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 子夏曰: 日知其所亡①, 月無忘②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


자하왈: 일지기소무, 월무망기소능, 가위호학야이의.

번역 - 자하가 말하기를, 날마다 그 모르는 것을 알고, 달마다 그 능한 바를 잊음이 없으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이를 수 있다.

① '其所亡'는 '其所未聞'과 통한다. 다시 말해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말한다.

② '無忘'을 일부러 '잊음이 없다'라고 번역하였는데, 만약 '잊지 않는다'라고 번역하려면 '無' 대신에 '不'이 쓰여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뜻이 통하고 번역에 문제가 없으니 그대로 이해하면 좋겠다.

集註 - 亡, 無也. 謂己之所未有 ♥ 尹氏曰: 好學者, 日新③而不失.

무, 무야. 위기지소미유 ♥ 윤씨왈: 호학자, 일신이불실.

번역 - 亡은 없음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이른다. 윤씨가 말하기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고, (이미 배운 것을) 잃지 않는다.

③ 日新而不失에서 중간에 말 이을 '而'가 있으니 앞뒤의 日新과 不失은 자동적으로 동사구로 볼 수 있다. '日新'은 무슨 구조인가? 이 경우 新이 동사이다. 그러면 당연히 앞의 日은 동사를 꾸며주는 부사어이다. 번역은 '날마다, 날로'등이 좋겠다. 또 하나 더, 이건 순전히 나 개인의 생각인데 여기에서 '新'은 원래 형용사이다. 많은 경우에 형용사에서 동사의 의미를 가질 때는 타동사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 '新'의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목적어는 당연히 '己'일 것이다. 번역도 '새로워진다'가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하다(혹은 만들다)'가 더욱 的確(적확)하지 않나 싶다. 혹자는 그게 그것이 아니냐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새로워진다'라고 번역하면 동작의 능동성이 사라지고 어딘지 피동적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자신을) 새롭게 하다(혹은 만들다)'라고 번역하면 얼마나 매끄럽고 능동적인가? 여러분! 동의하시나요? 이제 不失을 보자. 역시 '失'은 타동사이므로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失'의 목적어로는 '其所聞'이나 '已所學' 정도가 될 것이다. 한문을 포함하여 외국어를 공부하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대명사가 가리키고 있는 바와 동사의 주어, 그리고 동사의 목적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특히 한문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략이 일어나는 경우는 일부러라도 이런 훈련을 해두지 않으면 안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쉬운 문장이라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많이 길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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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 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①. 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②也.


자하왈: 수소도, 필유가관자언. 치원공니, 시이군자불위야.

번역- 비록 작은 道(기능)이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다. 먼데 이르는데 방해가 될까 두렵기 때문에 군자는 배우지 않는다.

① '焉'은 '於之'로 보아 <거기에는>의 뜻이나 문맥상 해석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② '爲'는 그대로 '하다'라고 번역해도 무난하지만 대동사로 '學'을 대신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낫겠다.

集註 - 小道, 如農圃③醫卜之屬. 泥, 不通也. ♥ 楊氏曰, 百家衆技④, 猶耳目口鼻, 皆有所明而不能相通, 非無可觀也. 致遠, 則泥矣. 故君子不爲也.

         소도, 여농포의복지속. 니, 불통야. ♥ 양씨왈, 백가중기, 유이목구비, 개유소명이불능상통, 비무가관야. 치원, 즉니의. 고군자불위야

번역 - 小道는 농사, 의학, 점술과 같은 것이다. 泥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양씨가 말하기를, 제자백가와 여러 기능은 耳目口鼻와 같아서 모두 밝은 바가 있으나 서로 통할 수 없다. 볼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먼데 이르면 방해가 된다. 따라서 군자는 배우지 않는다.

③ '農圃'를 나누지 않고 그냥 농사로 번역하였다.

④ '百家衆技'를 번역할 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百家의 衆技라고 해석하는 것이고 (편정관계) 다른 하나는 百家와 衆技로 보는 것이다(병렬관계). '技'는 원문의 '小道'의 '道'와 의미상 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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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그녀 이야기

아직까지도 주변을 둘러보면 반반한 얼굴 하나 가지고 인생을 거저 먹으려고 드는 여자들이 있다. 내가 아는 A양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꽤나 뒤돌아보던 A양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인간성도 괜찮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던 A양은 흔히 예쁜 여자가 가진 도도함이 없었기에 그야말로 파리떼 꼬이듯 갖은 부류의 남자들이 그녀 주위에 득시글거렸다.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부터 (띠동갑 정도는 우스웠다.) 유부남, 그녀보다 키가 20cm는 작은 남자. 하릴없는 백수. 이혼남 등등. 미혼인데다 나이도 어리고 예쁜 그녀에게는 그다지 어필할것 같지 못한 남자들까지 그녀를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나무라 생각하고 찍어댔다. 그래서 그녀가 택한 것은 그 남자들을 이용해서 인생을 쉽게 쉽게 사는 것이었다.  집이 가난했던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남자들에게 용돈을 받아서 썼으며 대학 등록금에 어학연수. 한동안 나와서 혼자 살때의 생활비까지 그녀의 주변을 멤돌던 모든 남자들의 도움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젊고 어렸을때나 해당되던 얘기들이었다.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그녀는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꼬이는 남자들이 줄어들었으며 그나마 저 위에 나열한. 그녀에게는 그냥 조건으로만 볼때 약간 처진다 싶던 남자들보다 더더욱 처지는 남자들만 달라붙었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 그녀는 한창때 보다 30kg이 불었으며 젊은시절 생각없이 논 댓가로 임신중절 수술을 3번이나 해서 몸도 많이 상했다. (그 수술 자체로 몸이 상한게 아니라 수술후 체질이 바뀌어서 몸이 상해버렸다.) 즉. 간단하게 말 하자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아름답지 않다. 키가 무척 큰 그녀는 살집이 붙어버리니 왠만큼 등빨 좋은 남자 저리가라로 거대한 체격이 되어버렸고 밤새워 음주 가무를 즐긴탓에 눈 밑에는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다크서클과 주름. 그리고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름답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이 골때리는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줄 왕자님이 줄을 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가 개판을 친 만큼 가혹해졌다. 빚은 산더미처럼 늘어났고 직장도 다니지 않고 있다. 거기다 그녀에게 혹해서 돈을 빌려준 남자들은 시도때도 없이 전화해서 돈을 갚으라고 닥달을 한다.(정 돈을 못 갚으면 만나달라고 한다.) 내가 만약 그녀라면 미처버렸을지도 모를 만큼 지금 그녀의 삶은 황폐하기 그지없다. 얼굴이 반반했던 그녀는 아직도 연예인이 되기를 꿈꾸며 명동거리를 쏘다니고 학교 다닐때 문학소녀였던 그녀는 대뷔를 안해서 그렇지 다잡고 앉아서 글을 쓰면 작가 정도의 타이틀은 우습게 따낼꺼라고 믿고 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세상은 만만하다. 마음만 먹으면 인생대역전을 할 수 있을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다. 서른이 다된 여자를 발굴해서 키울 연예기획사는 이땅에 없으며 학창시절 책장 꽤나 넘겼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습작하나 써 보지 않고서도 덜컥 작가가 되어버리는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더더군다나 그녀가 개판 쳐 놓은 인생에서 그녀를 건져줄 왕자님 같은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요즘 그녀의 꿈은 돈 많은 남자를 물어서 시집을 가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남자들은 예쁘면 뭐든 다 용서를 한다고 한다. 과거가 되었건 빚이 되었건. 그런것에 발목 잡히는 여자들은 예쁘지 않기 때문이지 예쁜 여자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말이다. 물론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단지 얼굴이 이쁘다는 이유 만으로 그녀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인생을 수습해주고 좋은집과 차에 모모 사모님 소리를 듣게 해 줄 골빈 남자는 별로 없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충고하고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스물 아홉이다. 무언가 바뀌기에 늦은 나이는 아닌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전부를 바꾸기에는 그녀의 고달픈 삶은 그녀의 생각없는 과거로 인해 너무나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있다.

가끔 전해듣는 그녀의 소식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왜 나타나지도 않은 꿈속의 왕자님이 동화에서처럼 계모의 독사과와 구박보다 더 몸서리쳐지는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째서 자기 인생인데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남이 어떻게건 해 주기를 바라는가. 나로써는 도저히 이해할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결손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 환경이 많은것을 결정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확실히 정상적인 집안에서보다 문제많은 집안에서 문제성 인간이 될 확률이 높은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마음 먹기에 따라 저런건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어차피 세상 모든 인간들의 출발선이 똑같지 않을꺼라면. 남들 보다 조금 더 빨리 뛰면 된다. 이왕지사 처진 인생 대강대강 걸어가지 뭐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평생을 그렇게 대강대강 살아야 한다. 처음부터 처져있는 것을. 더구나 자기탓이 아닌걸로 처진걸 원망하다 보면 밑도 끝도 없다.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이를 악 물고 달려서 앞서가던 그들을 따라잡는게 백번 낫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집안환경을 탓할 나이가 아니다. 그건 스무살 언저리까지만 해당된다. 그때는 그 이유를 대면서 가출을 해도 나쁜짓을 해도 어느 정도는 용서가 된다. '그래 집안이 그러니 오죽 마음이 심란하겠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서른이 다 되어가도록 그런다면 그건 순전히 자기 탓이다. 더구나 그녀 집안의 사람들은 좀 콩가루가 날리기는 해도 서로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병든 몸으로 아파트 수위를 해서 겨우 살아가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방세 한번 보탠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대학교때 저지른 카드빚을 아버지가 갚아줬었다.)

저렇게 살면서도 그녀가 스스로 행복하다면 그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다. 스스로 몹시 불행해 하고 있다.  두통약과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이룰 정도며 각종 독촉전화에 전화벨만 울리면 심장이 벌렁거린다고 한다. 그녀는 반성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문제가 생기면 덮어두는걸 좋아하며 어떻게건 되겠지라는 말은 그녀가 가장 잘 쓰는 말이다. 과연 그녀 말 대로 그녀의 인생을 180도 바꿔줄 남자를 만나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녀는 어떻게 될까? 이제 두어달만 있으면 세상을 산지 30년째 되는 그녀에게 앞으로 남은 30년은 행복할 수 있을까? (얼마전 그녀가 일하기에 적당한 자리가 나와서 소개를 시켜줬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이력서조차 내지 않았다고 전화가 왔다. 그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혼자 늦은 점심을 먹는다고 했다. 입맛이 없어서 좀 비싼걸 먹으면 나아지려나 싶어서 스테이크를 먹고 있다고 좀 있다 백화점에 쇼핑할껀데 뭐 부탁할것 없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일자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와는 맞지 않을것 같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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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염치 - 김규항 (1993년 3월 씨네21)

염치

알고 보면 이번 스크린쿼터 파동이란 골 때리는 일이었다. 스크린쿼터는 GATT는 물론 그 후신인 WTO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문화적 예외 조항'으로 볼 때, 현재로선 어떤 '경제 논리'로도 축소나 폐지를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제가 안 되는 일이 문제가 된 셈이다. 내막은 문화 의식이 결여된 한국 공무원들이 '공정 무역'이라는 채찍과 '5억 달러 투자'(외자 유치!)라는 당근으로 꼬드기는 미국 공무원들에게 은근슬쩍 땅문서(스크린쿼터라는) 내주려다 소란이 난, '실화'보다는 '야담'에 가까운, 그런 일이었다.

영화인들은 전례 없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웠냐 하면 '자신들의 모습에 자신들이 놀랄 정도'라고 했다. 두 달이 넘게 계속된 영화인들의 싸움은 공무원들이 꼬리를 빼고 국회 결의안이 관철되고서야 일차 마무리되었다. 농성을 풀며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영화인들이 제아무리 열심히 싸웠던들 국민들이 외면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왜 이리도 민망한가.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 이번 싸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자본'으로 해석하는 참신함을 보인 영화인들은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이 진짜 독점자본과 싸울 때 무엇을 도왔던가. 이번 싸움에서 한국 영화를 '민족 고유의 것'으로 해석하던 영화인들은 농민들이 신토불이를 외치며 미국쌀과 싸울 때 어떤 지지를 보냈던가. 이 나라의 유한 계급을 뺀 모든 백성들이 불행해진 구제금융 시대가 일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 동안 영화인들은 그 잘난 영화 예술로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려냈던가. '경쟁력'을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길거리를 헤매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그런 염치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쟁력'을 유보하는 아량을 베풀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번도 사회적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사회적 혜택은 과연 공정한가.

이번 싸움을 통해 개발된 영화인들의 자기 논리가 전례 없이 정교함에도, 이번 싸움의 열기가 밥그릇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냉소하고 일상의 우연에 천착한다는 지성파 감독까지 연단에 오르는 이변이 생길 리 있었겠는가.('정치 의식'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제 의식' 아래에 머물 뿐이다.) 나는 영화인들의 '경제 투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경제투쟁이 경제투쟁에 머물지 않기를,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열정이 남의 밥그릇도 함께 생각하는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억울함과 고통을 이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재발견하여야 한다. 영화인들은 이번 싸움을 통해 지켜낸 스크린쿼터가 오로지 영화라는 업종에만 주어지는 소중한 혜택임을, 그들의 장사가 매우 특별한 장사임을 다시금 생각하여야 한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자 예술의 문제지만, 오히려 '염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족 : 이 만큼 말하고도, 내 속은 여전히 찜찜하다. 한국 영화인들이 농성장에서 함께 흘린 눈물은 모두 같은가. 영화 자본가의 눈물과 영화 노동자의 눈물은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연대하는가. 싸움의 성과로 얻어지는 산업적 이익은 함께 흘린 눈물처럼 공정하게 분배되는가. 한국영화인들은 같은 민족인 동시에 같은 계급인가. 한국 영화인들에게는 '상식선'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 씨네21 1999년_3월

 

 

그 후 7년

스크린쿼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7년 전에 염치라는 글을 썼었고 그 후 새로 보탤 이야기는 찾지 못했다.” 그나저나 ‘한국영화인들’과 ‘한국영화계’는 그 후 7년을 어떻게들 살아왔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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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는데, 약간의 무거운(?) 책은 옆에 앉은 몰상식하게 보이는 아줌마나 아님 아주 수다스러운 아가씨들을 만날 경우는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 이유로 가벼운 책 하나 가방에 넣어둔 것이 김승옥의 <무진 기행>이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인천에 가게 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내용에 대한 이해니 파악이니를 무시하고 일단 페이지가 잘 넘어가서 좋다.  일종의 뿌듯함도 느낀다.  그래서 예전에 어른들이 글씨가 큰 책을 보라고 한 것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학사(그것도 2개나)이면서도 전혀 문학적인 센스가 바닥이므로 제대로 된 리뷰나 쓸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아무튼 잘 읽혀서 좋다. 

 20060208 : 사실 무진기행을 일독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다. 역시나 나는 문학적 이해가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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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2-1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리뷰를 써야 할텐데...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