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노아 > 대원군이 노무현보다 나은 이유

대원군이 노무현보다 나은 이유

무작정 열어젖히면 된다는 한미 FTA 추진파의 ‘쇄국망국론’에 답한다 … 개화파의 대표격인 김옥균이 왜 대원군을 구하려 했는지 생각해보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미 FTA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정부를 비롯해 한미 FTA에 목을 건 사람들이 즐겨 내세우는 주장이 쇄국론이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고 ‘쇄국망국론’을 폈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지난 6월12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대원군의 쇄국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실제 잘 몰랐다”면서 “과단성 있는 쇄신정치가 통쾌하게만 보였지, 그것이 우리를 망치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정치를 한창 할 때까지 그 점에 대해서 판단이 잘 없었다”며 역사의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개화는 자주요 독립이었다

진보 진영의 많은 논객들은 한미 FTA 반대론을 쇄국론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수준 이하’의 주장이라며 제쳐두고 지나간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역사 공부가 업이고, 또 이 뜬금없는 쇄국망국론이 일반인에게 나름대로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노무현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가 현재 반FTA의 선봉에 서 있는 정태인은 한미 FTA 반대론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이완용이나 박제순에 비유하는 건 “아무리 봐도 지나친 감이 있다”며, “특히 노 대통령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개혁 의지를 생각해보면 김옥균에 비유해야 더 잘 어울린다”고까지 주장한다.


△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잘한 거냐고 굳이 묻는다면, 지금처럼 대책 없이 문 열어주는 것보다는 백번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심술이 나서일까? (사진/ 한겨레)

21세기의 벽두를 살아가는 ‘개화파’들은 한미 FTA에 반대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쇄국정책을 편 수구파로 몰고 있다. 그런데 당시 개화파의 대표 격인 김옥균이 정작 쇄국정책의 집행자인 대원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에는 좀더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1884년 김옥균 일파가 궁정 쿠데타인 갑신정변을 감행했을 때 그들이 내건 14개조의 정강에서 제1항은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었다. 당시의 복잡한 상황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시해온 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대표 격인 최익현의 탄핵을 받고 1873년 물러나게 되고,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씨를 중심으로 한 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대외통상을 위한 단서가 열리게 되었고, 마침내 1876년 강제적인 문호 개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개항 이후의 정치적·경제적·심리적 동요와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속에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은 근 10년 만에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대원군의 복귀는 조선의 문호를 군사력을 동원해 억지로 열어젖힌 일본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일본은 출병을 준비했다. 일본의 출병 소동에 자극을 받은 청은 선수를 쳐서 “종주국으로서 속방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조선왕조 개창 이래 500년 가까이 지속돼온 ‘조공(朝貢)’ 체제에서 중국이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청군은 민씨 정권 요인들의 요청에 따라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납치해 중국으로 끌고 갔다.

일본 쪽의 한 기록(<복택유길전>(福澤諭吉傳))에 의하면 김옥균은 “개인적으로는 대원군과 원수에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조선 자주의 권(權)이 이미 상실되었다고 비통함을 금치 못하였으며, 죽음으로써 자국의 자주권을 회복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쇄국의 화신 대원군이 제거되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김옥균 일파가 대원군 납치에 격분해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표리부동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들로 생각했다. 김옥균은 개화에 목숨을 걸었지만, 그들에게 개화란 단순히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라 자주요 독립이었다. 그러니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개화를 내세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뱃속이 맞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이념에 따라 일렬로 세운다면 오른쪽 맨 끝에서 기준 잡으실 백범 김구가 끝내 세계 반공의 대부 미국으로부터 배척받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김옥균이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이광린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김옥균 등은 “대원군이야말로 쇄국에 대한 생각만 바꾸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옥균 등을 키워낸 박규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고종의 리더십에 실망한 박규수는 고종이 군주로서의 리더십을 키우는 것보다는 쇄국과 개화에 대한 대원군의 견해를 바꾸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울 때의 평양감사가 바로 박규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박규수는 쇄국정책에서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그의 사랑방은 개화파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했다. 개화파들의 고뇌가 잘 들어나 있는 <근세조선정감>에도 대원군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쇄국이 가능하기도 했지만, 대원군이 아니면, 즉 대원군 같은 과단성이 없다면 뒤에 쇄국에서 개화로 나아가기를 바랄 수 없다고 쓰여있다. 어쩌면 김옥균 자신이 직접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흥선대원군략전>은 대원군의 군제개혁과 군비확충 등 국방개혁을 높이 평가했다.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한미 FTA 추진론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는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문 걸어잠그고 있으면 잘될 수 없다. 그런데 금방 들어먹지는 않는다.


△ 고종보다 흥선대원군이 낫다고 생각한 김옥균에게 개화는 자주요 독립이었다. 김옥균의 암살 장면을 그린 그림.(사진/ 한겨레)

개방하고 교류한 나라 중에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렇게 열면 금방 쫄딱 망한다는 점이다. 김옥균이 오죽하면 대원군을 업으려 했겠는가? 김옥균은 민씨 정권을 사대수구당으로 몰아붙였지만, 김윤식·어윤중 등 청의 개입과 대원군의 납치를 요청한 인물들은 온건개화파 내지는 대외통상파였다. 이들이 주장한 ‘동도서기’(東道西器)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제 이들 방식으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하려면 서구의 과학기술이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를 같이 만들어야 했다. 과학기술자들이 천시받는 사회, 엘리트의 절대 다수가 ‘공자 왈 맹자 왈’을 외어야 하는 사회에서 기계 몇 점 들여온다고 ‘서기’가 잘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문은 열었으되 시간은 그렇게 흘러버린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의 어떤 사고방식과 물적 토대를 갖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쇄국을 하는 동안 일본은 난학(蘭學)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서 메이지유신이 가능했는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이 집권하기까지 사용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언사는 대원군의 척화비나 위정척사파의 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중국의 신사(紳士), 조선의 양반(兩班)에 비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전통사회의 엘리트였지만, 중국의 신사나 조선의 양반과는 달리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다. 생각을 바꿨을 때 자기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기득권이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을 타파했다.

대원군이 정권을 실각한 것은 1873년으로, 1867년의 메이지유신과 시간상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마감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에서부터, 또는 1876년의 개항으로부터 나라를 일본에 완전히 빼앗기는 1910년까지는 한 세대가 넘는 기간으로 한 학기 강의를 해도 다 끝내지 못할 만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 시기였다. 갑신정변도 있고, 동학농민운동도 있고, 갑오개혁도 있고, 독립협회도 있고, 의병전쟁도 있고, 광무개혁도 있고, 애국계몽운동도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 대신 땜빵으로 일관한 민씨 정권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팔아 잡수신 친일파들도 있었다. 요컨대 대원군 한 사람에게 쇄국이란 이름으로 ‘독박’ 씌워도 될 만큼 역사란 게 간단치는 않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잘한 거냐고 굳이 묻는다면, 지금처럼 대책 없이 문 열어주는 것보다는 백번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심술이 나서일까?

정태인의 글을 보니 정부 쪽 사람들 중에 정말 엉뚱하게 “신미양요 때 미국과 잘 협상했더라면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버젓이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정태인은 앞서 얘기한 대로 노무현 대통령을 김옥균에 비교하면서 한미 FTA 반대론자들은 동학혁명군에 가까운 느낌이라며, 기왕에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려면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같은 좀 멋진 그림을 꿈꾸지 하필이면 신미양요 타령이냐고 꾸짖은 바 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다. 왜냐하면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은 만나지 못했어도, 노무현과 젊은 영화인들은 2002년 대통령 선거와 2004년에 이미 뜨겁게 만났었는데, 2006년에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대치하고 있다. 어디 영화인뿐인가!

교훈 얻으려면 방곡령 사건을 보라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또는 김옥균과 대원군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아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더니, 21세기의 벽두에는 참으로 고약하고 괴이한 결합이 ‘낯선 식민지’(한미 FTA 반대론의 기수 이해영 교수의 책 제목이다)를 불러오고 있다. 김옥균이 대원군에게서 가장 높이 산 것은 역시 과단성이었을 것이다.


△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사무라이들의 사고방식과 물적 토대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아야 한다. 1872년에 찍은 메이지 일왕의 사진.(사진/ 한겨레)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 마땅히 책임을 지고 개혁됐어야 할 관료집단과 재벌들이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살아남아 노무현을 등에 업고 정신없이 한미 FTA를 몰아붙이고 있다. 19세기 말의 개국론자 김옥균은 대원군의 과단성을 사서 자주 독립을 강화할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21세기의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무현의 화끈함을 사서 ‘낯선 식민지’로 우리를 몰아간다.

한미 FTA의 문제점이야 내가 여기서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꼭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다. 미국인(또는 법인) 투자자가 한국의 공공정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인데, 이런 이의를 한국의 사법기구에 제기하는 것이라면야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한미 FTA가 이루어지면 “미국 투자자가 한국의 사법심사 절차 대신, 한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국제중재기관(Tribunal)에 회부할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변에 따르면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의 중앙정부, 국회,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미국인 투자자의 투자 활동에 영향을 미칠 공공정책의 경우, 미국 투자자의 국제 중재 회부에 따라, 한국의 행정부와 입법부는 한국의 사법심사를 통해 그 정책의 적법성을 확인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며, “한국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그 정책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권한을 상실하는 것”이다. 미국이 멕시코와 캐나다 등과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11조에서 이미 현실로 나타나는 문제다.

정부 쪽 사람들이 정말 한미 FTA와 관련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엉뚱하게 쇄국-개화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방곡령 사건을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청일전쟁 전야인 1889년부터 1893년까지 조선의 외무대신 격인 독판교섭통상사무(督判交涉通商事務)를 3번, 주한 일본공사를 3번 갈아치운 사건으로, 투자자-국가소송 제도와 관련해서 심각한 교훈을 준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한국을 식량 공급지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쌀과 콩 등 미곡의 일본으로의 유출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국내의 미곡 부족과 그에 따른 곡가 상승, 국내 유통시장의 붕괴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3년 7월 ‘조일 통상장정’(1876년 체결)을 개정해 일정 지역에서 곡물의 유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여 법적 근거를 마련했는데, 유일한 단서 조항은 조선 정부 또는 지방관이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사전 예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고이지 외국의 동의를 요하는 사항은 아니었다.

IMF와 탄핵, 개혁 기회를 날리다

방곡령은 1884년부터 1904년까지 모두 100여 회 단행됐는데, 그중 가장 말썽이 난 것이 1889년 함경감사 조병식이 선포한 방곡령이었다. 조병식은 단순한 지방관이 아니고, 함경감사로 부임하기 이전에 독판교섭통상사무(외무대신)을 지낸 인물로서 독판 재임 당시 경상도 지방의 방곡령 사건을 처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 김대중 정권이 위기 상황에서 강요받은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 든든한 뿌리를 내렸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한 캉드쉬 전 IMF 총재. (사진/ 한겨레)

그는 1889년 10월 관내의 식량 부족을 이유로 방곡령을 준비하면서 통상장정 37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시행 1개월 전에 외국공사관에 통보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통리아문 쪽의 실수로 조병식이 예정한 10월24일 1개월 전에 통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통리아문은 일방적으로 시행일을 1개월 늦춰 11월22일 이후로 하여 일본 쪽에 통보했는데, 정작 이 사실을 함경도의 조병식에게는 통보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조병식은 예정대로 10월24일부터 일본 상인들의 곡물 매매와 운반을 금지했다. 일본은 조병식의 ‘죄’를 물어 면직시킬 것을 요구했고, 민씨 정권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조병식을 3개월 감봉에 처했다가 결국 강원감사로 좌천성 인사를 단행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배상을 요구했고, 조선 정부는 일본 상인들이 곡물 투기에서 입은 손실과 미래의 수익까지 포함된 배상 요구에 굴복했다.

방곡령은 조선 정부의 주권에 관한 문제였다. 배상 문제가 제기된 조병식의 방곡령 등 4건의 사례는 김경태 교수에 따르면 조선 쪽에도 통고 수속상의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한 압력에 방곡령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방곡을 시행한 지방관을 해임하고 배상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 신문이 “독립국이 국내에 방곡령을 발포하는 것은 결코 문책할 일이 아니며” 러시아도 흉작으로 곡물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일본 상인들의 배상 요구에 대해서도 외무성의 방곡령 사건 담당 이시이는 “조선은 국내에 방곡령을 발할 권리가 있으므로, 이에 따라 생기는 손해는 법률상 자연의 결과로 이는 배상의 책임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상은 이루어졌다.

방곡령 때는 조약에 명기된 권리를 지키지 못한 것인데, 한미 FTA 1차 협상에서 합의한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는 아예 퍼주기로 작심을 하고 그렇게 협상(?)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IMF 사태가 7개 분야에서 터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제2의 한일합방이 이뤄지는 꼴이라고 말한다. 후보 시절 “반미면 좀 어때?”를 외치던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경이 되었을까?

IMF 사태는 위기였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은 이를 개혁의 기회로 보지 않고, 위기 탈출만 모색해 신용카드 남발 등 인위적 경기 부양을 통해 조기 졸업을 선언했다. IMF 위기를 불러온 재벌과 관료는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무기를 통해 시장만능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의 전도사로 부활했다. 김대중 정권이 위기 상황에서 강요받은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 든든한 뿌리를 내렸고, 노무현 정권이 반환점을 돌면서 정권 내에서 부족한 대로 균형을 잡아주던 인물들이 사라진 뒤 드디어 노무현을 지배하면서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다. IMF와 탄핵 사태라는 두 차례의 진정한 개혁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보낸 한국 사회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 ‘낯선 식민지’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김대중이 IMF 사태라는 개혁 기회를 날렸다 하더라도, 그는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고, 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토양을 일궈냈다. 그러면 노무현 정권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6·15 공동선언의 성과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손발을 묶고, 앞장서서 이라크에 파병하고, 그리고 한미 FTA에 올인하고 있다. 김대중은 누가 뭐라고 해도 6·15 공동선언을 만든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가 IMF 사태 직후의 기회를 상실한 것은 참 아깝지만 다음 주자가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문제다.

그가 과거청산의 법정에 나오지 않기를…

노무현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 그가 남은 임기 중에 사회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요, 하루아침에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노무현의 남은 임기 중에 그가 모든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 ‘대연정’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요, 지역 감정이 해소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대학입시 문제가 해결되거나 부동산 문제가 잡힐까?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역사를 다시금 ‘낯선 식민지’로 이끌어간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나는 노무현이 과거 청산을 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남길 수 있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리고 요즘 신자유주의식으로 이야기하면 노무현이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가 바로 과거 청산 아니겠는가? 과거 청산 작업에 누구보다 깊숙이 발을 담그고 느낀 것이지만, 아무리 과거 청산을 잘한다 해도 처음부터 청산 대상이 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에는 새까맣게 미치지 못한다. 노무현이 과거 청산을 잘한 대통령으로 남아야지, 한미 FTA가 이대로 실현되면 우리 후손이 반드시 열 과거 청산의 어두운 법정에 그가 주범으로 불려나오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다. 정말 싫다.

출처 : http://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6/07/0210750002006072606200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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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노무현보다 나은 이유

무작정 열어젖히면 된다는 한미 FTA 추진파의 ‘쇄국망국론’에 답한다 … 개화파의 대표격인 김옥균이 왜 대원군을 구하려 했는지 생각해보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미 FTA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정부를 비롯해 한미 FTA에 목을 건 사람들이 즐겨 내세우는 주장이 쇄국론이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고 ‘쇄국망국론’을 폈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지난 6월12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대원군의 쇄국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실제 잘 몰랐다”면서 “과단성 있는 쇄신정치가 통쾌하게만 보였지, 그것이 우리를 망치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정치를 한창 할 때까지 그 점에 대해서 판단이 잘 없었다”며 역사의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개화는 자주요 독립이었다

진보 진영의 많은 논객들은 한미 FTA 반대론을 쇄국론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수준 이하’의 주장이라며 제쳐두고 지나간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역사 공부가 업이고, 또 이 뜬금없는 쇄국망국론이 일반인에게 나름대로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노무현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가 현재 반FTA의 선봉에 서 있는 정태인은 한미 FTA 반대론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이완용이나 박제순에 비유하는 건 “아무리 봐도 지나친 감이 있다”며, “특히 노 대통령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개혁 의지를 생각해보면 김옥균에 비유해야 더 잘 어울린다”고까지 주장한다.


△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잘한 거냐고 굳이 묻는다면, 지금처럼 대책 없이 문 열어주는 것보다는 백번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심술이 나서일까? (사진/ 한겨레)

21세기의 벽두를 살아가는 ‘개화파’들은 한미 FTA에 반대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쇄국정책을 편 수구파로 몰고 있다. 그런데 당시 개화파의 대표 격인 김옥균이 정작 쇄국정책의 집행자인 대원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에는 좀더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1884년 김옥균 일파가 궁정 쿠데타인 갑신정변을 감행했을 때 그들이 내건 14개조의 정강에서 제1항은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었다. 당시의 복잡한 상황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시해온 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대표 격인 최익현의 탄핵을 받고 1873년 물러나게 되고,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씨를 중심으로 한 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대외통상을 위한 단서가 열리게 되었고, 마침내 1876년 강제적인 문호 개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개항 이후의 정치적·경제적·심리적 동요와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속에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은 근 10년 만에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대원군의 복귀는 조선의 문호를 군사력을 동원해 억지로 열어젖힌 일본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일본은 출병을 준비했다. 일본의 출병 소동에 자극을 받은 청은 선수를 쳐서 “종주국으로서 속방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조선왕조 개창 이래 500년 가까이 지속돼온 ‘조공(朝貢)’ 체제에서 중국이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청군은 민씨 정권 요인들의 요청에 따라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납치해 중국으로 끌고 갔다.

일본 쪽의 한 기록(<복택유길전>(福澤諭吉傳))에 의하면 김옥균은 “개인적으로는 대원군과 원수에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조선 자주의 권(權)이 이미 상실되었다고 비통함을 금치 못하였으며, 죽음으로써 자국의 자주권을 회복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쇄국의 화신 대원군이 제거되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김옥균 일파가 대원군 납치에 격분해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표리부동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들로 생각했다. 김옥균은 개화에 목숨을 걸었지만, 그들에게 개화란 단순히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라 자주요 독립이었다. 그러니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개화를 내세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뱃속이 맞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이념에 따라 일렬로 세운다면 오른쪽 맨 끝에서 기준 잡으실 백범 김구가 끝내 세계 반공의 대부 미국으로부터 배척받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김옥균이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이광린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김옥균 등은 “대원군이야말로 쇄국에 대한 생각만 바꾸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옥균 등을 키워낸 박규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고종의 리더십에 실망한 박규수는 고종이 군주로서의 리더십을 키우는 것보다는 쇄국과 개화에 대한 대원군의 견해를 바꾸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울 때의 평양감사가 바로 박규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박규수는 쇄국정책에서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그의 사랑방은 개화파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했다. 개화파들의 고뇌가 잘 들어나 있는 <근세조선정감>에도 대원군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쇄국이 가능하기도 했지만, 대원군이 아니면, 즉 대원군 같은 과단성이 없다면 뒤에 쇄국에서 개화로 나아가기를 바랄 수 없다고 쓰여있다. 어쩌면 김옥균 자신이 직접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흥선대원군략전>은 대원군의 군제개혁과 군비확충 등 국방개혁을 높이 평가했다.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한미 FTA 추진론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는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문 걸어잠그고 있으면 잘될 수 없다. 그런데 금방 들어먹지는 않는다.


△ 고종보다 흥선대원군이 낫다고 생각한 김옥균에게 개화는 자주요 독립이었다. 김옥균의 암살 장면을 그린 그림.(사진/ 한겨레)

개방하고 교류한 나라 중에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렇게 열면 금방 쫄딱 망한다는 점이다. 김옥균이 오죽하면 대원군을 업으려 했겠는가? 김옥균은 민씨 정권을 사대수구당으로 몰아붙였지만, 김윤식·어윤중 등 청의 개입과 대원군의 납치를 요청한 인물들은 온건개화파 내지는 대외통상파였다. 이들이 주장한 ‘동도서기’(東道西器)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제 이들 방식으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하려면 서구의 과학기술이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를 같이 만들어야 했다. 과학기술자들이 천시받는 사회, 엘리트의 절대 다수가 ‘공자 왈 맹자 왈’을 외어야 하는 사회에서 기계 몇 점 들여온다고 ‘서기’가 잘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문은 열었으되 시간은 그렇게 흘러버린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의 어떤 사고방식과 물적 토대를 갖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쇄국을 하는 동안 일본은 난학(蘭學)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서 메이지유신이 가능했는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이 집권하기까지 사용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언사는 대원군의 척화비나 위정척사파의 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중국의 신사(紳士), 조선의 양반(兩班)에 비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전통사회의 엘리트였지만, 중국의 신사나 조선의 양반과는 달리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다. 생각을 바꿨을 때 자기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기득권이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을 타파했다.

대원군이 정권을 실각한 것은 1873년으로, 1867년의 메이지유신과 시간상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마감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에서부터, 또는 1876년의 개항으로부터 나라를 일본에 완전히 빼앗기는 1910년까지는 한 세대가 넘는 기간으로 한 학기 강의를 해도 다 끝내지 못할 만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 시기였다. 갑신정변도 있고, 동학농민운동도 있고, 갑오개혁도 있고, 독립협회도 있고, 의병전쟁도 있고, 광무개혁도 있고, 애국계몽운동도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 대신 땜빵으로 일관한 민씨 정권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팔아 잡수신 친일파들도 있었다. 요컨대 대원군 한 사람에게 쇄국이란 이름으로 ‘독박’ 씌워도 될 만큼 역사란 게 간단치는 않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잘한 거냐고 굳이 묻는다면, 지금처럼 대책 없이 문 열어주는 것보다는 백번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심술이 나서일까?

정태인의 글을 보니 정부 쪽 사람들 중에 정말 엉뚱하게 “신미양요 때 미국과 잘 협상했더라면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버젓이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정태인은 앞서 얘기한 대로 노무현 대통령을 김옥균에 비교하면서 한미 FTA 반대론자들은 동학혁명군에 가까운 느낌이라며, 기왕에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려면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같은 좀 멋진 그림을 꿈꾸지 하필이면 신미양요 타령이냐고 꾸짖은 바 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다. 왜냐하면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은 만나지 못했어도, 노무현과 젊은 영화인들은 2002년 대통령 선거와 2004년에 이미 뜨겁게 만났었는데, 2006년에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대치하고 있다. 어디 영화인뿐인가!

교훈 얻으려면 방곡령 사건을 보라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또는 김옥균과 대원군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아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더니, 21세기의 벽두에는 참으로 고약하고 괴이한 결합이 ‘낯선 식민지’(한미 FTA 반대론의 기수 이해영 교수의 책 제목이다)를 불러오고 있다. 김옥균이 대원군에게서 가장 높이 산 것은 역시 과단성이었을 것이다.


△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사무라이들의 사고방식과 물적 토대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아야 한다. 1872년에 찍은 메이지 일왕의 사진.(사진/ 한겨레)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 마땅히 책임을 지고 개혁됐어야 할 관료집단과 재벌들이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살아남아 노무현을 등에 업고 정신없이 한미 FTA를 몰아붙이고 있다. 19세기 말의 개국론자 김옥균은 대원군의 과단성을 사서 자주 독립을 강화할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21세기의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무현의 화끈함을 사서 ‘낯선 식민지’로 우리를 몰아간다.

한미 FTA의 문제점이야 내가 여기서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꼭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다. 미국인(또는 법인) 투자자가 한국의 공공정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인데, 이런 이의를 한국의 사법기구에 제기하는 것이라면야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한미 FTA가 이루어지면 “미국 투자자가 한국의 사법심사 절차 대신, 한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국제중재기관(Tribunal)에 회부할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변에 따르면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의 중앙정부, 국회,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미국인 투자자의 투자 활동에 영향을 미칠 공공정책의 경우, 미국 투자자의 국제 중재 회부에 따라, 한국의 행정부와 입법부는 한국의 사법심사를 통해 그 정책의 적법성을 확인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며, “한국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그 정책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권한을 상실하는 것”이다. 미국이 멕시코와 캐나다 등과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11조에서 이미 현실로 나타나는 문제다.

정부 쪽 사람들이 정말 한미 FTA와 관련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엉뚱하게 쇄국-개화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방곡령 사건을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청일전쟁 전야인 1889년부터 1893년까지 조선의 외무대신 격인 독판교섭통상사무(督判交涉通商事務)를 3번, 주한 일본공사를 3번 갈아치운 사건으로, 투자자-국가소송 제도와 관련해서 심각한 교훈을 준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한국을 식량 공급지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쌀과 콩 등 미곡의 일본으로의 유출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국내의 미곡 부족과 그에 따른 곡가 상승, 국내 유통시장의 붕괴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3년 7월 ‘조일 통상장정’(1876년 체결)을 개정해 일정 지역에서 곡물의 유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여 법적 근거를 마련했는데, 유일한 단서 조항은 조선 정부 또는 지방관이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사전 예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고이지 외국의 동의를 요하는 사항은 아니었다.

IMF와 탄핵, 개혁 기회를 날리다

방곡령은 1884년부터 1904년까지 모두 100여 회 단행됐는데, 그중 가장 말썽이 난 것이 1889년 함경감사 조병식이 선포한 방곡령이었다. 조병식은 단순한 지방관이 아니고, 함경감사로 부임하기 이전에 독판교섭통상사무(외무대신)을 지낸 인물로서 독판 재임 당시 경상도 지방의 방곡령 사건을 처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 김대중 정권이 위기 상황에서 강요받은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 든든한 뿌리를 내렸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한 캉드쉬 전 IMF 총재. (사진/ 한겨레)

그는 1889년 10월 관내의 식량 부족을 이유로 방곡령을 준비하면서 통상장정 37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시행 1개월 전에 외국공사관에 통보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통리아문 쪽의 실수로 조병식이 예정한 10월24일 1개월 전에 통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통리아문은 일방적으로 시행일을 1개월 늦춰 11월22일 이후로 하여 일본 쪽에 통보했는데, 정작 이 사실을 함경도의 조병식에게는 통보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조병식은 예정대로 10월24일부터 일본 상인들의 곡물 매매와 운반을 금지했다. 일본은 조병식의 ‘죄’를 물어 면직시킬 것을 요구했고, 민씨 정권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조병식을 3개월 감봉에 처했다가 결국 강원감사로 좌천성 인사를 단행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배상을 요구했고, 조선 정부는 일본 상인들이 곡물 투기에서 입은 손실과 미래의 수익까지 포함된 배상 요구에 굴복했다.

방곡령은 조선 정부의 주권에 관한 문제였다. 배상 문제가 제기된 조병식의 방곡령 등 4건의 사례는 김경태 교수에 따르면 조선 쪽에도 통고 수속상의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한 압력에 방곡령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방곡을 시행한 지방관을 해임하고 배상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 신문이 “독립국이 국내에 방곡령을 발포하는 것은 결코 문책할 일이 아니며” 러시아도 흉작으로 곡물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일본 상인들의 배상 요구에 대해서도 외무성의 방곡령 사건 담당 이시이는 “조선은 국내에 방곡령을 발할 권리가 있으므로, 이에 따라 생기는 손해는 법률상 자연의 결과로 이는 배상의 책임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상은 이루어졌다.

방곡령 때는 조약에 명기된 권리를 지키지 못한 것인데, 한미 FTA 1차 협상에서 합의한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는 아예 퍼주기로 작심을 하고 그렇게 협상(?)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IMF 사태가 7개 분야에서 터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제2의 한일합방이 이뤄지는 꼴이라고 말한다. 후보 시절 “반미면 좀 어때?”를 외치던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경이 되었을까?

IMF 사태는 위기였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은 이를 개혁의 기회로 보지 않고, 위기 탈출만 모색해 신용카드 남발 등 인위적 경기 부양을 통해 조기 졸업을 선언했다. IMF 위기를 불러온 재벌과 관료는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무기를 통해 시장만능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의 전도사로 부활했다. 김대중 정권이 위기 상황에서 강요받은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 든든한 뿌리를 내렸고, 노무현 정권이 반환점을 돌면서 정권 내에서 부족한 대로 균형을 잡아주던 인물들이 사라진 뒤 드디어 노무현을 지배하면서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다. IMF와 탄핵 사태라는 두 차례의 진정한 개혁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보낸 한국 사회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 ‘낯선 식민지’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김대중이 IMF 사태라는 개혁 기회를 날렸다 하더라도, 그는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고, 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토양을 일궈냈다. 그러면 노무현 정권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6·15 공동선언의 성과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손발을 묶고, 앞장서서 이라크에 파병하고, 그리고 한미 FTA에 올인하고 있다. 김대중은 누가 뭐라고 해도 6·15 공동선언을 만든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가 IMF 사태 직후의 기회를 상실한 것은 참 아깝지만 다음 주자가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문제다.

그가 과거청산의 법정에 나오지 않기를…

노무현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 그가 남은 임기 중에 사회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요, 하루아침에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노무현의 남은 임기 중에 그가 모든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 ‘대연정’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요, 지역 감정이 해소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대학입시 문제가 해결되거나 부동산 문제가 잡힐까?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역사를 다시금 ‘낯선 식민지’로 이끌어간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나는 노무현이 과거 청산을 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남길 수 있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리고 요즘 신자유주의식으로 이야기하면 노무현이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가 바로 과거 청산 아니겠는가? 과거 청산 작업에 누구보다 깊숙이 발을 담그고 느낀 것이지만, 아무리 과거 청산을 잘한다 해도 처음부터 청산 대상이 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에는 새까맣게 미치지 못한다. 노무현이 과거 청산을 잘한 대통령으로 남아야지, 한미 FTA가 이대로 실현되면 우리 후손이 반드시 열 과거 청산의 어두운 법정에 그가 주범으로 불려나오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다. 정말 싫다.

출처 : http://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6/07/0210750002006072606200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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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펌] 강풀 - FTA를 말한다.

우와!  이젠 강풀도 FTA를 말하네요! 
원래 하던 연재를 중단하고 FTA 만화를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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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1' 백지영, 더 뻔뻔해져라
[조은미의 비틀어뷰] 세태 변화로 재기에 성공했다고? 웃기지 마라
텍스트만보기   조은미(cool) 기자   
ⓒ 워너뮤직 코리아
백지영이 6년만에 다시 떴다. 그 유명한 비디오 사건 이후 6년 만이다. '사랑 안 해' 노래가 떴다. 지난 4일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 톱 됐다. 온라인 음악 사이트 벅스에서도 톱 됐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떴지? 사람들 성의식이 변해서? 한 일간지 말마따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 여자 연예인의 몰카 비디오에 이제 우리 사회도 관대해진 방증?

천만에다. 다 웃긴 이야기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무슨 얼어죽을 패러다임이냐? 남자들 성의식이 여자에게 관대해질 때는 같이 자고 싶은 여자를 만났을 때뿐이다. 같이 자려니 여자의 성의식에 관대해야지 별 수 있나?

하지만 그 때뿐이다. 일반 여자 이야기엔 다르다. 얼른 공자 찾고 말세 찾고, 여성의 문란한 성의식을 개탄한다. 한 손으론 '야동'을 내려받고, 다른 손으론 여자들을 손가락질한다. 그게 대한민국 평균 남자다. 그게 아니면? 평균이 아니겠지.

변한 건 남자나 사회적 시각이 아니다. 시간이다. 기억이다. 6년이 흘러서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시간이, 뇌세포를 죽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흐릿해진다.

백지영의 노래는 좋았다, 그래서 떴다

백지영이 다시 뜬 건? 간단하다. 이번 노래가 좋았기 때문이다. 노래 좋아할 때, 그 노래 부른 가수의 인간성, 노래가 주는 사회적 의미 따진 뒤에 좋아하나? 좋아할지 말지 고민하고 심사숙고 뒤에 좋아하나? 그렇게 노래 듣는 사람 있다면 소개시켜 달라. 음악평론 글 좀 부탁하게.

노래는 노래다. 들어서 좋으면 좋은 거다. 그게 왜 좋냐? 그거야 알 수 없다. "나는 왜 사랑하는가?" 인류 역사가 이걸 파헤치는데 수억년 쏟아부었다. 하지만 아직 답이 없다. 이 '필'이 감성의 문제지 이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지영이 그 때 그 뒤로 6년 아니라 60년이 흘렀어봐라. 노래가 꽝이었다면 재기는 없었다. 제기랄만 뇌까리다 갔을 거다. 그런데? 노래가 좋았다. 가수가 가수로 성공하는 데 딴 거 없다. 노래가 좋으면 장땡이다.

"탁월함은 모든 차별을 압도한다." 흑인 여성으로 온갖 차별과 고통을 딛고 성공한 오프라 윈프리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바꾸면 이렇게 된다. "노래가 좋으면 딴 소릴 압도한다."

"옛날에 지영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지금 백지영 좋다는 팬들은? 과거 백지영의 섹시함에 눈 벌겋던 아저씨들이 아니다. 대개 10대다. 왜냐? 지금 가요 시장은 10대의 세계다.

백지영이 음악 사이트 벅스에서 정상을 물리쳤다고 하는 가수가 누군가? SG워너비다. 백지영의 '사랑 안 해'가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 톱에 뽑혔을 때, 후보는 SG워너비, 버즈, 토니 안, 신화, 거미였다. 10대 가수다. 10대가 좋아하는 가수다. SG워너비 노래가 뭔지 아는 30대? 별로 없다. 가요 음반 사는 30대? 천연기념물이다. 그래도 샀다면? 조카 선물이다.

백지영 좋다는 팬들만 봐도 그렇다. '백지영' 혹은 '백지영씨'라 부르는 팬? 없다. 대개 '지영 언니' '지영누나'다.

포털 사이트에서 '백지영' 눌러봐도 안다. "옛날에 백지영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이런 거 묻는 애들이 줄을 잇는다. "제가 초등학교 3·4학년 때 언니 좋아했거든요." 이런 말하는 10대들이 지금 백지영 팬이다. 그들이 11살 무렵 일어난 일이다.

그 때 백지영 사건은 '18금' 사건이었다. 미성년자 관심 불가 사건이었다. 관심 있어도 시청이 불가능했다. 인터넷에 널리 퍼진 동영상에 접근이 쉬웠던 초등학생이 얼마나 있었겠나? 이들이 지금 음악을 듣는 세대가 됐다. 소비하는 세대가 됐다.

이제 문제는 노래다. 사건이 아니라 노래다. 더구나 이들은 10대다. 쿨하다는 세대다. 성의식엔 더욱 쿨한 세대다. '노래가 좋으면 됐지, 무슨 상관이삼?' 이러고도 남을 세대다. 원래 늙을수록 과거에 집착한다. 사생활에 집착한다.

노래만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었다

ⓒ 워너뮤직 코리아
그럼 노래가 좋아서, 10대가 좋아해서, 그게 다인가? 천만에다. 그건 그냥 조건이다. 그 조건을 만든 건 바로 백지영이다. 패가 바뀌었다고 그만두거나 판을 엎지 않고, 계속 노래한 그녀다.

2000년 톱스타이던 그녀는 하루아침에 추락했다. TV에서 퇴출당했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다. 지나가던 미친개에게 물렸는데, 네 탓이란 격이다. 황당했겠다.

그래도 꿋꿋이 2001년 내놓은 3집 앨범? 안 됐다. 2년 만에 다시 만든 2003년 4집 앨범? 역시 안 됐다. 이번 5집 앨범 나오는 데는 3년이 걸렸다. 한 번은 만들다 엎어졌다. 그게 이번 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음반 내는 게 갈수록 어려워졌으리란 거. 이번 음반이 실패했으면? 또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렸을까? 안 봐도 비디오다.

어쨌든 백지영은 계속했다. 가수이길 그만두지 않았다. 배우나 마누라나 여하튼 뭔가로 전업하지도 않았다. 잘 했다. 누드도 안 찍었다. 잘 했다. 계속 노래로 도전했다. 미쳤다. 쓰러져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다. 노래했다. 어떤 욕설에도 굽히지 않았다.

최근 영화 <밴디다스>를 보고 백지영이 그랬단다. "예쁜 여자가 착하다는 편견을 깨주는 영화인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든다" <밴디다스>는 총든 여자들 이야기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만들며 사는 여자들 이야기다.

남 이야기 같지 않겠다. 그녀야말로 사람들의 편견과 온몸으로 싸우고 살아남았으니까. 그녀야말로 온 몸으로 배웠을 거다. 그녀의 일, 그녀의 노래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으리란 걸.

도망치지 않은 백지영, 잘 했다

백지영이 잘한 건 그거다. 추잡한 시선과 싸운 거다. 그녀는 거기에 주저앉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스캔들만 터지면 여자 연예인들이 외국으로 도피하고 어딘가로 사라져 나오지 않을 때, 백지영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계속 노래했다. 계속 도전했다. 그게 용기다. 끈기다. 도전 없이는 비전도 없다. 도전 없이는 도약도 없다. 백지영이 알려준 건 그거다. 도전하라.

백지영이 다시 뜬 건, 우연이 아니다. 바뀐 세태에 무임승차한 게 아니다. 그녀가 한 거다. 그녀가 뼈빠지게 일해 얻은 티켓이다. 백지영을 구원한 건 남이 아니다. 남자도 아니다. 자기 자신이다. 일이다. 바로 노래다.

백지영은 말해준다. 뻔뻔해져라. 남의 눈으로 나를 죽이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야망을 가져라. 꿈 앞에 착해지지 마라. 착한 척 하느라, 자신을 포기하지 마라. 실력으로 승부하라. 그리고 그녀는 했다. 잘했다! 백지영. 더 잘해라. 백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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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영씨 응원가가 들리지 않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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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2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 안 해,, 괜찮던걸요.. 한길로 매진, 실력으로 승부.. 담아갑니다.

물만두 2006-06-2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뻔함만이 세상에서 무기가 된다는 게 참... 우리 의식이 덜 성숙했다는 의미같기도 하고 또 나아진 것도 같고 하지만 백지영이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타지마할 2006-06-23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그런가요. 제가 통 가요는 듣지 않으니. 그래도 연예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 보이니까 대충 예상만 했죠.
물만두님/ 저도 백지영이 대단하다는 점에 100% 동의합니다. 결국은 좀 웃기지만 세월이 약인 것이지요. 밑의 관련 기사는 이 글을 보고 백지영 측의 반응에 대한 것입니다. 같이 한 번 보시죠.

로드무비 2006-06-2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사랑 안해' 한 번 들어보고 싶군요. 제목도 좋은데요?^^

물만두 2006-06-24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지마할님 전 그게 기사 원문인줄 알고... 아마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거 같아요.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백지영이 상품이길 바라는것 같습니다. 재포장했는데 뭐 그런 느낌이네요. 그쪽 반응은... 하지만 다시 한번 곤두박질치면 재기할 수 없다는 공포가 더 컸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까지 백지영에 대해 말들, 예전일에 대해 말들이 많고 특히 남자들 시선은 아직도 곱지 않더군요. 다른쪽 댓글에도 이상하게 쓴 네티즌도 많구요...
 
 전출처 : 로쟈 > 인문학도에게 자연과학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

내일 아침 신문들을 검색해보다가 '서울대 2008 논술 예시문항'이라는 타이틀이 눈에 띄었다. 예시문항 중 "인문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자연과학의 지식이 필요한가에 대해 그 이유를 들어 논술하시오"란 문제가 그래도 흥미를 끌어서 잠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제시문의 출처자 진 캐리의 <지식의 원전>이라고. 개인적으론 박사과정 수료 후에 몇 년간 중고생들에게 논술을 지도해본 경험이 있는데, 아직도 '가락'이 남아있는지 확인도 해볼 겸.

 

 

  

 

-과학이 무신론이고 윤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는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는 ‘문화인’들 사이에서 과학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채질하곤 했다. 이 두 가지 반감의 원인이 타당한 것인지는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과학자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신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찾으려 할 수도 있다. 무신론자들에게는 이것이 지루한 과학과 극단적 기독교의 만남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같이 저명한 과학자가 분자구조를 이용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것을 비웃을 수는 없다(*물론 모든 과학자가 무신론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는 과학자는 많지 않다).

 

 

 



-물론 과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도 많이 있다. 동물학자인 도킨스는, 모든 종교는 무한히 복제되는 정신적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문화적 밈의 일종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확고한 유신론자들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과학적 발견 역시 신에 의해 계획된 것을 발견한 것이므로 종교적 지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학의 본질을 무조건 비종교적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과학자나 종교학자가 모두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신학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한다고도 할 수 있다(*그래서 신학이 포퍼 등이 말하는 '반증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는지?). 과학이 물리적 우주에 관한 진리를 찾는 것이라면, 신학은 신에 관한 진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이나 혹은 어느 정도 신학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고 우주를 통해 신과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신과 우주가 근본적으로는 뚜렷이 구분되는 대상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과 종교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경심리학자인 리처드 그레고리는 ‘과학이 전통적인 믿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반대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변화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종교개혁운동은 전통적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과학은 증거에 의존하는 반면 종교는 계시된 사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들 간에 극복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인들에게는 계시된 사실이 바로 증거이다. 지속적으로 신에 관한 증거들에 대해 회의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신학을 과학이라고 간주하더라도 결코 모순은 아니다. 사실 그것을 신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과학적 연구가 몇몇 과학자를 신에게 인도했던 것처럼, 신학연구가 그 신학자를 무신론자로 만들지 않을 이유는 없다(*하지만, 그때의 무신론자를 우리는 여전히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과학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이다. 과학은 지식의 범주에 있지만, 정치는 견해의 범주에 속한다(*견해/의견의 영역으로서의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는 얘기이다. 한데, '신학정치론'은?). 정치는 좋아하느냐 마느냐를 문제 삼는 분야로, 단지 말잔치를 통해 진리의 위치로 상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정치는 인물과 웅변술에 의존하고, 사회계층과 인종, 그리고 민족을 핵심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과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정치는 갈등을 기반으로 존재하고 적대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립구도가 와해된다면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즉 완벽한 의견일치를 보이는 세상에서는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따라서 전체주의에는 정치가 부재한다. 정치는 '민주주의'를 범형으로 갖고 있기에).



-반면에 과학은 대립이 아닌 상호 협조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물론 과학사는 지독한 논쟁과 고뇌, 그리고 반대이론의 파괴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의견일치에 도달하면 과학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한다(*종교 또한 그러한가?). 또 다른 핵심적인 차이로 정치는 인간을 구속하려 든다는 점이다. 정치의 주된 관심은 권력의 집행에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전쟁, 학살, 테러 등)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 가끔 실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열역학 제2법칙과 같은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전쟁까지야 불사하지 않겠지만 테러 정도라면?)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정반대 의미의 과학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실제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 실제로는 다른 모든 것처럼 과학도 정치에 의해 유린되고 왜곡되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과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정치의 책임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학의 비정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과학이 초윤리적(超倫理的)이라는 비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읽다 보니까 아주 나이브한 견해이다. 과학적 탐구 자체는 비정치적일지 모르지만, 과학자는 지극히 정치적이지 않은가? 한편, 과학이 초윤리적인 만큼 종교 또한 초윤리적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과학의 초윤리성을 과학의 문제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과 순수성으로 인식해야 한다.

-한편, 정치는 윤리로부터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정치는 창자 속의 촌충처럼 윤리성 혹은 개념의 선악을 규정함으로써 발전해간다. 따라서 과학이 초윤리적이지 않고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이 또한 정치에 대한 한 가지 견해, 혹은 편견 아닌가? 정치에서 문제되는 것은 도덕적/윤리적 알리바이이지, 도덕/윤리 자체가 아니다. 정치는 마키아벨리즘의 영역이다).

 

 

 



-윤리적인 용어로 냉정하고 논리적이며 비인간적인 인생의 접근방식을 종종 ‘과학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과학적 방법을 윤리적 관점으로 단순히 연결시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은 그것이 냉정한 것이든 아니든 윤리적 관점과의 연결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동일한 과학적 명제들이 매우 상반되는 윤리적 평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가령 인간을 원숭이와 관련짓는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격하시키는 것처럼 비추어졌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브루스 프레데릭 커밍스는 이 진화론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요컨대, 과학자도 춤을 춘다는 것. 한데, 작가 카잔차키스는 진화론 때문에 가출했다).



 

 

-나로서는 내가 다른 동물들과 가까운 친족관계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나의 유인원 조상들을 선망하며, 그들이 자랑스럽다. 내가 한때는 숲 속에 사는 무수히 많은 털을 가진 유인원이었으며, 바다의 한천류로부터 활유어, 물고기, 공룡, 그리고 원숭이를 거치는 지질학적 시간대를 통해 지금의 내 틀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누가 이런 생각을 에덴동산에서 어슬렁대는 한 쌍의 남녀와 바꾸려 들까?(*과학고 신학은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어디로 갔는가?)



 

 

-과학자 개개인은 연구를 추구하는 윤리적 혹은 초윤리적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이 그들의 발견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그 발견이 발견자의 동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옳은 것이 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신학/종교 또한 그러한가?). 데이비드 보다니스처럼 파스퇴르의 대중을 혐오하는 성향과 그가 밝혀낸 질병과 박테리아 사이에 어떤 관련성을 찾으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스퇴르가 밝혀낸 사실의 과학적 신뢰성은 인간을 불신하는 그의 성향으로 인해 강화되지도 혹은 약화되지도 않는다.



 

 

 

-이처럼 과학이 윤리나 종교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왜 독자들이 구태여 과학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은 과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지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지식에의 의지는 우리를 과학으로 이끈다?). 이에 대한 반대는 무지일 뿐이다. 콜리지는 이러한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최초의 과학자는 관찰대상이 그에게 식량이나 피신처, 무기, 도구, 장신구, 또는 장난감을 제공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안다는 것의 희열을 찾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었다(*아르키메데스 이후에 스트리킹한 사례를 더 들어보지 못했다. 그 많던 희열은 다 어디로 갔는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된 무지의 크기도 커졌다(*'부정적 발견의 시대'라는 표현은 이러한 무지의 확대도 내포한다. 종교니 윤리니 들먹이지 말고 차라이 이 문제에 더 집중하는 게 좋을 뻔했다). 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만 교육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20세기 후반의 현대적 지식 대부분에서 몽매한 암흑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무지의 추방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역사상 처음으로 새로운 형태의 무지한 지식층이 생겨난 것이다(*필자가 빼먹고 있는 지적은 섹션화되어 있는 과학 또한 이러한 무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층 중에서 그래도 나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통렬히 후회하는 사람들이다. 20세기 미국의 뛰어난 문학비평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라이오넬 트릴링은 ‘근대사의 특징적 성취라고 불리는 상상적 형태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지적 자기만족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탄식했다(*트릴링의 책은 번역된 책이 한권도 없는 것인가? 참고로 평론가 유종호 선생의 학위논문이 트릴링의 소설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좀더 최근에는 과학에 대한 무지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기도 했는데, 과학을 지구 오염의 주범으로 몰아세운 녹색운동이 이러한 부분에 기여하였다. 또한 과학을 남성중심적 권력의지의 발현으로 몰아세우는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이다(*필자의 비판은 '다른 과학'에 대한 주장인 듯하다).

-이러한 비난을 제기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학을 포기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과학이 정치에 의해 잘못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공해문제의 해결은 과학적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환경문제의 해결도, 성차별의 문제도 '과학적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 가장 기본적 레벨에서조차 위험에 처한 식물이나 동물을 조사하고 보호하며 보존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과학적 노력에 의해서 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흔하게 하는 말이지만, 과학은 목적합리성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는가?).

 

 

 



-과학이 남성의 목적이나 태도에 의해 지배된다고 불평하는 페미니스트들도 여성의 과학에 대한 무지와 배타적 성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과학교육과 연구 분야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 것이다(*이러한 판단은 '과학적 판단'인가?). 이러한 관점은 가장 강경한 여권운동가 중 한 사람인 에블린 팍스 켈러의 저서 <성과 과학에 관한 고찰>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녀는 수리생체물리학자였고, 노벨상을 수상한 유전학자인 바버라 맥클린톡의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켈러는 과학적 지식이 ‘남성적 발현의 결과’라는 식의 파괴적인 표현을 쓰기 보다는 오히려 이상적인 ‘공동의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등 과학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힘을 더해준 책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이다. 이 책으로 인해 이성적이어야 할 과학자들이 실제로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며 문화적 조류에 따라 흔들리고 객관적 진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유에 의해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생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 확신을 얻게 되는 과정에 관한 쿤의 설명은 그 개념에 대한 진위 여부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대개의 과학자들은 쿤의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을 평가절하하는 이러한 다양한 움직임들은 무지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미화하기까지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국의 대학교수들은 대부분의 문학이나 예술계 학생들이 그들의 학창시절에 배운 미미한 과학적 지식마저도 쉽사리 잊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최근 옥스퍼드 대학의 한 문학 세미나에서 나는 존 던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그가 이 시를 쓴 1612년에는 아무도 피가 어떻게 심실에서 다른 심실로 이동하는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세미나에서 학생들이게 실제로 피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곳에는 학위과정의 막바지에 와 있는 30여명의 매우 지적인 학생들이 앉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바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학생만이 머뭇거리며 일어나 삼투현상 때문일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피가 몸속을 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두 문화' 문제의 반복적인 제기이다).

-매년 영국의 대학에서 문예 분야의 강좌를 듣기 위해 몰려드는 엄청난 수의 수강신청자에 비해 미미한 숫자의 과학계 강의 수강신청자들을 보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과학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러한 점은 고쳐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문예 분야가 쉽기 때문에 더 인기가 있으며 문예계열의 학생들은 과학계 강좌에서 요구하는 지적 수준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다(*일부 대학은 문예계열 학생들에게도 자연과학도와 똑같이 과학과목을 이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문제는 각 대학이 가진 커리큘럼이며, '과학적 지식'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우이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피터 메다워 경의 생각을 한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메더워는 1953년 크릭, 윌킨스, 프랭클린과 함께 DNA의 분자구조를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명한 젊은 과학자 제임스 D. 왓슨의 경력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왓슨과 같은 재능 있고 천재성을 가진 학생들이 문예계열의 연구에 치중되어 있었던 것 같다. 분자생물학의 첫 세대가 활동하던 1950년대에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문학부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다. 그들은 왓슨 수준에 버금가는 젊은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총명하고 창조적이며 똑똑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왓슨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똑똑하면서도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를 아는 현명함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지식을 탐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과학자들만의 장점이며, 그들은 이러한 장점을 능력에 관계없이 향유하고 있다."(*왓슨은 천재적인 과학자이지만, 좋은 성격의 과학자는 아니다. '좋은 성격'이 과학자에게 필수적이지 않은 것처럼, 과학적 지식도 인문학도에게 필수적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

-똑똑하다는 것이 최고의 과학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또한 이것이 최고의 과학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더더욱 아니다. 과학적 연구에 의해 일어난 위대한 사회적 혁명 중의 하나는 배움의 민주화였다. 어느 누구나 통상의 상식과 보통수준의 상상력을 복합시킬 수만 있으면 창조적인 과학자가 될 수 있다(*같은 논리라면 어느 누구나 창조적인 시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넓힐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된다면, 그는 적어도 행복한 과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메더워의 주장, 특히 과학자들은 현명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문예계열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가 전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냐는 항의를 들어야만 했다. 한편 과학이 천재들뿐만 아니라 보통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핵심적 메시지는 바로 이 부분이다.

-영국이 경제난국에 처하지 않기 위해 과학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식의 얘기는 젊은이들을 과학 분야로 끌어들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과학이 국가경쟁력이라는 얘기도 마찬가지겠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글을 통해 메더워가 말하는 기쁨과 자기만족이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면, 많은 젊은이들이 과학계통의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행복을 위한 과학? 이게 정말로 유인이 되는 것인지? 더불어, 기쁨과 자기만족은 초과학적이다. 즉, 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니 왜 하필 과학을?).

-만약 독자들이 문학교수인 내가 무슨 생각으로 각종 지식 원전들을 한데 모으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기쁨과 자기만족을 위해, 그리고 콜리지의 말처럼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만들었다고 대답할 것이다.(*<지식의 원전>이란 편저의 서문인 듯한데, 사실 이 한 문단으로 족하다. 앞부분은 장황한, 게다가 재미없는 서두는 '무슨 생각'으로 집어넣었는지 모르겠다. 문학교수에게 문학적 자질이 요구되는 건 아니더라도 과학적 논리는 필요하다는 걸 이 '싱거운' 서문은 보여준다. 어쨌거나 인문학도에게 자연과학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기쁨과 자기만족을 위해서란다.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왜 그것뿐이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06. 06. 16.  

P.S. 논술의 요체는 한 가지이다. '말이 되게' 쓰는 것. 즉, 어(語)를 가지고 성설(成說)하는 것이 논술이다. 어불성설이 난무하는 담론의 시장에서 '성설'은 '성인(成仁)'만큼이나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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