 산하 국가기관인 국립 서울대를 독립적인 법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서울대의 조직에 대한 문제가 아니냐구요? 저는 서울대 법인화가 단순히 서울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에 대한 상징적·실질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립대는 국가의 고등교육 철학이 직접적으로 구현되는 장소이며, 서울대는 큰 상징성을 띤 곳이기 때문입니다.

 

법인화의 명목상 목적은 지난해 12월 날치기 통과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1조에도 잘 드러나 있듯 대학의 자율성 확보를 통한 교육 및 연구 역량의 향상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교육 및 연구 역량의 향상은 대학 평가 순위 상승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법인화를 해야 세계 대학 순위 20위권에 진입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영미권 대학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 순위들을 결정하는 주요 지표는 재정상황, 연구실적, 국제화지표, 졸업생 평판도 등입니다. 심지어 기업CEO들에게 평판을 묻는 고용주 평가가 들어간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수익사업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고, 우수한 연구인력을 공무원법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임용하고, 외국인 학생·교수를 유치하기 위해선 현행 국립대 체제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의 목표가 일개 기관이 편향된 기준으로 정한 순위를 올리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학이 기업의 직업훈련소가 되는 것에는 더더욱 찬성할 수 없습니다. 대학은 기업연구소나 고시학원이 아니라, 바로 그곳들이 제공할 수 없는 교육과 연구를 제공해야 하는 곳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울대는 자율성 확보라는 미명하에 바로 그 의무를 져버리려 합니다. 유명한 연구자를 스카우트하고, 그래서 더 많은 연구비를 유치하거나 기술을 팔며, 다국적 기업 등 소위 잘나가는 곳에서 활동하는 졸업자를 늘리려는 것, 그것이 서울대 법인화의 지향점입니다. 대학의 기업화로 요약되는 이 지향점에 저는 분명히 반대합니다. 대학은 기업화가 아니라 대학화돼야 합니다. 직업교육뿐 아니라 기초학문 육성, 비판적 담론 형성, 인성·감성 교육 역시 대학의 중요한 의무입니다. 현재 추진되는 법인화는 이러한 의무를 다하는 데엔 효과적인 수단이 아닙니다.

 

법인화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는 사실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법인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지난 수년간 양심적인 교수들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제기해온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땐 별 반향이 없다가 사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총회가 열렸고 본부가 점거됐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는 법인화안이 평의원회를 통과했을 때, 학생 총투표 결과 반대가 80%로 나타났음에도 법인화안이 그대로 정부에 제출됐을 때, 본부안에서 개악돼 독소조항이 포함된 법안이 연말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됐을 때, 학생사회는 침묵했습니다. 그랬던 학생들이 2,000명이나 광장에 모였고 본부에 진입했습니다. 점점 보수화되고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서울대생들이 2,000명이 모이는 것은 총회 개최 직전까지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많은 이들이 총회 성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봤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침묵을 행동으로 이끈 어떤 거대한 흐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년 지방선거 때부터 시작해 지난 4.27 재보선 때 그 힘을 다시 한번 드러낸 거대한 강줄기입니다. 그 강줄기는 경제와 성장만을 말하는 보수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입니다. 불통(不通)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 정권은 인간을 빵만으로 사는 존재로 규정하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집권했습니다. 그러나 집권 내내 양극화는 심화됐고 먹고사는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중산층도 등을 돌렸습니다. 애초에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입니다. 물질적 욕구는 충족되어야 할 기본적 욕구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또한 욕망합니다. 그 인간적 요구를 정권은 묵살했고 국민은 분노한 것입니다.

 

인간을 빵만으로 사는 존재로 키워낸다면 그것은 사육에 다름 아닙니다. 인간을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기업이나 특정 조직의 잠재적 부품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고기를 얻으려 가축을 기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은 사육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입니다. 대입을 위한 사육이 돼버린 중등교육도 모자라 고등교육까지 기업적 인간을 위한 사육의 장이 된다면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사람 사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고등학생의 낭만이었던 대학생들은 이미 학점과 영어, 스펙의 포로로 고등학생보다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법인화는 이러한 교육의 사육화를 더욱 촉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부와 정부여당은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묵살했습니다. 그러자 마치 촛불의 침묵이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 되살아났듯, 80% 반대 총투표의 침묵이 지금 비상총회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이 사회를 동물의 왕국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인간 사회로 만들려면 교육과 사육 사이에 난 법인화 전선에서 절대 밀려선 안 됩니다. 서울대의 법인화는 국립대 전체의 법인화로 이어질 것이고, 국립대 법인화는 다른 대학들의 기업화를 더욱 촉진해 고등교육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 것입니다. 제가 더욱 두려운 것은 서울대 법인화가 담고 있는 사육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잠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기르는 것, 이것이 교육의 본질이며 법인화 논의가 돌아가야 할 원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부 점거만으로는 법인화를 원점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학생들이 본부를 점거하고 있지만 사실 법적으로 법인화를 철회할 수 있는 권한은 본부가 아닌 국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4.27 재보선과 그 이후가 보여주었듯 국회를 움직일 힘은 국민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사육장으로 내몰릴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국립대의 주인인 국민에게 있습니다.

 

본부를 점거하고 있는 백 명 남짓한 젊은이들에게 교육의 미래를 떠맡길 것인가요, 그들과 함께 지킬 것인가요. 할 수 있는 일은 많고 쉽습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소식을 퍼뜨리시고, 시간 있거나 서울대에 오실 일이 있는 분들은 매일 밤 열리는 특강에 참석하시거나, 서울대 총장실 응원 관광이라도 오시면 됩니다. 훗날 본부와 총장실이 대한민국 교육사의 성지(聖地)가 될 지도 모르니까요. 국민께서 자신들이 주인인 국립대의 교육을 지켜내신다면 말입니다. 지금, 서울대 학생들은 국민들의 관심과 응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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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빛 2011-06-0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기사를 읽고 감동받아서 댓글 남깁니다
국민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포인트와 적절한 비유까지.
가볍게 웹서핑 하고 자려다 정말 좋은 기사를 만났네요.
오늘 일어난 일 중 가장 행운입니다.
인터넷 기사를 읽고 직접 댓글까지 남기는 일은 처음인 것 같네요
저는 스펙에 시달리는 졸업반 학생입니다.
대학은 대학화되어야 한다는 기자님의 의견에 격하게 공감하며
투쟁하는 서울대 학우분들 많이 알리고 또 응원할게요 ^^ 화이팅!

졸업생 2011-06-0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마이뉴스에서 기사 보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저도 법인화 반대합니다. 힘내세요!!!

비니 2011-06-02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사 봤습니다.!! 힘내세요!!
정말 티비엔 잘 안나오는 것 같아요. 나와도 딱히 집중적으로 다가오지도 않고...;
청년들이 직접 나서 행동하는 모습에 오랜만에 속 시원하고 반가웠습니다.
꼭 성취 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