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시비돌이 > 생활의 재발견

1년쯤 전에 썼던 글. 특별히 달라진건 없고, 늘 반복되는 일인 것 같다. 그런데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1. 


요즘 내 삶이 참 추하고, 비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불편하다.


2. 


요즘 들어 엄청난 섭외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일단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게 무서우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야구선수가 야구장 파란 잔디만 보면 가슴이 답답해 오는 꼴이니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거의 진행하기로 한 단행본 기획 하나를 포기하고, 잡지사 인터뷰를 펑크내버렸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선택을 한 이후 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스트레스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진 탓인지 걸린 감기가 며칠째 괴롭힌다.


3. 


  몇 달 동안 난 영화 보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낙이었던 듯 하다. 그런데 그것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스토리가 엉킬 정도로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지난해 초부터 10월까지 채 20편의 영화도 못봤는데, 최근 5개월 동안 100편이 넘는 영화를 봤다. 현실 도피 였나? 그 사이에 내가 하고 싶어서 했던 인터뷰는 두세건이 못되었던 듯 싶다.


4. 


(스포일러라는게 있다던데, 영화의 일정한 결과를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건너뛰시기 바란다. ^^)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과 류승완의 주먹이 운다.

한국 영화 매니아인 나는 이 두 영화로 인해 너무 행복했다. 두 개성 넘치는 감독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되는만큼 기대감은 정말 컸다. 그래서 개봉되는 날 저녁에 달콤한 인생을 봤고, 며칠 후 시간을 내서 주먹이 운다를 봤다.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데, 이런 영화들은 혼자 보고 나서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해야 제 맛인 것 같다.

 

달콤한 인생.

 

김지운 감독의 말대로 소통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냥 술한잔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더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사소한 일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만큼 심각한 파국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그냥 술한잔 마시면서 ‘너 왜 그랬니?’, ‘죄송해요. 순간 흔들렸어요’, ‘앞으로 그러지 마라. 감봉 3개월이야’라고 했으면 끝났을 일을 그들은 그렇게 해결하지 못했다. 손 하나를 날리거나, 파묻힐 수 있는 상황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랴? 그리고 입장이 바뀌어서 이병헌이 총을 머리에 들이대는 상황에서 ‘왜 그랬어요?’라는 질문에 그 복잡미묘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대화방식을 생각하고, 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방식의 삶을 사는 우리들 자신에게 연민을 느꼈다. 황정민의 연기야 정평이 나 있는 것이고, 딱 한 배우를 빼고 정말 출중한 배우들의 연기도 돋보였다. 물론 주먹이 운다도 마찬가지 였고.

 

 주먹이 운다는 사업이 망해서 매맞는 일로 돈을 버는 전직 복서와 뒷골목 양아치의 삶을 교차 편집해서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혹은 한 사람에게 감정이 지나치게 이입되는 신파로 흐르기도 쉬운데, 류승완 감독은 어느 누구도 편도 들지 않게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이 들게 깔끔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강태식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류상환의 인생이 궁금하고, 류상환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강태식의 인생이 궁금했다. 마지막 신인왕 결승전에서 만난 두 사람의 경기를 보면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누구도 응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 속에 나온 모두 다 사실은 그런 하나의 사연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60억의 인구에게는 60억개의 진실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경기를 보면서 난 무승부로 공동우승이 결정되었으면 하는 신파적인(?) 생각을 했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잔인하게도(?) 경기를 승부를 내버렸다. 마치 그런게 현실이라는 듯이.


5. 


지혜린이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손톱 물어 뜯는 버릇이 없어 다행이야“

아마 내 손톱 물어뜯는 버릇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가 싶다. 나는 불안하면 손톱은 물론 손에 있는 살들까지 물어뜯어서 피가 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불량 아빠인 나로서는 알라바이(?) 하나가 생겼다 싶어서 ‘그것봐. 아빠가 너한테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하니까 그런 버릇이 없는거지’ 그랬다가 혹 하나 더 달았다. ‘웃기네. 내가 아빠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지 알아?’


6. 


요즘 술 마시는 횟수는 대폭 줄었지만, 그만큼 마실 때 폭음을 하게 된다. 우울증이 심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러다보니 필름 끊기는 횟수도 잦아졌다.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맥주를 많이 마셨고, 새벽에 들어와서 술주정을 부리면서 식구들을 괴롭혔나 보다. 그리고 아침 일찍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잔소리가 시작된다. ‘너 자꾸 술먹고 들어와서 시끄럽게 굴고, 사람들 잠 못하게 할래?’, 그런데 당췌 기억이 안난다. ‘내가 언제 술주정 했다고 그래?’, 언성이 높아진다. 앞의 대화가 반복된다. 그러다가 난 미친 척을 한다. ‘내가 술주정을 했다고?’, ‘그래’....

‘정답~~~ 빰빠바바밤 빰빠바바밤 빰빰빰 호이짜...’ 하면서 화상고에 나오는 개구리 권법까지 하다가 졸라 맞았다. 그땐 억울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맞을 짓이었던 것 같긴 하다. ㅠ.ㅠ


7. 


지난 주에 친구가 하는 술집에 가서 또 추태를 부렸다. 별 것 아닌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남의 가게에서 통곡을 해대서 손님들까지 나서서 달래주고 난리였다. 쪽팔려 죽겠다. 친구도 난감했던지 끌고 나가서 다른데서 한잔 하면서 얘기하자고 했고, 난 울면서 소주를 들이붓다가 또 필름 끊겼다. 이제 거기 쪽팔려서 못가겠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냥 그것도 술주정이었나보다.


8. 


망기지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고, 되도록 욕 먹지 않는 삶을 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사람들이 욕을 안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하면 좀 더 망가져야할 것이고, 좀 더 단호하게 살려고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정혜신 박사의 충고대로 플러스 보다는 마이너스가 되는 댓글들은 되도록 안 읽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9. 


잘할 수 있고, 잘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무식하거나, 편협해서 자기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죄악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한계인 것을.


10. 


지난 주에 나갔던 CBS ‘김종휘의 문화공감’ 프로그램에서 김종휘씨가 이런 말을 했다. ‘마주치다 눈뜨다 책을 보다 보니까 재밌는게, 김어준씨와의 인터뷰를 보면 두 사람이 벌판에서 발가벗고 뛰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고, 손석희씨와의 인터뷰를 보면 아주 얌전한 모범생 둘이서 방안에 들어가서 정장을 입고, 소곤소곤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거냐?’라는 질문을 받고, ‘내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그런 것 같다’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늘 구석에서 사람을 관찰하는게 내 삶이었으니 그런 태도가 몸에 배긴 했을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지승호의 인터뷰어로서의 미덕이 뭘까?’, 역설적으로 인터뷰어로서의 재능없음이 지승호의 미덕인 듯 하다. 아마 내가 그림에 자신이 있었다면 내 의도가 많이 들어간 그림을 그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림에 재능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의 초상화를 그 사람에 가장 가깝게, 내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데로 그리려고 노력하는 것일게다. 그래서 내 인터뷰에서는 늘 난 없고, 인터뷰이만 보인다. 그게 여러 가지 인터뷰 형태 중에 한 형태로서의 미덕은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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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ooni > 감수성의 쿠데타.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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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쯤에 한 시사주간지을 두루룩 넘겨보다가 누가 김승옥을 모르랴 하는 문장에서 난 모르는데, 하면서 멈췄다.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고, 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몇 개의 단편으로 한국문학사에 우뚝 섰고…. 그렇다는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저런 류의 말투가 싫다. ‘여자라면 누구나’, ‘남자라면 당연히’, ‘인간이라면 마땅히’, ‘한국 사람은 항상―’. 일반화하고 다수화해서, 반대자와 소수자를 묵살해 버리면서, 입만 닥치고 있으면 너도 끼워줄게 하는 말투. 언제나 난 좀 빼 줘. 하고 싶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김승옥이란 이름이 여기저기서 자주 출몰했다. <르네상스인 김승옥>이라는 최신 비평집 출간소식이라든지, 누군가 김승옥의~ 하면서 인용해 놓은 것을 본다든지, 하면서, 김승옥은 대중적이며, 널리 알려졌으며,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60년대를 대표하는데~ 와 반복되는 감수성의 혁명. 나는 타고나길 소심자라 빼 줘 하면서도, 은근히 끼고도 싶어한다. 무식이 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랑도 아니지 싶어지기도 하고. 해서 일단 여섯명쯤,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데, 딱 한 명이 알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고, 내가 물어본 친구가 자기 친구, 국어과목 임용고시 준비하는 친구에게 문자로 물어본 거였다. 같은 답이 또 돌아왔다. 60년대 감수성의 혁명.


결국, 무진기행을 샀다.


김승옥 소설 전집의 제 1권인 이 책은 열다섯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연습(生命演習), 건(乾),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개의 고정관념, 무진기행, 싸게 사들이기,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夜行), 그와 나, 서울의 달빛 0章,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이 책에 있는 단편들은, 60년대에서 70년대에 씌여졌다. 4.19(사태, 의거, 항쟁, 혁명)가 5.16(혁명, 쿠데타)으로 이어지던 시기. 그 무렵의 시대색이 강하게 배여 있었다.


5.16은 4.19의 불필요한, 기형적 반복으로, 보수반동의 퇴보였다. 하지만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적 성장(무시무시한 속도의 산업화와 도시화)은 그러한 퇴보를 통해서 나아간 것이다. 퇴보하는 전진, 전진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것. 이런 제자리걸음이 반복되고, 고착되서 습관화되고, 마침내 사회의 구조로서 굳어진 듯한 분위기 말이다.  


4.19와 5.16. 날짜로 소환되는 이 두개의 사건은 해마다 반복되는 동지와 하지처럼, 연도를 상실하고, 영원처럼 순환하는 그 무엇으로 현실에 끼어들어있다. 끊임없이, 5.16은 4.19를 무력화시킨다. 4.19는 5.16을 위협한다. 4.19는 5.16을, 5.16은 4.19를 참된 혁명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항쟁과 쿠데타의 무정부 시대에 혁명은 총체적으로 실종됐다.


많은 사람들이 짧고 격렬한 4.19적인 감성들을 허탈한 쓴웃음 한번으로 상실하고, 5.16의 질서 속으로 편입해 들어간 이야기들을 해준다. 인생은 원래 그렇고, 세상과 더불어 흘러가는 것이며, 인간은 다 똑같다 라는 거다. 


이 소설들도, 다분히 그런 느낌이었다. 4.19에 대한 완전 승리를 주장하는 5.16.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乾>. 빨갱이의 시체를 갖고 싶어 하는(이건 정말 핵심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표현이었다. 남한의 현대사를 관통한 이 욕망은 아직도 유효하다.) 꼬마가 좋아하는 동네 누나를 윤간하려는 형과 형의 친구들의 음모에 동조한다.


소설이 골몰하는, 문장과 단어들이 달려가는 지점은 소녀를 욕망하는 형들의 음모에 가담하는 소년의 심사다. 강간당하는 소녀의 입장에 대해선 단 한단어도 할애되지 않는다. 소년은 가해자, 음모자, 학대자의 입장에 나약한 망설임을 안은 채, 적극적으로 편승한다. 이 소설의 선명한 일관성을 주도하는 것은 그렇게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비판이나 성찰의 삭제에 있다. 욕망의 피해자에 대한 상대적 기술은 전무하고, 욕망을 좌절시킬 어떠한 소설적 장치도 없다. 인물의 내면에서든, 외부적 압력으로든.


그뿐만 아니라, 경험된 폭력을 내면으로부터 정당화하기도 한다. 또다른 강간당하는 피해자가 등장하는 <염소는 힘이 세다>란 소설. 여기에도 한 무기력한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불법 염소 고기 집의 그 아이는 손님으로 온 버스회사 직원에게 강간당하는 누나를 보고도 아무 것도,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는 그 광경에 완전히 압도된다. 소년이 목청높여 더럽다고 비난하는 건 누나가 폭행당한 댓가로 버스안내양 자리를 구한 다음, 누나에게이고,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라고 상황을 재해석하는 것은 피해자인 누나 쪽이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마치 한쌍처럼 느껴졌다.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하고, 군사력으로 국민을 억누른 독재자다 하는 말이 그는 경제를 발전시킨 근대화의 영웅이고, 국민들은 그 덕에 먹고 살았으며, 하는 반박의 말과 한쌍인 것처럼.


누나의 그런 태도는 <차나 한잔>에서 등장하는 해고당한 만화가가 차라리 정부에서 자신의 만화를 탄압해서, 필화사건으로 번져주기를 바란다고 기술한 심리나 <야행>에서 무턱대고 자신의 손을 이끌고 강간해 줄 남자를 기다리는 유부녀의 심리와 비슷하다. <야행>에서의 그녀는 공식적으로 누구의 아내조차 아닌 독립된 직장인이지만, 실은 남편이 있고, 그 밑에는 낯선 남자에게 굴복하고 싶어하는 심리마저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차나 한잔>에서의 해고당하는 만화가는 자신의 만화가 개재되지 못한 게 정부의 탄압이냐고 묻는 동네 사람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속으로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으나 좀처럼 그런일은 없다 라고까지 한다. 만화가가 찾아낸 해고의 사유는 만화가 웃기지 않아서였다. 잘못된 것, 부족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다.


능력을 노력과 연관시켜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와 나>에서는 역전되어 있다. 입석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번잡하고 불편한 기차에서 좌석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부러 먼 역으로 돌아가서까지 좌석을 차지한 나와 그런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며 양심에 대해서 훈계하는 그가 나온다. 결국 같은 학교에서 마주치게 되어, 나는 가르친 대로 행하라는 그의 구호에 잠시 휩쓸릴 뻔도 하지만, 결국은 그가 미래를 발명한다는 말에 격렬한 저항감을 느끼며, 그를 적이라고 규정짓는다.


<그와 나>에서의 나는 연대를 알지 못한다. 개인적인 개인. 입장과 상황이 다른 개인이다. 그러한 개인은 필연적으로 서로에 대해서 맞서게 된다. 연대감이 균열되는 풍경에 대해서는 <들놀이>에서도 반복된다. 독재적인 사장이 초대한 들놀이에 초대받지 못한 맹상진군과 초대장을 받았지만, 그를 동정한 이군의 들놀이를 함께 빠지기로 한다. 하지만 초대장이 없어서 못가는 맹상진군과 초대장을 받고도 의리 때문에 가지 못하는 이군 사이의 간격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생생한 찜찜함과 거북함으로 벌어진다.


왜소한, 작아진 개인에 관한 이야기로 보다 분명한 것은 <역사>. 이 소설에는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지만, 고작해야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이고, 그나마 열심히 해봐야 돈을 더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남과 똑같이 일할 뿐이다.


<확인해 본 열다섯개의 고정관념>은 낙선한 소설가의 실패담이다. 미리 등단 소감까지 준비한 그의 실패에 대한 소감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거지의 정열을 운운할 때는 가슴이 찡할 정도다. 하지만 소설 중에는 그 소설가가 쓴 소설이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가 주장했던 무엇과 시대가 틀어졌는지도 나오지 않아서, 소설가는 자신이나 사회에 대해서 성찰하거나 사색하는 존재가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고, 그의 좌절의 깊이가 그대로 욕망의 강도이다. 등단과 성공, 부와 명성, 여자를 향한.


이 욕망이 성공했을 때의 광경은,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에서 보여진다. 일상적인 낮은 것들, 비참과 가난과 구질구질함을 둘러싼 낮은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 소설 쓰는 벌레가 된 작가는 호화로운 호텔로 아내를 불러들일 수 있는데,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이 무진에서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서울로 향할 때 느끼는 1964년식 수치심, 부끄러움은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가 기록된 1979년에는 이미 흔적도 없다.



<싸게 사들이기>는 텔레비전 월부값을 아내가 매춘으로 번 돈으로 충당하는 서점 주인과 그 서점주인을 속여먹는 학생인 내가 애인에게 가기 전에 창녀에게 들리는 남자(학생인 나의 친구)에 관한 에둘러가는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서로 속이는, 정직하지 못한 위선적인 관계들로 점철된 이 복마전에서는, 속는 자도 불쌍하지 않고, 속이는 자도 악당이 아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물을 지배하는 듯한 기분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안과 가난뱅이라 그저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서 나오는 내가 아내의 시체를 판 책장사의 자살을 함께 경험하는 이야기다. 함께 라고는 해도, 나와 안의 태도는 극한의 궁지에 몰린 책장사를 귀찮아하는 듯 데면데면하고, 그의 죽음으로부터 아무런 책임 추궁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달아나 버린다. 어쨌든 그것은 남의 일이니까. 이 부분은 소설 속 앞 부분에 나와 안이 나누는, 서로가 경쟁하듯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대목과 분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어느 술집에 같은 이름의 창녀가 몇 명이더라 하는 사소한 것까지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집착하는 그들(부자와 가난뱅이, 합해서 세상을 구성하는 두 종류의 인간)은, 남의 일에는 냉정하기 짝이 없다.


냉혹한 자신만의 세계에 대해서는 첫 번째에 나온 소설 <생명연습>에서도 언급이 된다. 사랑하는 여자와 대여섯번의 섹스를 하고, 싫증을 느껴 가차없이 차버린 뒤 유학길에 올랐다는 비정한 연애담의 형태로 말이다.



5.16은 확실히 성공했던 모양이다. 이 소설 속의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체제는 스스로 원하는 인간들을 양산해 낸다.) 이것은 5.16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상이다. 강대한 존재에게 복종하고, 굴복하길 원하는 왜소한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는 실패를 거듭하며, 각자인 채로는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불신하는 진흙탕같은 복마전에서 투쟁하는 개인들. 이 무정부적인 인간군상들에겐 확실히 독재자가 필요한 듯 보인다. 또 훌륭하게 그러한 욕구를 기록이라는 형태로 긍정하고, 정당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결론은.


내게 이 소설들은 감수성의 혁명이라기보다는 감수성의 쿠데타로 보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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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업로드가 되지 않는다. 사무실의 내 컴은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다. 난 이런 종류의 '처세' 비스므리한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쩌라.  세상에 너무 많이 시달리는 걸.  조그만 타협이다.  세상과의

결과가 좋으면 좋겠다.

겨우 아미지 업로드에 성공하였다.  이 놈의 컴은 왜이리 오락가락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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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알라딘을 할때는 그랬다. 사람들이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서로들 만나서 그 얘기들을 유쾌하게 주고 받아도 나는 그럴 일이 없을꺼라고 생각을 했었다. 왜냐면 나는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으며...에 또, 게으른데다가, 음... 사람들이 내 실체를 보면 실망할꺼고 (누가 기대나 한다던?)... 거기다가 주제에 낯까지 가리고... 아무튼지간에 내가 알라딘 사람들을 인터넷이 아닌 그들의 몸과 육성을 마주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날꺼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게 늘 그렇게 모르는 일이듯. 알라딘을 하면서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오프라인 정모같은 대규모 만남의 장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일대일의 만남이긴 했지만 아무튼지간에 나는 몇몇분들을 실제로 보게되었다.

그 분들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알던 매력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으며, 그 매력들과 마주하는건 매우 유쾌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동이 가능하며 내가 만나자고 겁나게 조르면 마음 약해서 들어줄것 같은 (혹은 귀찮아서라도 '알았다, 알았어 만나주마' 할)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님... 보면 안될까요?' 흐흐. 이 마수에 걸려든 사람이 바로 검은비였다.

검은비님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태우스님의 알라딘 서재인 분류법에 따르면 그녀나 나나 서재 1세대였다. 나의 이 할랑한 서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훨씬 전 부터 그녀는 댓글을 달아주었고 나는 그녀의 서재를 들락거리며 그녀의 그림에 감동 내지는 감탄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와 나는 친구 비스무리한 것이 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고. 일단 나이도 똑같고 거기다 성질도 살짜쿵 더럽고 (너무 온순한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싫어한다.) 자기 생각도 뚜렷하고. 그래서 나는 검은비를 질기게 졸랐다. 싱글인 나와는 달리 결혼을 해서 아이와 남편이 있어서 시외로 움직이기가 쉽지않겠지만. 가끔 그녀가 혼자 여행을 간다는 얘기에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해서 어제 그녀는 정말로 내려왔다. 이 도시에 나를 보러. KTX 1시 2분 도착. 나는 미리 동대구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출구에서 뭐같이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는 그 속에서 나는 밀가루처럼 하얀. 그리고 동그란 눈을 가진. 나와 키가 똑같은 (그녀도 나도 자로 잰듯한 160이다.) 여인네를 발견했다. 멋져 보이려고 악수를 청했다. (실은 포옹을 하고팠으나 그건 너무 오바다 싶어서...흐흐)

요즘 대구 날씨는 해가 떴다가 비가 왔다가 해서 그녀와 나는 내가 자주가는 레스토랑으로 일단 자리를 옮겼다. 비만 안오면 좀 더 먼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스파게티를 먹고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맥주를 권했다. 그녀는 매우 좋아라 하며 함께 마셔주었다. 스파게티의 해산물도 모자라서 우리는 해산물 철판구이 (많이 달랬더니 정말로 산더미처럼 쌓아줬다.) 를 먹으며 끝도 없이 맥주를 마셨다. 병맥주가 아닌 500cc생맥주를 마셔서 대체 몇잔을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우리는 '여기요' 를 외쳐 맥주를 시키고 마시고 또 시켰다.

그녀는 서재에서 본 이미지보다 훨씬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글에서의 그녀는 가끔 어둡기도 하고 뭔가 철학적이기도 했지만 실제의 그녀는 뭐랄까. 정말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거기다 나는 보았다. 그녀는 정말 사진빨이 안받아도 너무 심하게 안받는다는걸. 그녀를 보면서 떠올린 인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였다. 정말이지 그녀는 스칼렛 오하라를 닮았다. 하지만 사진에서는 그 느낌이 십분의 일도 살지 않았다. 나도 사진빨 안받는다고 징징거리긴 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새발의 피였다. 카메라가 있었기에 당근 그녀의 사진도 꽤 찍었다. (얘기가 너무 재밌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카메라를 꺼내 찍을수가 있었다.) 그러나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녀는 맘에 안드는걸 다 지워버렸다. 그래서 달랑 한장만 남았다.


달랑 한장만 남은 검은비님의 사진.

장소를 옮길까도 생각했었지만 계속 비가 내렸다 그쳤다하고, 그보다는 뱃속에 너무 많은 음식물이 들어있어서 당췌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자리에서 무려 9시간을 버텼다. 그 중간에 계속해서 뭔가를 시켰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눈치가 아주 제대로 보일뻔 했었다. 레스토랑이건 커피숍이건 술집이건 한 장소에 9시간 게김이라니. 정말이지 해외토픽감이었다. 이렇게 먼곳까지 와서 겨우 여기서만 있다가 보낸다는게 미안했지만 나의 게으름은 미안함을 스무스하게 이겼다.

그녀와의 많은 얘기들 중에서 우리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었다. 그녀는 경험자로 나는 미경험자로 서로 조건은 달랐지만 얘기는 술술 잘 풀려갔다. 서재인들을 만나면 당연 서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어쩐지 그녀와 나는 서재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보다는 우리의 로망과 판타지에 대해, 지랄같은 성질에 관하여, 또 살아가는 얘기들을 했다. 그녀를 만나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다. 여자라서 참 좋구나. 만약 우리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얘기들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참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자인 자신을 좋아하고 여자인것을 즐길 줄 아는. 그래서 다시 태어나 또 지구인이어야 한다면 그녀는 또 여자이고 싶다고 말했다.

언젠가 그녀의 서재에 올린 그림 중에서 내가 마음에 들어서 프린트를 해서 냉장고에 붙여뒀던 그림을 선물로 들고왔다.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나간게 무지 뻘쭘했다.) 까만 액자에 끼워진 그 그림을 보면서 말로는 안했지만 속으로는 좋아서 죽을뻔했다. 잉크가 아닌. 그녀가 직접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니...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걸 무척 좋아한다. 여동생이 그림을 그려서인지 특히나 그게 그림이라면 더더욱 환장을 한다. 이제 검은비표 그림 한점은 내 방에 있다. 그리고 그녀는 내 마음에 있다. 우리는 친구가 된 것일까? 친구가 아니여도 괜찮다. 뭐면 어떤가. 나는 만났고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를 또 조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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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외국 저널 숭배의 숨은 뜻 - 박노자

최근 노르웨이에서는 ‘제2의 황우석 사태’라고 불릴 만한 일이 일어나 유럽 전체의 대학가와 학계를 경악하게 했다. 의사이자 오슬로대학교 겸임교수인 욘 수드보 박사가 2005년 10월 영국의 최고 의학 저널이라 일컬어지는 <랜싯>에 낸 구강암 관련 논문이 완전한 조작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던 수드보의 조작 방법은 대담했다. 환자 조사를 기반으로 한 연구에서 약 500명의 존재하지도 않은 ‘환자’를 등장시키고 그들의 사회보장 번호까지 날조했다.

그런 논문의 결론이 환자의 치료에 반영됐다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났을지 알 수도 없는 일인데, 무엇보다도 그 논문에 이름을 넣어주도록 허락한 13명의 공저자들이나 <랜싯>의 심사위원들도 조작임을 밝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끌었다. ‘유령 환자’ 중 약 절반이 생일이 똑같았는데 심사위원이나 공저자들이 그 논문을 정독하기만 했어도 이를 발견하고 의심했을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연구성과를 경쟁적으로 발표하여 주가를 올리려고 날림공사 심사를 하는 ‘정통 저널’들도, 과학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연구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논문의 양적 생산에 매달리는 동료 과학자들도, 그 논문들을 비판적으로 읽을 만한 성실성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우석 사태는 연구실 내의 군사식 문화 등 우리의 폐단을 노골화했지만, 수드보 사태 역시 연구비 따내기 산업으로 전락한 서구 과학계를 ‘벌거벗은 임금’으로 만들었다. 수드보의 조작은 유별나게 대담해서 결국 걸렸지만, 과학계의 권위지에 실린 자료들의 상당 부분은 작문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이곳 대학가에서 나돌고 있다.

이 사건들을 접했을 때 필자의 머리에선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술·과학의 파탄은 국내나 국외나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왜 우리는 구미의 ‘권위지’를 이렇게까지 숭배하고 있는가? 수드보의 조작을 밝혀내지 못한 <랜싯>에 국내 교수의 논문이 실린다면 국내 언론의 큰 기사감이 되는 것이다. 황우석이 세인의 눈을 어둡게 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무엇인가.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던 <사이언스>의 권위가 아니었던가? 물론 과학 발전 수준의 객관적인 차이를 감안하는 것이야 좋지만, 우리는 합리적인 차원을 넘어 구미 ‘권위지’에 거의 사서삼경 격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어느 분야보다도 우상을 파괴해야 할 학술계에서 왜 외국 저널이라는 큰 우상이 생겼을까? 이유는 많지만 한 가지를 짚어보자면 그것은 한국 지배계급의 자기 정통성 부여의 전략으로부터 비롯된다. 반공 친미 국가 남한의 ‘건국 아버지’ 이승만이나 조병옥 등도 미국제 “박사님”으로 통했지만, 지금도 외제 박사학위는 한국 사회 귀족의 가장 귀중한 문화자본으로 남아 있다. 미국제 박사들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한 학술계에서는 구미 저널에서 논문을 낸다는 것이 엘리트 집단에서 확실하고 굳건한 ‘소속’을 나타내는 핵심적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그 저널들이 한국 지배자 그룹의 권위의 원천이 됐기에 국내에서 ‘신주단지’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세인이 쉽게 접근할 수도, 검증할 수도 없는 신비한 외재적 권력, 그 권력에 가까울 수 있는 우리네 상전들의 ‘위대성’을 이 저널들이 대변하는 것이다. 철학은 회의(懷疑)로부터 시작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계급사회의 권위에 얽매이는 ‘학문’은 이미 학문이 아니다. 외국저널에 이름 싣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학자가 아닌가.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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