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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무엇보다도 <불안의 시대>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강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저자의 서술방식과 문장력이다. 저자 기디언 래치먼은 마치 한편의 역사추리소설처럼 독자들을 자신의 서사로 흡입시킨다. 칼럼니스트답게 문장이 늘어지지 않고 박력이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저자의 능력을 거의 손상시키지 않은 번역이다. 아무리 원저자가 좋은 글을 쓰더라도 번역가가 성의가 없거나 능력이 없으면 결국 독자들에게 전혀 친근하지 않은 번역서가 되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상당히 깔끔하다. 거의 번역투를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에게 불편했다. 헤게모니를 쥐어온 서구 중심의 역사관과 접근이 불온해보였다. 책의 표지에는 '우리가 낙관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써있다. 영어 부제는 'Zero-Sum Future: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이다. 이 둘을 합치면 결국 우리는 세계가 아니라 '영미' 중심의 서구세계이며 낙관은 오로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낙관의 시대라 부르는 지난 30년 동안 과연 한국인들은 낙관의 시대를 살았는가. 우리네 삶은 바로 그들로 인하여 수도 없이 흔들리지 않았던가. 세계 자본 시장과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의 손짓 하나에 IMF라는 국가적 재앙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정말 그들은 낙관의 시대를 보냈는가? 대처리즘과 레이건주의 밑에서 얼마나 많은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은 더 부유해졌고 더 행복해졌는가? 그 부유와 행복은 소수의 것이 아니었나? 한 발 양보해서 만약 더 부유했고 더 행복해졌다하더라도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세계가 제로섬의 미래로 나아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낙관의 시대동안 세계는 함께 번영했던가? 오히려 전세계적인 빈부격차 커지고와 강대국들의 세련된 약소국 착취가 더 심해지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말하는 낙관의 시대를 마감시킨 원흉인 그린스펀에 대해 어찌 이리도 관대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과 역사에 대한 판단 착오는 미래에 대한 그릇된 비전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대담(?)하게 선언한다. 
'강하고 성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모습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다.'
한마디로 웃기는 짬뽕이다.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은 강하고 성공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미국'이 아니라 '세계'이다. 너님들의 안정과 번영이 어찌 논리적으로 세계의 희망이 되는가.  그것도 범죄적 탈규제로 세계 경제를 파탄내고, 재정이 파산지경에 이르고, 아프간 전쟁은 10년째 절절매고 있는, 종전 이후 가장 볼품없는 너님들이 어찌 이리 당당히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은 변했다. 세계가 바라는 미국은 절대 군주가 아니라 책임있는 국가이다.  

 이러한 주장이 영미권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는 지 모르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이렇게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한 세계는 미국에게 그들이 바라는 권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이 불온으로 이어질 때,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 할 때, 세계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미국이 세계라고 착각하는 머저리가 얼마나 많은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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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유시민의 정치 좌표 그리기


  『국가란 무엇인가』는 ‘유시민의 정치 좌표 그리기’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플라톤, 홉스, 루소, 마르크스를 망라하며 정치철학의 좌표를 깔끔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서 있는 좌표를 명료하게 선언하고 있다.

  지식 소매상을 자처하는 그답게 대중들에게 정치철학의 계보를 맛깔스럽게 설명한다. 그가 간략하게 그려내는 계보는 국가주의-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는 여기에 플라톤의 ‘목적론적 국가론’을 끼워 넣는다.

  홉스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국가론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게 한 ‘국가’를 신격화한다. 국가가 국민의 안보를 위하는 한 국민은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국가를 계급 지배의 도구로 보고 철폐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과 ‘악마’ 사이에 위치한 자유주의 국가론은 그 스펙트럼이 꽤 넓다. 로크의 법치주의, 스미스의 시장경제, 밀의 자유주의,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까지 자유주의 진영 내 이념적 다양성이 높으나, 이들은 국가가 선을 행하려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주류적 정치이념이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에 걸쳐있다고 진단한다.

  유시민은 어찌 보면 진부한 국가론의 x축에 오랫동안 배격된 플라톤의 ‘목적론적 국가론’을 불러들인다. 플라톤은 만물이 고유의 텔로스(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 역시 예외가 아닌데, 그는 국가의 텔로스가 정의라고 주장했다. 유시민은 플라톤의 견해를 자유주의자의 견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가’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로 규정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과 정치인 유시민의 ‘독창성’이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구체적인 정의의 개념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채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국가의 정의란 국민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일 테다. 유시민은 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 이를테면 자유적 기본권, 교육권, 환경권, 행복추구권 등이 ‘헌법’을 통해 규정돼있다고 설명한다. 헌법이 없던 플라톤의 시대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이 전제 군주나 일부 귀족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헌법이 정해지는 현대 정치체제에는 권리의 주체들이 권리를 정할 수 있다. 바로 그 차이로 인해 유시민은 다시 지금, 여기에 목적론적 국가론을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라는 관념적인 조직은 인간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을 통해 실제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운영하는 인간주체들이 그러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 유시민은 도덕적 국가 실현을 위한 정치인의 도덕 이념으로 베버의 ‘책임윤리’를 내세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진보주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베버식의 윤리보다 의도의 순수함을 중시하는 칸트의 ‘신념윤리’을 추구한다. 신념윤리에 입각한 진보주의자는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할 때엔 사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적지만, 그들이 국가권력에 참여할 때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동기만 중시하면서 정치적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단적인 예시로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을 든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여러 정치 주체들이 결과보다는 동기만을 중시하며 투쟁에 골몰한 결과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나치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베른슈타인을 옹호하며 혁명보다는 개혁주의자를 표방한다.

  이 지점에서 최근 진보정당과의 합당 논의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유시민 대표가 던진 메시지의 뜻이 분명해진다. 그는 진보정당이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변화해 스스로 국가권력 운영을 맡으려는 전략으로 나아갈 의사가 확인된다면 국민참여당이 함께 하는 문제를 검토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책임윤리론자’인 유시민은 그동안 ‘신념윤리’를 내세워 왔다고 보여지는 진보정당이 ‘책임윤리’를 추구한다면, 달리 말해 ‘사회주의’라는 ‘동기’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책임’을 중시한다면 합당을 고려하겠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유시민은 최근 대세라 할 수 있는 야권연대에 대해서도 결과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책임윤리로 바라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 진단한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던 타협 없이 자기 당의 후보를 내기보다, 선거를 이기기 위해 적절한 타협을 하는 것은 신념윤리를 중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유시민은 목적론적 자유주의자이자, 개량주의자이며, 책임윤리자이다. 그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통해 깔끔히 그린 좌표 위에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나는 그가 여기서 쓴 것들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아직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정치와 그가 보이려 하는 정치 사이의 간극을 부정하기 힘든 것 같다. 그가 그 간극을 좁혀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한, 나는 유시민의 정치를 응원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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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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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재일조선인의 옥중증언(獄中證言)

국민주의에 대한 저항적 글쓰기

  

경계는 감옥이다. 근대의 국민국가라는 기획에 포섭되지 못한 변방의 존재들은 그 경계에 갇힌 수인으로서 살아왔다. 세계는 국민-국어 공동체인 국민국가로 조각났고 그 단절의 기획 속에 수많은 경계인이 양산되었다. 지구는 국민만을 정회원으로 하는 회원제 클럽이 되었고 인간은 오로지 국민으로서 허용될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은 오로지 국민의 이름으로만 하사되었다. 어느 국가에도 귀속되지 않는 무국적자들은 국가와 언어라는 이중의 감옥에 갇혀 폭력적 현실을 견뎌왔다.

여기, 한 수인이 고백을 한다. 나, 언어의 감옥에 갇혀있노라고. 그리고 증언을 한다. 감옥 안에서 그가 보고, 듣고, 말한 것을. 그 고백록이자 증언록인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언어의 감옥에서-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이 지난 3월 번역·출간되었다.

서경식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일본어로 강단에 서는 한국인이다. 그의 고향도, 그가 꿈을 꾸는 언어도 모두 일본의 것이지만 그를 한국인이라 규정하는 것은 그의 국적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적(한국)-모국어(한국어)/영주국(일본)-모어(일본어)의 단절적 존재인 그는 스스로를 재일조선인이라 칭한다.

 

재일조선인은 누구인가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재일조선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러할 것이기에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의 정체역사에 대한 친절한 설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은 한반도(조선반도)에 혈통적 뿌리를 둔 일본 거주민들을 일컫는 말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수백만의 조선인이 자의와 타의로 일본에 건너갔고, 해방 이후에도 수십만이 일본에 잔류했다. 해방 전, 황민이라는 이름의 일본국 국민이었던 이들은 해방 후 국적을 자동으로 박탈당했고 동시에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 역시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된 국가의 주권자의 지위 또한 얻지 못했다. 조국이 곧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국적 문제를 협의할 대표성 있는 단일 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조선적이라는 실질적 무국적자 집단을 방치했고 심지어 탄압하였다. 재일조선인들은 국민으로서의 권리도,외국인으로서의 지위도 부여받지 못한 회색인으로 갖은 멸시를 견디며 살아갔다.

1965 한국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국적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협정에 불과했다. 재일조선인에게 주어진 권리는 남한국적을 선택하면 일본 영주권이 주어진다는 냉전적 폭력이었다. 또 재일조선인들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을 인정이라는 하나의 타협과, 식민지 지배를 사과하고 반성하기는커녕 군사정권과 공모해 재일조선인의 인간적인 권리를 거부하려는 일본정부와의 이중의 타협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그 타협을 거부하기에 재일조선인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나 열악했다. 영주권이 없다는 것은 삶의 터전이 불법이라는 이름하에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는 의미였고, 국적이 없다는 것은 여권이 없다는 뜻이므로 국가 간 왕래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타협의 갈림길에서 당시 많은 청년운동 세력들이 분열되기도 했고 서경식 역시 착잡한 마음으로 영주권 신청 기한 막바지에 신청했다고 한다.

 

윤동주 서시에서 발견한 언어의 감옥

 

이러한 연유로 그는 모국/모국어가 한국/한국어인 한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어는 일본어이다. 심지어 그의 일본어는 뛰어난 일본어 표현으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을 정도이다. 근대 국민국가 울타리의 세 꼭짓점을 이루는 국적-모국어과 모어 사이의 단절은 그에게 하나의 거대한 벽이다. 그를 둘러싼 단절의 벽은 그에게 거대한 감옥이 된다. 소년의 눈물에서 뛰어난 일본어 표현으로 상을 수상한 그는 수상 인사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구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원래는 모어여야 할 언어(조선어)를 이미 박탈당하고 과거 종주국의 언어를 모어로 해서 자라났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일본어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일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좀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었고 이전에 갈기갈기 찢어진 동포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번민의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그가 느낀 언어의 벽은 이를테면 일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서시이다. 일제 강점기 저항적 문학의 상징이자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의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가 이부키 고가 번역한 윤동주 시집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돼있다. 직역해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문장이 굳이 의역이 돼있다. 20년 넘게 중쇄를 거듭하는 이 시집에 실린 서시의 의역에 대해 조선 문학 연구자인 오무라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했다.

윤동주가 서시를 쓴 19411120일은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과 그들의 민족 문화 모두가 죽어가던시대였다. ‘죽어가는 것들사랑해야지라고 부르짖는 윤동주는 이 모든 것을 죽음으로 내모는 자들에 대해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을터이다. 이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해버리면 죽어가는 것들도, 죽음으로 내모는 자도 모두 사랑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부키 고는 이 비판에 대해 모든 죽어가는 것들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이어동의(異語同意)라며 윤동주는 군국주의에 대한 증오심 따위가 아니라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을 말하고 있다고 반론한다. 즉, 오무라 편에서는 윤동주 작품에서의 저항의 정신을 강조하고 이부키 편에서는 의도적으로 저항의 정신을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서경식은 윤동주의 시를 접할 때에도 일본 및 일본인이 받아들여야 할 고발이 아닌 일반적인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으로 읽기를 선호하는 식민주의적 권력행사를 발견한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대부분의 독자가 이 같은 어긋남을 알아차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독자에는 수많은 재일조선인 독자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서경식은 이들이 번역문을 비교해보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일본어 번역에 가해진 일본인 주류의 심리를 반영하는 편향에 노출되며, 식민지 민중의 자손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마저 아이러니컬하게 종주국의 지()의 식민주의적 지배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모국어로서의 조선어모어로서의 일본어의 분열이라는 아포리아에 맞닥뜨린 수인의 처지임을 토로한다.

 

국민주의라는 계속되는 식민주의

 

우리가 서경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가 단지 스스로가 감옥에 갇힌 수인이라 고백하는데 있지 않다. 감옥에 갇혀 있는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 밖의 힘들에 대하여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그는 그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을 증언한다. 그의 증언은 요컨대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그는 우파의 야비한 욕설이 울려 퍼지고 리버럴 세력은 공허한 양비론을 중얼거리며 방관하는 이 때에 이런 무참한 사회를 젊은 세대에게 남겨주게 되어 황량한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책임감에서 무거운 마음을 북돋아증언하고 또 증언한다.

굳이 그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본의 식민주의가 계속되고 있음을 똑똑히 보고 있다. 얼마 전, 일본은 대지진으로 국가적 재난에 처하고 한국은 그런 일본을 위문하며 성금과 구호물자를 보내던 시기에 독도를 일본영토라 기술한 교과서 검정을 강행했다. 독도 문제는 일본의 계속되는 식민주의가 집약적으로 표출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반성은 자신들이 패배한 전쟁에 국한된 것이며, 그 이전의 식민지배는 당시의 관점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 방법 역시 제국주의 시대인 당시엔 불법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청일전쟁부터 시작돼 을사조약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내정간섭과 점진적인 식민지화 과정은 도의적으로는 잘못되었을지 몰라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며 그 과정에서 진행된 독도 편입 행위 역시 합법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여전히 조선의 식민 지배를 긍정하고 그 식민주의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시류가 일제 패망 60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강고히 흐르고 있다.

서경식은 이렇게 일본에서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국민주의라 부른다. 그는 국민주의를 배타적 내셔널리즘인 국가주의와 구별하여 소위 선진국(구식민지 종주국)의 다수자가 무자각 상태로 가지는 자국민 중심주의라 규정한다. 국민주의자들은 자신을 내셔널리즘에 반대하는 보편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많은 권리가 국민국가의 국민이라는 조건으로 보증되는 일종의 특권이라는 사실과 그 특권의 어두운 역사에 눈 감는다. 사회적·경제적 풍요를 국민의 자격으로 누리면서도 그 국민이 속한 국가의 정치적·역사적 책임은 시민이라는 탈 뒤에 숨어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 탈 뒤의 비겁한 공간은 새역모와 야스쿠니에서 매우 가깝다. 90년대 중반부터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일부 극우 인사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국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서경식은 진단하고 있다.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언어의 감옥에서는 번역서이다. 즉, 이 책은 원래 일본어 공동체에 헌정된 책이었다. 실제로 독서 내내 이 책은 한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이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3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을 읽으며 한국어 공동체에서 이 책이 소개된 이유와 의의를 백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서경식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선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하며,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일본의 리버럴 세력의 사고와 행동의 문제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한국 체류 중 한국 사람들이 일본 우파에 대해선 경계하고 비판의식을 갖고 있지만 일본의 리버럴 세력에 대한 인식은 부정확한 데다 오해에서 비롯된 호의를 품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의 소수자임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의 산증인인 재일조선인으로서 서경식은 이러한 이해 부족이 안타까운 일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일이라고 말한다.

3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은 이러한 위기감의 발로에서 실린 글들이다. 요컨대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의 사상적 퇴락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그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일본의 박유하 열풍을 꼽는다. 한국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화해를 위해서가 일본 학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리버럴 계열의 신문인 아사히신문사의 오사라기 지로 논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유하는 화해를 위해서에서 일본의 지식인이 자신에 대해 물어왔던 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은 지금껏 한국은 가진 적이 없었다며 한일 간 갈등의 책임을 한국에게 돌린다. 여기서 일본의 지식인은 누구이며 한국은 무얼 지칭하는가. 일제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일본의 지식인이 아니며,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베트남전을 반성하는 한국 지식인은 한국이 아니란 말인가? 또 박유하는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며 한국인들이 피해자로서의 내셔널리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자기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상처를 받기 전의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며. 용서는 당연히 진상규명, 책임 승인, 사죄, 보상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통념조차도 배격하는 이러한 주장은 같은 논리로 따르자면 일본이 북조선 때리기를 열렬히 하는 일본인 납치 사건 역시 마찬가지의 논리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북한의 책임 있는 행동 이전에 우선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일본인 스스로의 상처받지 않은 평화로운 마음을 위해.

이렇게 어설픈 주장에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은 왜 열광하는가? 서경식은 일본 리버럴 학계의 기이한 박유하 열풍에서 그들에게 숨겨진 욕구를 읽어낸다. 그들은 우파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에 반대하며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라고 자임한다. 그러나 동시에 식민지배를 통해 획득한 일본 국민의 특권이 위협받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다. 따라서 한일 간 화해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자신들의 책임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모순적 태도로 인해 화해의 책임이 한국에 있다는 박유하식 화해론이 열광적으로 환영받는 것이다. 이렇게 극우 세력뿐 아니라 일본의 좌파인 리버럴 세력들마저도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책임의 공을 피해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서경식은 박유하 현상을 바라보며 1990년대 이후 일본의 리버럴 세력의 사상적 퇴락을 선언한다.



쁘레모 레비와 서경식

 

전작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서 서경식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자 현대 증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삶과 자신의 삶을 겹쳐놓은 바 있다. 언어의 감옥에서에서도 많은 지면을 프리모 레비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그에게서 증언자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읽고 있기 때문일 게다. 프리모 레비는 그의 유작 익사된 자와 구조된 자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젊은이와 대화하기가 점점 곤란해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의무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대착오라고 여겨질지 모른다는 위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위험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야기해야만 한다. 개인적인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우리는 총체적으로 어떤 근본적이고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의 증인인 것이다. (중략) 이것은 한 번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서경식은 느낄 것이다. 점점 더 일본인들과 대화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학계에선 그의 주장이 내셔널리즘의 굴레에 갇힌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듣고, 젊은 일본인들은 아예 식민주의 같은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그의 삶 자체가 총체적으로 어떤 근본적이고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증언은 무엇보다 사태의 재발을 막는 데 있다. 주변국이 일본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들이 일으킨 적 있었던 사건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군다나 또다른 군국주의 패전국인 독일과 달리 일본은 사죄와 반성조차 하지 않는 나라이기에 그 위험성은 뜬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일본은 일본의 프리모 레비인 서경식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구식민지 민중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바로잡고 일본사회의 비인간화를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미번역 언어의 감옥에서를 비롯한 서경식의 일본어 저술과 그 독자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번역된 언어의 감옥에서의 독자인 나에게는 다른 몫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피지배 민족의 후손으로서 그의 통렬한 비판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단 세계 곳곳에서 제국주의적 확장에 편승하고 있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느끼는 불편함이 더 컸다. 과연 대한민국은 베트남에게 응당한 사죄와 보상을 했던가. 물론 일본과 달리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지만, 많은 국민들은 마음속으로 경제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정당화하고 있진 않은지, 라이따이한과 같은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 있는 보상이 이루어졌는지를 돌아보게 됐다. 또 현재도 진행 중인 아프간·이라크 파병은 어떠하며 외국인 노동자 정책은 어떠한가. 마치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간직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분리장벽의 악몽을 만들어내고 있듯이,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우리가 오늘날 한국민 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진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서경식이 프리모 레비의 피해자 속의 내재된 가해성에 대한 성찰에 주목하듯 말이다.

거시적인 측면뿐 아니라 미시적인 개인적·일상적 측면에서도 언어의 감옥에서는 나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이다. “전공 상 아이들을 외국에서 낳고 기를 가능성이 큰 데, 아이들의 모어는 무엇으로 해야 할 것인가? 국민으로 기를 것인가 외국인으로 기를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국가, 민족, 언어와 같이 개인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요소들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인 듯하다.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가 아니었다면 국적-모국어-모어가 일치된 울타리 안의 나에게서 울타리 밖의 자녀가 태어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한참 뒤에 얻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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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자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백영옥 작가의 스타일은 소설인 동시에 한국 현대사회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하나의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오늘날 우리네 삶의 여러 모습과 모순들을 진단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현대병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47킬로그램의 여자는 자신이 45킬로그램의 여자보다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45킬로그램의 여자는 자신이 왜 배우 김민희나 모델 장윤주처럼 가는 다리가 아닌지 탄식한다. 세상에 자신이 충분히 말랐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없다(백영옥 20).

이 또한 현대병이다.

반짝이는 볼보C30, 검정색 아우디, 거리가 2백미터도 안되는 편의점에 갈 때도 자신의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다리는 피트니스 클럽이나 에스테틱 숍에서만 쓰는 신체기관이고, 발은 지미추마놀로 블라닉을 신을 때만 쓰고 싶은 연봉 3천만 원짜리들. 예금, 통장, 펀드, 하다못해 보험 하나 없으면서 그들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80-81).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질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로도 번역할 수 있는 이런 현대병이 만성적으로 퍼져있다. 백영옥 작가는 패션지 에디터인 주인공 이서정을 내세워 이러한 세태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극단적으로 외모지향적, 소비지향적, 물질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를테면 상업자본주의의 최극단에 위치한 패션잡지기자가 규정하는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이다.

사람보다 많은 차들이 갤러리아 백화점 앞을 막고 서있었다. BMW, 아우디, 벤츠와 벤틀 리가 나란히 서 있는 그곳을 나는 웃으며 내려다본다. 거대한 욕망의 주차장. 맞다. 이곳이 내가 일하는 곳이다(327).

스타일은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한국의 벌거벗은 자화상을 비추고 있지만 단지 현실세태를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스타일에서 현대병의 갖가지 증상뿐 아니라 발병 원인과 치료법까지 고민하며 모색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백영옥 작가와 스타일의 이러한 노력에서 페티시즘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내고, 이들이 제시하는 치유의 길이 실은 정신분석학이 오래전에 안내한 적 있는 낯설지 않은 길임을 보일 것이다.

 

성수대교의 기이한 낯설음

 

스타일A라는 패션지의 피쳐팀에서 일하는 주인공 이서정의 좌충우돌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서정의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연애’. 일 파트에선 이서정의 좌충우돌은 1년 동안 공을 들여 유명배우 정시연을 인터뷰한 것과 닥터 레스토랑이라는 익명의 레스토랑 비평가의 정체를 밝혀내는 두 가지 주요 사건이 전개된다. 연애 파트에선 직장 동료 김민준과의 므훗한 해프닝과 백마 탄 왕자 박우진과의 러브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리고 스타일을 흐르는 이 두 강줄기는 성수대교에서 만난다.

이 소설에서 성수대교는 각별한 공간이자 강박의 공간이다. 등장인물들이 건너는 다리는 어김없이 바로 이 성수대교이다. 만나기로 한 영화사 이미정 홍보팀장은 성수대교에서 정체가 심해 약속 시간을 늦고, 택시를 타고 가던 이서정은 하필이면 동호대교에서 사고가 나서 성수대교로 우회하다 한참을 차 안에 꼼짝 없이 갇힌다. 서정은 집으로 가는 길, 저 멀리서 부유하는 성수대교의 불빛을 바라본다.

주인공 서정은 1994년에 성수대교 근처 현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인 1021일 오전 740, 서정의 삶은 성수대교와 함께 붕괴해버린다. 그렇게 내 세계를 지탱하던 한 축이 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져버렸다(160).” 그리고 그는 목도한다. 그 속에서 나는 근원적인 어둠을 보았다고 믿었다. 보고 싶지 않던 삶의 이면을.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뜯겨 파헤쳐진 채로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161).” 서정은 성수대교 붕괴로 자신이 우상처럼 따르던 친언니 서은을 잃는다.

서정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고 따르던 언니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의식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어릴 적 언니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자기가 언니가 수영을 못한다고 놀려 언니가 수영을 포기했기에 언니가 익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때 내가 내뱉은 말 때문에 서은 언니가 수영 배우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말이, 한때의 치기어린 장난이 언니를 깊고 차가운 한강 물속에 수장시켰을지도. 내가 언니를 익사시킨 건지도 모른다(300).

성수대교 붕괴라는 트라우마는 이렇게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단단히 결합하게 된다. 그 결과 서정은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놓지 않고선 성수대교를 건너지 못한다. 마치 프로이트가 <모래 사나이>에서 모래 사나이가 나타나엘의 죄의식과 거세공포를 상기시켜 기이한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듯, 스타일에서 언니 서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일깨우는 성수대교는 붕괴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기이한 낯설음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왜 이서정은 패션지 에디터가 되었을까

 

성수대교의 붕괴와 언니의 죽음이 가져온 트라우마는 엄청났다. 그 트라우마란 프로이트가 유아성욕론에서 설파한 거세당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서정의 세계 자체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죄의식은 우선 기억 상실로 이어졌다. 소설 속에서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하는 박우진은 사실 서정의 소꿉친구였다. 다만 그는 우진 오빠라 부르며 뛰어다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 무의식적으로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뿐이다.

서정이 박우진과의 기억을 상실한 이유는 박우진이 그 트라우마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박우진은 여섯 살인 서정에게 수영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우진과 함께 했던 그 수영장에서 서정은 언니 서은이 수영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우진에 대한 기억은 항상 수영장으로, 그리고 언니 서은으로 이어져 엄청난 트라우마를 다시 호출했다. 그래서 서정은 선택한 것이다. 내 기억은 완전히 닫혀버렸다. 내가 닫아버린 것이다. 밤마다 물속에 휩쓸리는 언니의 모습을 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선 그래야 했다(300).”

트라우마는 어릴 적 기억 일부를 봉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트라우마는 서정의 삶의 방식 자체를 규정짓는다. 그를 현대병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현대병 환자의 주요 증상을 요약하자면 현재주의, 물질주의, 욕망주의다. 이런 식이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미래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언제든 이 삶이 무너져 버릴 수 있는데, 현재를 빼면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뭔가. 그러므로 나에겐 언제나 지금이 가장 중요했다. 내가 원하는 걸 당장 취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것만이 훌륭한 인생의 본보기 같았다. 그것이 왜 부당한가! 아름다운 물건을 취하고자 하는 당장의 욕망이 미래를 어떻게 붕괴시킬 거란 말인가(166).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세계의 한 축이 붕괴되는 것을 체험한 서정에게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내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붕괴하고 있지 않은 오늘만이 있을 뿐.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함께일 것 같던 언니 서은의 죽음을 목격한 서정은 죽을 수 있는(mortal) 사람보다 죽지 않는(immortal) 물질에 집착한다. 가치나 이상 역시 욕망에 질식당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내일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오늘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내일이 없을 지도 모르는데. 더 많이 가지고, 더 아름다워지려는 순간의 충동에 충실한 것이 서정의 삶에서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 현대병 발병 과정은 프로이트가 말한 그 무엇과 매우 닮아있다. 바로 페티시즘(fetishism)’이다.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에서 페티시스트들이 집착하는 여성의 속옷 같은 절편음란물이 사실은 남근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자아이는 여성이 자신과 같이 남근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를 부인하려는 동시에 자신도 여성처럼 거세에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불쾌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에게는 남근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전에 자신이 알던 남근과는 다른 종류라는 생각을 만들어 낸다. 프로이트는 그 남근의 대체물로 대개는 여성의 생식기를 목격한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어떤 물체가 절편음란물이 된다고 주장했다(프로이트, 페티시즘320-323).

서정에게 있어 성수대교의 붕괴는 남자아이가 남근 없는 어머니의 생식기를 목도한 것과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거세가 생명력의 상실을 상징한다면 서정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인간의 죽음(mortality) ‘그 자체였다. 프로이트가 말한 페티시즘을 확장해 존재한다고 혹은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라질 때 그 존재를 대체할 무언가를 모색하는 행위로 규정한다면 서정의 페티시즘이란 성수대교 붕괴 후 서정의 삶과 세계 그 자체다. 언니의 죽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삶 자체의 붕괴를 경험한 서정은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자체를 자신이 사라져도 남아 있을 외부의 존재들로 대체해버린다. ,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히는 물질세계를 자신의 삶 전체와 맞바꿔버린 것이다.

페티시즘에 걸린 서정에게 가 아니라 내가 입은 옷과, 내가 걸친 핸드백과, 내 체중과, 내 연봉이 된다. 나를 가꾸는 일은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비싼 구두를 신는 것이다. 내가 갑자기 죽는다 한들 내 옷과, 내 구두와, 내가 벌어 논 돈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자신이 존재하리라 믿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서정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다시 성수대교가 붕괴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남을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집착한다. 마치 여자 속옷에 열광하는 페티시스트처럼. 성인이 된 그가 물질세계의 엣지(edge)패션지에디터가 된 것은 남다른 재능이나 적성 탓이 아니라 성수대교가 가져온 페티시즘의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정이 소설 속에서만 등장할 법한 인물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성수대교 붕괴의 분신과 서정의 분신이 넘쳐난다. 얼마 전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씨랜드 유치원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이 대형 사건의 희생자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서정과 비슷한 그림자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가 커다란 상처를 받고 제2, 3의 서정이 늘어가면서 우리는 덧없는 것을 기억하고 기리기보단 덧없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남근상을 세우는데 골몰하게 됐다. 한국사회를 장악한 물질성장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더 큰 남근상을, 눈에 분명히 보이고 만져질 수 있는 거대한 남근상을 세우자는 것이다. 페티시즘의 극치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것도 없이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9·11 테러, 다르푸르 내전, 소련 붕괴, 천안문 사태, 킬링필드 등 전쟁, 테러, 집단 학살, 대형 사고로 점철된 현대사회는 전 세계인들에게 거세 충격에 맞먹는 공포를 집단적으로 선사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페티시즘이라는 PTSD(Post-traumatic Syndrome Disorder)를 앓게 됐다. 그 결과 오늘날 인류는 죽을 수 있는 인간보단 죽지 않는 물질을, 허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이데올로기보단 당장의 욕망에 집착하게 됐다. 스타일의 주인공 서정처럼.

 

프라다를 향한 욕망과 기아를 돕고 싶은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류에겐 아이폰의 애플뿐 아니라 인도주의 기구인 유니세프(UNICEF)도 있다. 현대 사회가 물질주의 사회이긴 하지만 모두가 물질만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아직 살만한 것은, 그래도 삶이 아름다운 것은 말초적인 욕망 그 이상의 숭고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숭고한 욕망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비율에서 차이를 보일 뿐 물질적 욕망과 비-물질적 욕망을 모두 갖고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수대교의 붕괴로 심각한 페티시즘을 앓게 된 서정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서정은 돈이 궁해 때려치우고 싶은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면서도 꾸준히 기부를 한다.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기부금 때문에 엄마에게 돈을 꾼 적도 있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205).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감싸주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지금 의 생존을 위한 페티시즘 사이의 타협은 쉽지가 않다. 명품과 기부 사이의 간극, 이 간극을 메우려는 서정의 투쟁, 이를테면 욕망의 황금비율 찾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러나 멀고 험하지만 분명 길은 있다. 스타일은 그 길의 안내자로 요리를 제안한다. 우진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진에게 몇 번이나 상처를 받은 서정은 그가 만들어준 따뜻한 백합국을 한 그릇 먹고 나자 비로소 닫혀있던 자신의 기억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진의 백합국이 아니라 직장동료 지선의 백합국이었다면, 혹은 우진의 백합국이 아니라 우진의 ‘3분 카레였다면, 아마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20년 동안 멀리서 서정을 지켜보며 사랑한 우진이었기에, 그 우진이 이태리에서 요리를 배우던 시절 자신이 아플 때마다 끓여 먹었던 애틋함이 담긴 백합국이었기에 상처받은 서정의 마음은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었다. 우진의 레스토랑이 극찬을 받는 이유도 호화스러운 인테리어나 번뜩이는 마케팅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료를 선택하는 정성, 음식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음식이 가진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우진의 요리가 우리 사회에서 한 쪽으로 과도하게 쏠린 욕망 화해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던지는 안내말은 분명하다. 그것은 진심을 다한 이해와 사랑에 기반한 믿음,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상처를 응시하고 치유할 수 있으며 보다 함께 행복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의 근본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통한 치유의 근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가 저항을 무릅쓰고 분석의 기본 규칙을 따라 분석작업을 계속함으로써 그에게 이제 알려진 저항에 몰두할, 그것을 훈습할, 그것을 극복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One must allow the patient time to become more conversant with this resistance with which he has now become acquainted, to work through it, to overcome it, by continuing, in defiance of it, the analytic work according to the fundamental rule of analysis.)(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119-120)”

우진이 서정에게 행한 치유는 고전적인 정신분석학적 치료다. 그는 환자(patient)인 서정이 저항을 이겨내고 그것을 응시하고 또 극복해내기까지 십 수 년을 인내(patient) 했다. 그는 분명 더 많은 것, 이를테면 서정이 잊고 있던 기억을 일깨운 후 그 상처를 끊임없이 보듬어준다던가 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우진은 독자의 속을 터뜨릴 만큼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몇 년이고. 그는 아마 프로이트의 열렬한 신봉자였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옛날 옛적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서 의사에게는 잠자코 기다리며 일이 진행되도록 놔두는 것 이외에 다른 할 일이 없다.(The doctor has nothing else to do than to wait and let things take their course, a course which cannot be avoided nor always hastened.)(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120)”

그러나 이 기다림과 따뜻한 백합국 한 그릇이 끝끝내 서정을 치유한다. 서정은 고백한다.

나는 이제 패션을 위해 내 삶을 희생시키진 않겠다. 더 이상 스키니 진을 입기 위해 무모한 다이어트를 감행하지도, 15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구르지도 않을 것이다.(백영옥 326)

서정은 마침내, 성수대교의 페티시즘을 넘어선 것이다.

 

상처받은 우리는 서로의 정신분석가가 되어주어야 한다

 

서정은 성수대교 붕괴로 언니를 잃고, 자신이 믿어온 세계를 잃고, 기억을 잃고, 페티시즘을 얻는다. 서정의 영혼에 깊숙이 난 상처는 자신의 왕자님인 박우진을 외면하게 하고, 다이어트를 위해 끼니를 담배와 커피로 때우며 건강을 망가뜨리게 한다.

하지만 서정은 끝끝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닫아 두었던 기억을 열고, 페티시즘을 버리고 사랑과 사람을 받아들인다. 그가 이렇게 치유의 길로 더디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우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진은 마치 프로이트의 현현(顯現)인 마냥 정신분석학적 치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환자로 하여금 고통스럽지만 저항을 이겨내고 상처를 들여다보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주제넘게 서정의 상처를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고 덤벼들기 보단 서정이 스스로 자신의 상흔을 보듬을 수 있도록 멀찍이서 지켜보고 백합국 한 그릇 끓여줄 뿐이었다.

그 결과 서정은 자기 상처의 핵심, 즉 언니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그에 따른 죄의식을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블랙홀 같은 검은 그림자에서 마침내 벗어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우진의 말을, 비로소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알고, 바라보고, 보듬을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음을 서정은 보여주고 있다.

위험 사회라고도 불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서정과 같은 그림자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상처 받은 자이며 우리 안에도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가 있다.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우린 서로에게 우진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스타일은 이야기한다. 이 세기말의 페티시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서로 정신분석가가 되어주라고.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지긋이 응시하여 어루만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고, 이야길 들어주고, 때론 따뜻한 백합국 한 그릇 끓여주라고. 그래야만 과거와, 진정한 자기 자신과, 헝클어진 욕망들과, 또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과 화해할 수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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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11-10-0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상세한 분석 좋고 추천합니다. 하지만 너무 이 작품의 좋은 면만을 부각시키신 건 아닌지.. 저는 조금은 작위적인 플롯이 못 마땅하기도 했거든요. 여튼, 성실하고 좋은 글 쓰시는 분 만나게 되서 반갑습니다 :)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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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언젠가 한번 봐야지 했던 장은진 작가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준호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다. 한 달 가까이 책꽂이에 방치하다 오늘 밤에야 완독했다.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 할 때 가슴이 뭉클했고 눈가도 촉촉해졌다. 이 느낌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간만에 키보드를 잡았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우리가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답장을 받기 위해서다. 그것이 비록 내가 보낸 것과 같은 형태의 답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신인의 반응, 그것이 없다면 편지는 고지서에 불과하다. 아니, 고지서조차도 받는 자의 납부를 바란다. 편지는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지지도, 더더군다나 버려지지도 않았음을 확인하려는 희망수단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위험하다. 답장은, 오지 않을 수도 있기에.

나는 여행을 한다. 눈 먼 할아버지의 눈 먼 개 와조와 함께 모텔을 전전하면서.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기 위한 것이다. 수학선생님의 아들인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숫자를 붙이고 주소를 묻는다. 모텔에서 매일 밤 편지를 쓰고 공중전화로 매일 옆집 친구에게 편지가 왔는지 묻는다. 지하철에서 만난 그녀에게 751이라는 숫자를 부여할 때까지 단 한통의 답장도 받지 못한다. 오늘도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는 말은 일과가 되었고, 답장을 받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여행은 3년째 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751을 만난다.

751은 자기 손으로 쓴 소설을 자기 손으로 파는 작가이자 장사꾼이다. 751도 모텔을 전전하는 여행자다. 751이 이런 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나와 비슷하다. 751은 소설을 썼고 출판을 했으나 751의 책은 서점 창고에서 발견됐다. 그녀는 세상에 편지를 부쳤으나 세상은 편지를 홀대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답장을 직접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런 751은 나를 한눈에 간파했는지 성가시게 끝까지 따라온다. 여자는 나에게 모텔을 소개해준다. 화가의 이름이 객호인 보기드문 여행자 숙소에 나는 여자와 가까워진다. 각방을 쓰던 사이는 한방을 쓰던 사이가 되지만 한 침대를 쓰는 사이가 되진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둘은, 둘이 된다. 친구와 각본을 쓰다 단어 하나를 두고 절교해 버린 751과, 말을 더듬어 누군가와 함께 있단 사실 그 자체가 불편한 내가 둘이 있는데 익숙해지고 의지하게 된다. 최소한 둘은 서로에게 보낸 편지에 서로 답장을 해주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부터, 편지는 오지 않았지만 나는 답장을 받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 여행은 나 혼자 누군가의 답장을 간절히 기다리는 외로운 여행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치면 노인의 몸으로 3년 가까이 거리를 떠돈, 장기가 다 망가질 지경에 이를 때까지 나에게 답장 한 장 독촉하지 않은 나의 개 와조, 와조는 늘 나에게 편지하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가 높다랗게 쌓여있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 우체통이 아니라 답장으로 가득찬 나날이다.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엔, 어쩌면 편지 한 통으로 충분할 지 모른다. 그들이 거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답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으니.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의 '나'처럼 수신인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엔 편지 한 통은 더 절박하다. 아직 내 앞으로 도착할 편지가 한 통 있다면, 삶은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다.

삭막한 이 세상에 엄하게 툭 떨어진 편지 한 통이, 그 종이 한 장이 마음을 얼마나 채우는지를, 받아본 자는 알 것이다. 안다면, 편지 한 통 보내자.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어, 하며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에게. 여기, 아직 편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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