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전 다윈은 'origin of species'에서 모든 종이 하나의 원시 세포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라는 혁명적인 가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그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21세기 생물학 최고의 과제는 신경생물학이다. 우리 인간의 두뇌를 이해하려는 여정이 전세계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나의 학문적 꿈 역시 나의 뇌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의 관점은 '이보디보'이다. 이보디보적 관점이란 'the origin of specis'를 'the origin of neurons'로 변형한 격이다. 마치 최초의 원시 세포로부터 복잡한 인간이 탄생하였듯, 최초의 신경세포로부터 어떻게 이렇게 복잡한 두뇌가 발달할 수 있도록 진화할 수 있었는지를 진화발생생물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나갈 것이다. 이를테면 20세기 진화학자들이 종의 계보를 그려나갔듯, 나는 신경 네트워크들의 진화적 계보를 그려나갈 것이다. 최초의 원시 뉴런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많은 뉴런들이 갈라져 나왔고, 또 어떻게 구조와 기능이 분화되고 변형되어 인간의 뇌가 진화될 수 있었는지를, 차차 추적해나갈 것이다. 전세계 수많은 신경생물학자들과 함께. 

 내가 연구하는 예쁜꼬마선충은 이런 꿈으로 나아가기에 굳건한 초석이 될 것 같다. 벌레의 이 갸냘픈 몸짓이 단지 벌레만의 것임이 아님을 오늘 절실히 깨달았다. 벌레를 연구하는 것은 진실로, 나를 연구하는 일이다. 오늘도 벌레들과 함께한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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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얼마를 어떻게 갚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미래를 훔쳐쓰고 있다(레스터 브라운, 도요새)』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여러가지 단어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중 하나가 '빚'이라고 생각한다. '금융'이라는 번드르르 한 말로 포장되고 있는 빚은 이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빚의 세계는 개인의 삶부터 전지구적 시스템까지 포섭한다. 주택담보대출이나 자동차 할부가 없었다면 많은 개인들이 지금의 물질적 기반을 갖추기 힘들었을 것이며, 전지구적인 통화 체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는 모두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마이너스 통장에서 나온 순전한 빚이다.  

 빚의 두가지 본성은 '상환'과 '이자'이다. 갚아야 하는 돈만이 빚이며, 빚에는 당연히 이자가 따른다. 또 하나, 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주체'이다. 빚에는 당연히 빚지는 자와 갚는자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체의 분리 위에 서 있다. 국채를 발행해 경제성도 없는 대형사업을 하고, 자원을 과소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자들과 국채를 갚고, 자원고갈에 시달리고, 환경 오염에 몸살을 앓는 이들이 분리돼 있다. 이는 마치 태어난 아이에게 마이너스 통장과 주택담보대출금을 넘기는 격이다. 여기에 이자까지 복리로 불어나 후속 세대가 상환해야 할 몫은 점점 더 불어나고 있다.  

 그런데 빚은, 한도 끝도 없이 불어날 수 있을까? 상식적인 경제적 관념에 따르면, 빚이 너무 커지면 파산에 이른다. 두렵게도, 파산의 조짐은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자연의 역습이 매섭다. 지구온난화는 사막화, 식량생산 감소, 물 부족과 같은 다양한 칼날로 인류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적 석학이자 37년간 기후변화 문제에 선봉장을 서고 있기도 한 레스터 브라운의 『우리는 미래를 훔쳐쓰고 있다(레스터 브라운, 도요새)』는 우리가 진 가장 무거운 빚을 진단하고 그것을 상환할 방안을 논의한다.  인류에게 '우리는 파산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제 필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파산을 막을 것인가'이다. 레스터 브라운이 위기에 처한 인류에게 어떤 상환법을 알려줄지 궁금하다. 

  

  대한민국의 의사결정문화사
 『룸살롱 공화국(강준만, 인물과사상사)』 
 

  우리 사회의 성역을 허물어 온 강준만 교수가 장자연 친필 편지 논란으로 세상이 다시 한번 떠들썩해 진 때에 『룸살롱 공화국(강준만, 인물과사상사)』을 내놓았다. 이 책이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일종의 역사서라는 점이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이름 지하에서 함께 역사를 시작한 이 땅의 룸살롱 공화국의 면면을 세월의 흐름을 따라 서술해나가고 있다. 요정에서 룸살롱으로, 룸살롱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업형으로 변화해나가는 동안, 접대부들이 호스티스에서 10대 소녀로, 연예인으로 다양화되는 동안 군사정권, 판검사, 언론, 정부, 심지어 청와대까지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라 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집단이 이 지하의 역사를 써내려왔다. 그리고 강준만은 그 역사를 회고하고 증언한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압축성장을 거듭해온 지난 60여년간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중요 의사결정은 항상 밀실에서 소수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고 그 밀실은 대개 룸살롱 이었을게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룸살롱 공화국의 역사 위에 쓰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거다. 그래서 『룸살롱 공화국』을 통해 룸살롱 문화를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 문화와 의사결정 주체들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이 될 것 같다.  

 

 부조리의 공장에서 그는 무엇을 기다릴까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황주환, 생각의나무)』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황주환, 생각의나무)』은 불편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한 평교사가 학교라는 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 학교를 성찰한 책이란다. 학교는 체제의 생산, 재생산, 변혁이 모두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것들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학교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준비되고 있는 미래를 볼 수 있다. 반대로 어느 인간 집단에서나 발견되는 부조리가 학교에서 발견될때면 나는 한층 더 민감해진다. 학교 안의 부조리는 미래의 부조리로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해있는 학교나, 내가 속해있던 학교나 이 시스템의 근간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경쟁을 통한 사회적 위계의 창출이다. 여기에 여러가지 외적인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실제 현실은 사회적 위계의 '창출'보다 사회적 위계의 '재생산'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자면 학교는 계급 사회의 전초기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사회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국민교육'이 내세운 목표가 아니다. 근대사회는 계급사회를 떨치고 보편적 인간을 내세우며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근대사회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역시 인성을 함양하고 교양을 쌓으며 여러가지 덕목을 겸비해 행복한 주체적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의 겉목표는 여전히 표방되고 있다. 그 가식과 위선이 빚어지는 교육 현장에서 황주환 선생님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내가 겪은 부조리들이 교육 수용자의 측면에서 느낀 것들이라면 교육 공급자의 측면에서 선생님들이 느끼는 부조리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래서, 그가 기다리는 아주 작은 것이 무엇인지, 왜 그것을 기다리는지 무척 궁금하다. 

  

 이 중생을 웃게할 치명적 농담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한형조, 문학동네)』 


 학부시절, 대학을 휴학하고 인도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 여파로 한창 인생무상을 느끼며 절에나 들어갈까 하고 방황하다 불교가 궁금해 금강경 해설서를 읽었다가 '아, 절에 들어가겠다는 생각 역시 허망한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고 방황을 풀었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새로나온 책 목록을 살펴보다 한형조 교수의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한형조, 문학동네)』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출판사 책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종교'가 아니라 '인문', 즉 오로지 '인간학'의 관점에서 불교에 접근한단다. 불교에 관심은 많았지만 엄두가 잘 나지 않았던 나에게 매우 매력적인 카피라이트였다. 

“삶의 목표는 쾌락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 깊이 이상주의자들입니다. 로맨티스트들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보살님네들이, 남편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아이들도 다 컸으며, 아파트 평수도 남부럽지 않은데, 왜 절을 찾아,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대웅전에 참배하고, 참선에 열중하십니까. 그것은 외면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 교수의 전언에 전적으로 동감하기에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러운 내면을 가진 이 중생은 그의 농담이 얼마나 치명적일지 한번 들어봐야겠다.  

 

닉 레인, 그 이름만으로도 기대되는 책
『생명의 도약(닉 레인, 글항아리)』

 『미토콘드리아』로 날 깜짝 놀라게 했던 닉 레인이 돌아왔다.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필치로 진핵생물의 탄생과 성과 죽음의 진화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던 전작에서 나는 정말이지 지적인 전율을 느꼈다. 생물학도인 내가봐도 엄밀한 사실에 입각한 서술과 동시에 비전문가 대중들도 흡입시키는 서사전개와 탄탄한 문장력은 처음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맞먹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생명의 도약(닉 레인, 글항아리)』을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일군 진화의 10대 발명에 대해 논하겠단다. 나는 생물학의 궁극적 목표가 나 자신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진화론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중에서도 역사학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우주의 먼지들로부터 어떻게 내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화석을 뒤지고 세포를 들여다보고 유전자를 검사하면서 그 과정을 상상하고 또 증언하는 학문이다. '도약론'은 진화론의 대세이다. 인간 진화의 기반이 된 다양한 사건 중 '결정적 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레인은 이 책에서 세포, 유전자, 생체 에너지, 진핵생물, 성, 힘, 감각, 의식, 죽음의 진화를 논한다. 모두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단순한 '썰'이 아니라 엄격한 과학적 증거들에 입각해 논증을 펼치는 그인만큼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로 나를 납득시키고 매혹시킬지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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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이 깔린 수풀 사이로 한 무리의 척후병들이 주변 지역을 정탐한다. 그 중 하나가 도시를 발견하고 정찰 활동을 벌인 후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 보고한다. 그날 오후, 해가 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신호로 수만의 병사들이 일제히 도시를 빠져 나와 목표 도시로 행군한다. 그들에게 더 이상 결전에 대한 결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이웃 도시에 도착한 군대는 급급히 방어태세를 갖춘 도시를 쉽사리 공략한 후, 도시의 아이들을 빼앗아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식량도, 보물도, 여자도 아니다. 그들은 오직 ‘아이’를 원한다. 아이를 빼앗긴 어미들이 절규를 하며 한 병사에게 달려들지만 그는 가볍게 뿌리치고 자신의 도시로 귀환한다. 아이들은 곧장 노예육성소에 넘겨진다. 여왕의 세뇌교육 아래 아이들은 머지않아 도시의 훌륭한 일꾼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먼 과거의 어느 고대 도시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웃 도시들로부터 아이를 탈취해서, 그들을 노예로 키워 생산계급화 하는 어떤 도시의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고대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이 지구상에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 어떤 도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노예사냥을 위한 출병을 하고 있다. 이 도시는 바로, ‘개미’의 도시다.

        'Slave-making ants'로 알려진 Polyergus 속의 개미들은 Formica 속에 속하는 개미들을 노예로 만들어 그들의 노동력과 생산력에 기생하는 ‘노예화 개미’들이다. 이들을 소개한 다큐멘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는데, 나는 지난여름 미국 애리조나의 한 숲에서 그들의 행렬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당시 나는 미국자연사박물관 소속 야외생물학기지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두시간여동안 내가 목도한 노예사냥 장면은 가히 'Culture shock'이었다. 일체의 낙오자 없는 십여 미터의 대열, 부스럭거리는 낙엽 위를 행진하는 수만의 발자국 소리, 망설임이란 찾아볼 수 없는 돌격 장면, 잠깐의 전투 뒤 포획한 알과 애벌레를 문 개미들이 또다시 만들어낸 십여 미터의 대열. 노예해방의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미들의 노예사냥 관찰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인간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사회가 있으니 바로 ‘개미’의 사회이다. 1억년도 더 전에 개미들이 등장하였으니, 사회생활로만 따지면 이들이 인간의 선배라고 할 수 있다. 개미들은 인간보다 훨씬 전에 계급사회를 형성했으며, 생산의 분업화를 이룩하고 심지어는 Polyergus 속처럼 노예제도를 발달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의 사회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어떤 면에서 환경을 개척하고 적응해나가는 능력은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가치판단 없이 Polyergus 속의 노예제도를 평가해보면 인간이 절대 이룩할 수 없었던 완벽한 형태의 노예사회를 이루어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개미의 생존 방식과 사회성 중에서도 가장 많은 주목을 끄는 것은 아마 개미의 ‘계급체제’ 일 것이다. 개미는 크게 생식개미와 비생식개미로 나뉘며 오로지 생식개미 계급만이 종족의 번식을 담당한다. 비생식개미 계급은 모두 암컷이며 이들은 역할에 따라 병정개미와 일개미 등으로 나뉘는데, 개미는 유일하게 전투계급의 개체를 생산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미의 계급사회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특별한 번식방법으로 인해 가능하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 엄마와 아빠의 염색체를 반반씩 물려받는 데 비해, 개미는 둘 다 물려받았을 때 암컷, 하나만 물려받았을 때 수컷이 된다. 따라서 수개미는 염색체가 반밖에 없기 때문에 생식과정에서 그 반을 모두 자손에게 넘겨주게 되고, 모든 딸 개미들은 수개미의 동일한 염색체를 받게 된다. 그 결과, 자매들끼리 아빠 개미의 염색체는 100%, 엄마 개미의 염색체는 50%를 공유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75%의 염색체를 공유한다. 반면, 일개미가 직접 자손을 낳으면 염색체의 반만을 물려주어 50%의 염색체만을 공유하기 때문에 자손을 낳는 것 보다 자매들, 즉 전체 군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

        이렇게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심으로 똘똘 뭉친 개미들은 농업 혁명을 일궈내기도 하였다. 농업 혁명을 통해 본격적인 정착 생활이 시작되고, 잉여생산물로 인해 계급사회가 형성 되었던 인간과는 반대로, 개미들은 이미 형성된 자신들의 도시에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위해 최초로 농사를 시작하였다. 잎꾼개미 혹은 가위개미로 알려진 개미들은 중남미 지역의 열대림에서 서식하는 ‘버섯재배’ 개미들이다. 일개미들이 식물의 잎을 잘라 거대한 지하 도시의 버섯 배양실에 옮기면 기능개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잎을 잘게 씹어 모아둔다. 잎꾼개미들은 이 잎더미에서 균사체를 배양하고 그 성장을 관리하며, 그로부터 균포를 수확하여 먹이로 이용한다. 더군다나 이들은 가슴과 배 부분에 방선균을 키우는데, 이 방선균은 항생물질을 생성해내는 대표적인 미생물로, 버섯이 세균에 감염될 경우 그 부분을 몸으로 문질러 항생제를 ‘투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간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기 수만년 전부터 개미들이 이미 항생제를 사용해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농업 혁명의 중요한 한 측면인 목축도 이미 개미들이 먼저 일궈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많은 개미들은 진딧물과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진딧물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액을 빨아들이기도 하는데, 이때 잉여 수액이 배 끝에서 새어나온다. 개미는 이 진딧물들을 조직적으로 보호하며 잉여 수액을 빨아들여 식량으로 이용하는 농장을 오래전부터 운영해온 것이다. 어쩌면 도축을 일삼고 새끼에게 줄 젖을 억지로 짜내기도 하는 인간들보다 개미들이 훨씬 더 진보한, 환경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목축업을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의 과학기술이 축적되고 발전하면서 인간은 좀더 적극적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환경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우리가 자연의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지구의 주인이라는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인간의 사회가 곧 세계이며, 자연환경은 인간 사회를 떠받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작은 미물에 불과해 보이는 개미와 개미 사회의 존재는 이 인간중심의 사고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인류문명의 소산이라 여겨지는 많은 역사적 성과들이 실제론 인류가 생겨나기도 전 개미들이 벌써 일궈낸 것들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오만함을 비웃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수천만년 동안 지구의 주인으로 군림해온 개미들 앞에서 우리는 ‘주름 잡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원자폭탄 투하에도 개미는 살아남았다지 않는가.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혁명의 시조이자 사회생활의 선배인 개미들에게 지혜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최재천, 개미 제국의 발견 - 소설보다 재미있는 개미 이야기, 사이언스북스, 1999
Howard et al., BEHAVIORAL ECOLOGY OF THE SLAVE-MAKING ANT, POLYERGUS BREVICEPS, IN A DESERT HABITAT, THE SOUTHWESTERN NATURALIST 30(2):289-29 
베르베르 베르나르, 이세욱 역, 개미, 열린 책들, 2001
오태광, 개미가 키우는 두가지 미생물, 중앙일보, 2006년 1월 20일자 20면 기사
<獨 생물학자, 1억2000만 년 전 개미 발견…진화연구에 단서>, 2008년 9월 17일자 이남진 기자 뉴시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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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자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백영옥 작가의 스타일은 소설인 동시에 한국 현대사회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하나의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오늘날 우리네 삶의 여러 모습과 모순들을 진단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현대병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47킬로그램의 여자는 자신이 45킬로그램의 여자보다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45킬로그램의 여자는 자신이 왜 배우 김민희나 모델 장윤주처럼 가는 다리가 아닌지 탄식한다. 세상에 자신이 충분히 말랐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없다(백영옥 20).

이 또한 현대병이다.

반짝이는 볼보C30, 검정색 아우디, 거리가 2백미터도 안되는 편의점에 갈 때도 자신의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다리는 피트니스 클럽이나 에스테틱 숍에서만 쓰는 신체기관이고, 발은 지미추마놀로 블라닉을 신을 때만 쓰고 싶은 연봉 3천만 원짜리들. 예금, 통장, 펀드, 하다못해 보험 하나 없으면서 그들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80-81).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질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로도 번역할 수 있는 이런 현대병이 만성적으로 퍼져있다. 백영옥 작가는 패션지 에디터인 주인공 이서정을 내세워 이러한 세태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극단적으로 외모지향적, 소비지향적, 물질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를테면 상업자본주의의 최극단에 위치한 패션잡지기자가 규정하는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이다.

사람보다 많은 차들이 갤러리아 백화점 앞을 막고 서있었다. BMW, 아우디, 벤츠와 벤틀 리가 나란히 서 있는 그곳을 나는 웃으며 내려다본다. 거대한 욕망의 주차장. 맞다. 이곳이 내가 일하는 곳이다(327).

스타일은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한국의 벌거벗은 자화상을 비추고 있지만 단지 현실세태를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스타일에서 현대병의 갖가지 증상뿐 아니라 발병 원인과 치료법까지 고민하며 모색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백영옥 작가와 스타일의 이러한 노력에서 페티시즘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내고, 이들이 제시하는 치유의 길이 실은 정신분석학이 오래전에 안내한 적 있는 낯설지 않은 길임을 보일 것이다.

 

성수대교의 기이한 낯설음

 

스타일A라는 패션지의 피쳐팀에서 일하는 주인공 이서정의 좌충우돌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서정의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연애’. 일 파트에선 이서정의 좌충우돌은 1년 동안 공을 들여 유명배우 정시연을 인터뷰한 것과 닥터 레스토랑이라는 익명의 레스토랑 비평가의 정체를 밝혀내는 두 가지 주요 사건이 전개된다. 연애 파트에선 직장 동료 김민준과의 므훗한 해프닝과 백마 탄 왕자 박우진과의 러브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리고 스타일을 흐르는 이 두 강줄기는 성수대교에서 만난다.

이 소설에서 성수대교는 각별한 공간이자 강박의 공간이다. 등장인물들이 건너는 다리는 어김없이 바로 이 성수대교이다. 만나기로 한 영화사 이미정 홍보팀장은 성수대교에서 정체가 심해 약속 시간을 늦고, 택시를 타고 가던 이서정은 하필이면 동호대교에서 사고가 나서 성수대교로 우회하다 한참을 차 안에 꼼짝 없이 갇힌다. 서정은 집으로 가는 길, 저 멀리서 부유하는 성수대교의 불빛을 바라본다.

주인공 서정은 1994년에 성수대교 근처 현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인 1021일 오전 740, 서정의 삶은 성수대교와 함께 붕괴해버린다. 그렇게 내 세계를 지탱하던 한 축이 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져버렸다(160).” 그리고 그는 목도한다. 그 속에서 나는 근원적인 어둠을 보았다고 믿었다. 보고 싶지 않던 삶의 이면을.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뜯겨 파헤쳐진 채로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161).” 서정은 성수대교 붕괴로 자신이 우상처럼 따르던 친언니 서은을 잃는다.

서정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고 따르던 언니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의식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어릴 적 언니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자기가 언니가 수영을 못한다고 놀려 언니가 수영을 포기했기에 언니가 익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때 내가 내뱉은 말 때문에 서은 언니가 수영 배우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말이, 한때의 치기어린 장난이 언니를 깊고 차가운 한강 물속에 수장시켰을지도. 내가 언니를 익사시킨 건지도 모른다(300).

성수대교 붕괴라는 트라우마는 이렇게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단단히 결합하게 된다. 그 결과 서정은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놓지 않고선 성수대교를 건너지 못한다. 마치 프로이트가 <모래 사나이>에서 모래 사나이가 나타나엘의 죄의식과 거세공포를 상기시켜 기이한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듯, 스타일에서 언니 서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일깨우는 성수대교는 붕괴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기이한 낯설음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왜 이서정은 패션지 에디터가 되었을까

 

성수대교의 붕괴와 언니의 죽음이 가져온 트라우마는 엄청났다. 그 트라우마란 프로이트가 유아성욕론에서 설파한 거세당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서정의 세계 자체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죄의식은 우선 기억 상실로 이어졌다. 소설 속에서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하는 박우진은 사실 서정의 소꿉친구였다. 다만 그는 우진 오빠라 부르며 뛰어다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 무의식적으로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뿐이다.

서정이 박우진과의 기억을 상실한 이유는 박우진이 그 트라우마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박우진은 여섯 살인 서정에게 수영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우진과 함께 했던 그 수영장에서 서정은 언니 서은이 수영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우진에 대한 기억은 항상 수영장으로, 그리고 언니 서은으로 이어져 엄청난 트라우마를 다시 호출했다. 그래서 서정은 선택한 것이다. 내 기억은 완전히 닫혀버렸다. 내가 닫아버린 것이다. 밤마다 물속에 휩쓸리는 언니의 모습을 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선 그래야 했다(300).”

트라우마는 어릴 적 기억 일부를 봉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트라우마는 서정의 삶의 방식 자체를 규정짓는다. 그를 현대병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현대병 환자의 주요 증상을 요약하자면 현재주의, 물질주의, 욕망주의다. 이런 식이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미래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언제든 이 삶이 무너져 버릴 수 있는데, 현재를 빼면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뭔가. 그러므로 나에겐 언제나 지금이 가장 중요했다. 내가 원하는 걸 당장 취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것만이 훌륭한 인생의 본보기 같았다. 그것이 왜 부당한가! 아름다운 물건을 취하고자 하는 당장의 욕망이 미래를 어떻게 붕괴시킬 거란 말인가(166).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세계의 한 축이 붕괴되는 것을 체험한 서정에게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내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붕괴하고 있지 않은 오늘만이 있을 뿐.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함께일 것 같던 언니 서은의 죽음을 목격한 서정은 죽을 수 있는(mortal) 사람보다 죽지 않는(immortal) 물질에 집착한다. 가치나 이상 역시 욕망에 질식당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내일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오늘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내일이 없을 지도 모르는데. 더 많이 가지고, 더 아름다워지려는 순간의 충동에 충실한 것이 서정의 삶에서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 현대병 발병 과정은 프로이트가 말한 그 무엇과 매우 닮아있다. 바로 페티시즘(fetishism)’이다.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에서 페티시스트들이 집착하는 여성의 속옷 같은 절편음란물이 사실은 남근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자아이는 여성이 자신과 같이 남근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를 부인하려는 동시에 자신도 여성처럼 거세에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불쾌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에게는 남근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전에 자신이 알던 남근과는 다른 종류라는 생각을 만들어 낸다. 프로이트는 그 남근의 대체물로 대개는 여성의 생식기를 목격한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어떤 물체가 절편음란물이 된다고 주장했다(프로이트, 페티시즘320-323).

서정에게 있어 성수대교의 붕괴는 남자아이가 남근 없는 어머니의 생식기를 목도한 것과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거세가 생명력의 상실을 상징한다면 서정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인간의 죽음(mortality) ‘그 자체였다. 프로이트가 말한 페티시즘을 확장해 존재한다고 혹은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라질 때 그 존재를 대체할 무언가를 모색하는 행위로 규정한다면 서정의 페티시즘이란 성수대교 붕괴 후 서정의 삶과 세계 그 자체다. 언니의 죽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삶 자체의 붕괴를 경험한 서정은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자체를 자신이 사라져도 남아 있을 외부의 존재들로 대체해버린다. ,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히는 물질세계를 자신의 삶 전체와 맞바꿔버린 것이다.

페티시즘에 걸린 서정에게 가 아니라 내가 입은 옷과, 내가 걸친 핸드백과, 내 체중과, 내 연봉이 된다. 나를 가꾸는 일은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비싼 구두를 신는 것이다. 내가 갑자기 죽는다 한들 내 옷과, 내 구두와, 내가 벌어 논 돈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자신이 존재하리라 믿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서정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다시 성수대교가 붕괴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남을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집착한다. 마치 여자 속옷에 열광하는 페티시스트처럼. 성인이 된 그가 물질세계의 엣지(edge)패션지에디터가 된 것은 남다른 재능이나 적성 탓이 아니라 성수대교가 가져온 페티시즘의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정이 소설 속에서만 등장할 법한 인물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성수대교 붕괴의 분신과 서정의 분신이 넘쳐난다. 얼마 전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씨랜드 유치원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이 대형 사건의 희생자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서정과 비슷한 그림자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가 커다란 상처를 받고 제2, 3의 서정이 늘어가면서 우리는 덧없는 것을 기억하고 기리기보단 덧없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남근상을 세우는데 골몰하게 됐다. 한국사회를 장악한 물질성장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더 큰 남근상을, 눈에 분명히 보이고 만져질 수 있는 거대한 남근상을 세우자는 것이다. 페티시즘의 극치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것도 없이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9·11 테러, 다르푸르 내전, 소련 붕괴, 천안문 사태, 킬링필드 등 전쟁, 테러, 집단 학살, 대형 사고로 점철된 현대사회는 전 세계인들에게 거세 충격에 맞먹는 공포를 집단적으로 선사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페티시즘이라는 PTSD(Post-traumatic Syndrome Disorder)를 앓게 됐다. 그 결과 오늘날 인류는 죽을 수 있는 인간보단 죽지 않는 물질을, 허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이데올로기보단 당장의 욕망에 집착하게 됐다. 스타일의 주인공 서정처럼.

 

프라다를 향한 욕망과 기아를 돕고 싶은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류에겐 아이폰의 애플뿐 아니라 인도주의 기구인 유니세프(UNICEF)도 있다. 현대 사회가 물질주의 사회이긴 하지만 모두가 물질만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아직 살만한 것은, 그래도 삶이 아름다운 것은 말초적인 욕망 그 이상의 숭고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숭고한 욕망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비율에서 차이를 보일 뿐 물질적 욕망과 비-물질적 욕망을 모두 갖고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수대교의 붕괴로 심각한 페티시즘을 앓게 된 서정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서정은 돈이 궁해 때려치우고 싶은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면서도 꾸준히 기부를 한다.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기부금 때문에 엄마에게 돈을 꾼 적도 있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205).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감싸주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지금 의 생존을 위한 페티시즘 사이의 타협은 쉽지가 않다. 명품과 기부 사이의 간극, 이 간극을 메우려는 서정의 투쟁, 이를테면 욕망의 황금비율 찾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러나 멀고 험하지만 분명 길은 있다. 스타일은 그 길의 안내자로 요리를 제안한다. 우진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진에게 몇 번이나 상처를 받은 서정은 그가 만들어준 따뜻한 백합국을 한 그릇 먹고 나자 비로소 닫혀있던 자신의 기억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진의 백합국이 아니라 직장동료 지선의 백합국이었다면, 혹은 우진의 백합국이 아니라 우진의 ‘3분 카레였다면, 아마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20년 동안 멀리서 서정을 지켜보며 사랑한 우진이었기에, 그 우진이 이태리에서 요리를 배우던 시절 자신이 아플 때마다 끓여 먹었던 애틋함이 담긴 백합국이었기에 상처받은 서정의 마음은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었다. 우진의 레스토랑이 극찬을 받는 이유도 호화스러운 인테리어나 번뜩이는 마케팅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료를 선택하는 정성, 음식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음식이 가진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우진의 요리가 우리 사회에서 한 쪽으로 과도하게 쏠린 욕망 화해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던지는 안내말은 분명하다. 그것은 진심을 다한 이해와 사랑에 기반한 믿음,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상처를 응시하고 치유할 수 있으며 보다 함께 행복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의 근본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통한 치유의 근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가 저항을 무릅쓰고 분석의 기본 규칙을 따라 분석작업을 계속함으로써 그에게 이제 알려진 저항에 몰두할, 그것을 훈습할, 그것을 극복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One must allow the patient time to become more conversant with this resistance with which he has now become acquainted, to work through it, to overcome it, by continuing, in defiance of it, the analytic work according to the fundamental rule of analysis.)(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119-120)”

우진이 서정에게 행한 치유는 고전적인 정신분석학적 치료다. 그는 환자(patient)인 서정이 저항을 이겨내고 그것을 응시하고 또 극복해내기까지 십 수 년을 인내(patient) 했다. 그는 분명 더 많은 것, 이를테면 서정이 잊고 있던 기억을 일깨운 후 그 상처를 끊임없이 보듬어준다던가 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우진은 독자의 속을 터뜨릴 만큼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몇 년이고. 그는 아마 프로이트의 열렬한 신봉자였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옛날 옛적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서 의사에게는 잠자코 기다리며 일이 진행되도록 놔두는 것 이외에 다른 할 일이 없다.(The doctor has nothing else to do than to wait and let things take their course, a course which cannot be avoided nor always hastened.)(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120)”

그러나 이 기다림과 따뜻한 백합국 한 그릇이 끝끝내 서정을 치유한다. 서정은 고백한다.

나는 이제 패션을 위해 내 삶을 희생시키진 않겠다. 더 이상 스키니 진을 입기 위해 무모한 다이어트를 감행하지도, 15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구르지도 않을 것이다.(백영옥 326)

서정은 마침내, 성수대교의 페티시즘을 넘어선 것이다.

 

상처받은 우리는 서로의 정신분석가가 되어주어야 한다

 

서정은 성수대교 붕괴로 언니를 잃고, 자신이 믿어온 세계를 잃고, 기억을 잃고, 페티시즘을 얻는다. 서정의 영혼에 깊숙이 난 상처는 자신의 왕자님인 박우진을 외면하게 하고, 다이어트를 위해 끼니를 담배와 커피로 때우며 건강을 망가뜨리게 한다.

하지만 서정은 끝끝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닫아 두었던 기억을 열고, 페티시즘을 버리고 사랑과 사람을 받아들인다. 그가 이렇게 치유의 길로 더디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우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진은 마치 프로이트의 현현(顯現)인 마냥 정신분석학적 치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환자로 하여금 고통스럽지만 저항을 이겨내고 상처를 들여다보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주제넘게 서정의 상처를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고 덤벼들기 보단 서정이 스스로 자신의 상흔을 보듬을 수 있도록 멀찍이서 지켜보고 백합국 한 그릇 끓여줄 뿐이었다.

그 결과 서정은 자기 상처의 핵심, 즉 언니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그에 따른 죄의식을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블랙홀 같은 검은 그림자에서 마침내 벗어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우진의 말을, 비로소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알고, 바라보고, 보듬을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음을 서정은 보여주고 있다.

위험 사회라고도 불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서정과 같은 그림자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상처 받은 자이며 우리 안에도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가 있다.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우린 서로에게 우진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스타일은 이야기한다. 이 세기말의 페티시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서로 정신분석가가 되어주라고.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지긋이 응시하여 어루만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고, 이야길 들어주고, 때론 따뜻한 백합국 한 그릇 끓여주라고. 그래야만 과거와, 진정한 자기 자신과, 헝클어진 욕망들과, 또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과 화해할 수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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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11-10-0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상세한 분석 좋고 추천합니다. 하지만 너무 이 작품의 좋은 면만을 부각시키신 건 아닌지.. 저는 조금은 작위적인 플롯이 못 마땅하기도 했거든요. 여튼, 성실하고 좋은 글 쓰시는 분 만나게 되서 반갑습니다 :)
 

약 1.5kg 남짓한 작고 말랑말랑한 인간의 뇌는 거대한 세계의 많은 비밀을 풀어왔다. 특히 과학이라는 발명품을 개발한 이후 뇌가 세계의 암호를 해독하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해가 뜨고 지는 비밀을 풀어냈고,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비밀도 풀어냈다. 거침없는 뇌의 행보는 세게 전체를 이해해버릴 기세다. 그러나 뇌 앞에는 분명히 거대한 장벽이 놓여있다. 그 난관은 바로 ‘자신에 대한 이해’다. 뇌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해탈의 길에 버금갈만한 과업은 우주 탄생의 비밀 정도뿐이다. 『대학신문』에서는 우리 뇌가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살펴보고 블랙박스로 여겨졌던 뇌의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블랙박스 안에 든 ‘말랑말랑’한 뇌를 꺼내다

예술성, 사회성, 종교성은 인간 고유의 특성으로 꼽힌다. 인간을 다른 종(種)과 구분하는 이런 특성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뇌에서 벌어지는 고등한 신경 활동의 결과다. 정치나 예술 같은 고도의 지적 활동을 위해서는 플라나리아나 오징어의 단순한 반사작용과는 차원이 다른 신경 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등 신경 활동의 중추인 뇌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중반까지 심리학적 접근법이 주류를 이뤘다. 스키너로 대표되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뇌를 ‘블랙박스’로 취급했다. 자극이 들어가면 알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반응이 나오는 요술 상자로 여긴 것이다. 이렇게 자극과 반응이라는 간단한 도식에 따른 접근은 기본적으로 오징어의 뇌를 다루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심리학적 접근으로는 신경 활동의 구체적 기작을 밝히고 이를 임상적으로 적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실 인간의 뇌는 딱딱한 블랙박스나 오징어의 뇌가 아니라 뉴런이라는 신경세포 1천억 개로 이뤄진 말랑말랑한 덩어리다. 진정으로 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블랙박스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말랑말랑한 뇌를 꺼내야 했다.

블랙박스를 여는 시도는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특히 학습과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강봉균 교수(생명과학부)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기억의 총합”이라며 “학습과 기억 연구는 치매나 학습장애 치료를 위한 의학적 측면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고 설명했다. 기억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연구자들은 기억이 형성된다고 알려진 포유동물 뇌의 해마(Hippocamupus)에 주목했다. 뇌의 여러 부분 중 해마가 기억을 담당하므로 해마 뉴런은 다른 뉴런과 다를 것이라는 가설이 세워졌다. 그러나 연구 결과 해마 뉴런 그 자체는 다른 뉴런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말랑말랑한 시냅스에 기억이 저장될까?

해마 뉴런에서 다른 뉴런과의 별다른 차이가 관찰되지 않자 연구자들은 뉴런 자체보다 이들이 이루는 네트워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들은 복잡한 네트워크에 바로 접근하기 어려워 우선 두 뉴런 사이의 접속 부분인 시냅스(Synapse)에 주목했다. 이들은 1949년 캐나다의 심리학자 헤브가 뉴런이 함께 흥분하면 두 뉴런이 연결된다며 제안한 ‘Fire together, Wire together’라는 헤브의 규칙을 재해석했다. 서로 지속적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뉴런의 시냅스가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시냅스의 강도가 고정된 것이 아닌 가변적이라는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을 함축한다.

시냅스를 사이에 둔 두 뉴런 간의 신호전달은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이뤄진다. 시냅스 전 뉴런의 전기 신호가 시냅스 부근까지 전달되면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고, 이것이 시냅스 후 뉴런의 수용체에 결합하면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 시냅스 가소성은 이 과정의 효율성이 항상 고정돼 있지 않고 외부 자극이나 현재 및 과거의 활성도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시냅스가 ‘딱딱’한 것이 아니라 ‘말랑말랑’하다는 것이다.

신경생물학자들은 기억의 형성이 바로 이 말랑말랑한 시냅스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자극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면 시냅스가 이를 실제로 기억하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직접적 증거는 토끼에서 가장 먼저 나왔다. 1973년 팀 블리스 박사와 로모 박사가 토끼의 해마에서 빠른 주파수로 한 뉴런을 자극한 후에 그 뉴런을 자극하면 그 순간뿐 아니라 상당기간 동안 시냅스에서의 신호 전달 효율이 증가함을 밝힌 것이다. 이 현상은 일시적 효율증가인 단기강화와 구별해 장기강화(LTP, Long-term Potentiation)로 명명됐다. 바다 달팽이인 군소(Aplysia)에서 장기촉진이라는 비슷한 현상이 에릭 칸델 박사에 의해 보고됐다. 칸델 박사는 그 공로로 2000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어 마크 베어 박사가 반대로 시냅스 효율이 감소하는 장기저하(LTD, Long-term Depression)를 발견했다.


   
 
  인간의 뇌를 구성하는 1천억 개의 뉴런은 각각 1천 개에서 최대 10만 개의 뉴런과 접속한다. 따라서 우리 뇌에는 천문학적인 시냅스가 존재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연구로 시냅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밝혀지면서 학습과 기억을 비롯한 뇌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시냅스와 기억 사이의 비밀을 풀 열쇠, LTP와 LTD

이후 30여년간 연구자들은 LTP나 LTD가 진행되는 동안 실제로 시냅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밝히는 데 집중했다. 이 비밀을 밝힌다면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분자적 이해가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됐다. 연구는 포유류 해마의 일부인 CA1이라는 부분을 대상으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됐다. CA1 연구에서 밝혀진 LTP/LTD의 개괄적 기작은 다음과 같다. 시냅스 전 뉴런에서 분비된 글루탐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은 시냅스 틈에서 확산돼 시냅스 후 뉴런의 수용체에 결합한다. 글루탐산이 수용체에 결합하면 수용체의 통로(Channel)가 열려 그 안으로 전하를 띤 이온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 이런 글루탐산 수용체에는 크게 NMDA 수용체와 AMPA 수용체가 있다. 이 중에서도 NMDA 수용체가 특히 LTP/LTD와 밀접히 관련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통로가 쉽게 열리는 AMPA 수용체와 달리 NMDA 수용체는 통로가 마그네슘 이온에 막혀 있어 잘 열리지 않는다. 시냅스 전 뉴런으로부터 많은 자극이 주어져야만 비로소 마그네슘 이온이 빠져나와 통로가 열린다. 그러나 일단 통로가 열리고 나면 괄목할만한 변화가 시작된다. AMPA 수용체는 통과 못 하는 칼슘 이온이 NMDA 수용체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뉴런 안으로 들어온 칼슘 이온은 신호 전달 물질로 작동하며 세포 안에서 여러 가지 반응을 촉진한다.

이때 뉴런 내에서 칼슘이 증가하는 속도에 따라 시냅스에서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진다. 칼슘이 급격하게 증가하면 LTP가 진행된다. AMPA 수용체의 이온 통과 효율이 높아지고 심지어 더 많은 AMPA 수용체가 시냅스 후 뉴런의 세포막에 삽입된다. 그 결과 시냅스 후 뉴런은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반면 같은 칼슘이라 해도 서서히 증가하는 경우 LTD가 진행된다. AMPA 수용체의 숫자를 줄이는 등의 과정을 거쳐 시냅스의 효율이 감소한다.

시냅스 가소성 기작 조절의 유용한 적용 시도

기초적 기작이 밝혀지자 1990년대 후반부터 시냅스 가소성과 기억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들이 잇따라 보고됐다. 1996년 챈(Tsien) 박사팀은 NMDA 수용체에 이상이 있는 쥐에서 LTP 뿐만 아니라 공간 기억에 이상이 생김을 확인했다. 심지어 탕(Tang) 박사팀이 1999년 NMDA 수용체를 더 많이 발현시키자 기억력이 좋아졌다. 2000년 들어서도 LTP와 장기기억 사이의 관계를 입증하는 사례들이 계속해서 보고됐다.

시냅스 가소성에 대한 분자적 이해는 ‘기억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임상적으로도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대표적 사례로는 공포기억 소거를 들 수 있다. 우리 뇌 속에는 공포반응을 주관하는 편도체라는 부위가 있다. 공포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편도체에서 NMDA 수용체에 의존적인 LTP가 진행된다. 실제로 NMDA 수용체 작용제인 D-cycloserine이라는 약물을 처리하면 공포기억 소거가 더 잘 일어나는 것이 확인됐다. 최석우 교수(생명과학부)는 “고소공포증,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TSD) 등 공포기억과 관련된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데 D-cycloserine이 노출치료 후 재발가능성을 낮추는 약물로 이용 중”이라고 말했다. 시냅스 가소성에 대한 분자적 이해가 실제로 기억 관련 질환을 치료하는 데 응용되는 것이다. 현재 LTP/LTD 조절의 임상적 응용은 약물중독 치료와 파킨슨병 치료에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신경생물학자들의 집념과 열정으로 블랙박스에 들어 있던 말랑말랑한 뇌를 꺼내면서 뇌 연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전에는 설명할 수 없던 복잡한 현상을 시냅스 가소성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설명할 수 있게 됐고, 이를 지지하는 풍부한 증거들이 쌓이고 있다. 강봉균 교수는 “단순히 시냅스 가소성 변화를 측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시냅스 가소성 자체의 특징이나 성격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최근 동향을 설명했다. 같은 정도의 자극에도 시냅스 가소성 변화의 방향이나 강도가 신경세포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초가소성(metaplasticity) 현상에 대한 연구도 막 시작되고 있다. NMDA 수용체에 의존적인 LTP/LTD 외에도 다른 형태의 LTP/LTD가 보고되고 있는데 시냅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LTP/LTD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뉴런과 뉴런 사이의 LTP/LTD와 같은 단순한 현상이 신경 네트워크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 복잡한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밝히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대학신문, 2009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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