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알라딘을 할때는 그랬다. 사람들이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서로들 만나서 그 얘기들을 유쾌하게 주고 받아도 나는 그럴 일이 없을꺼라고 생각을 했었다. 왜냐면 나는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으며...에 또, 게으른데다가, 음... 사람들이 내 실체를 보면 실망할꺼고 (누가 기대나 한다던?)... 거기다가 주제에 낯까지 가리고... 아무튼지간에 내가 알라딘 사람들을 인터넷이 아닌 그들의 몸과 육성을 마주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날꺼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게 늘 그렇게 모르는 일이듯. 알라딘을 하면서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오프라인 정모같은 대규모 만남의 장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일대일의 만남이긴 했지만 아무튼지간에 나는 몇몇분들을 실제로 보게되었다.
그 분들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알던 매력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으며, 그 매력들과 마주하는건 매우 유쾌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동이 가능하며 내가 만나자고 겁나게 조르면 마음 약해서 들어줄것 같은 (혹은 귀찮아서라도 '알았다, 알았어 만나주마' 할)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님... 보면 안될까요?' 흐흐. 이 마수에 걸려든 사람이 바로 검은비였다.
검은비님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태우스님의 알라딘 서재인 분류법에 따르면 그녀나 나나 서재 1세대였다. 나의 이 할랑한 서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훨씬 전 부터 그녀는 댓글을 달아주었고 나는 그녀의 서재를 들락거리며 그녀의 그림에 감동 내지는 감탄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와 나는 친구 비스무리한 것이 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고. 일단 나이도 똑같고 거기다 성질도 살짜쿵 더럽고 (너무 온순한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싫어한다.) 자기 생각도 뚜렷하고. 그래서 나는 검은비를 질기게 졸랐다. 싱글인 나와는 달리 결혼을 해서 아이와 남편이 있어서 시외로 움직이기가 쉽지않겠지만. 가끔 그녀가 혼자 여행을 간다는 얘기에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해서 어제 그녀는 정말로 내려왔다. 이 도시에 나를 보러. KTX 1시 2분 도착. 나는 미리 동대구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출구에서 뭐같이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는 그 속에서 나는 밀가루처럼 하얀. 그리고 동그란 눈을 가진. 나와 키가 똑같은 (그녀도 나도 자로 잰듯한 160이다.) 여인네를 발견했다. 멋져 보이려고 악수를 청했다. (실은 포옹을 하고팠으나 그건 너무 오바다 싶어서...흐흐)
요즘 대구 날씨는 해가 떴다가 비가 왔다가 해서 그녀와 나는 내가 자주가는 레스토랑으로 일단 자리를 옮겼다. 비만 안오면 좀 더 먼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스파게티를 먹고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맥주를 권했다. 그녀는 매우 좋아라 하며 함께 마셔주었다. 스파게티의 해산물도 모자라서 우리는 해산물 철판구이 (많이 달랬더니 정말로 산더미처럼 쌓아줬다.) 를 먹으며 끝도 없이 맥주를 마셨다. 병맥주가 아닌 500cc생맥주를 마셔서 대체 몇잔을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우리는 '여기요' 를 외쳐 맥주를 시키고 마시고 또 시켰다.
그녀는 서재에서 본 이미지보다 훨씬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글에서의 그녀는 가끔 어둡기도 하고 뭔가 철학적이기도 했지만 실제의 그녀는 뭐랄까. 정말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거기다 나는 보았다. 그녀는 정말 사진빨이 안받아도 너무 심하게 안받는다는걸. 그녀를 보면서 떠올린 인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였다. 정말이지 그녀는 스칼렛 오하라를 닮았다. 하지만 사진에서는 그 느낌이 십분의 일도 살지 않았다. 나도 사진빨 안받는다고 징징거리긴 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새발의 피였다. 카메라가 있었기에 당근 그녀의 사진도 꽤 찍었다. (얘기가 너무 재밌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카메라를 꺼내 찍을수가 있었다.) 그러나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녀는 맘에 안드는걸 다 지워버렸다. 그래서 달랑 한장만 남았다.

달랑 한장만 남은 검은비님의 사진.
장소를 옮길까도 생각했었지만 계속 비가 내렸다 그쳤다하고, 그보다는 뱃속에 너무 많은 음식물이 들어있어서 당췌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자리에서 무려 9시간을 버텼다. 그 중간에 계속해서 뭔가를 시켰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눈치가 아주 제대로 보일뻔 했었다. 레스토랑이건 커피숍이건 술집이건 한 장소에 9시간 게김이라니. 정말이지 해외토픽감이었다. 이렇게 먼곳까지 와서 겨우 여기서만 있다가 보낸다는게 미안했지만 나의 게으름은 미안함을 스무스하게 이겼다.
그녀와의 많은 얘기들 중에서 우리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었다. 그녀는 경험자로 나는 미경험자로 서로 조건은 달랐지만 얘기는 술술 잘 풀려갔다. 서재인들을 만나면 당연 서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어쩐지 그녀와 나는 서재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보다는 우리의 로망과 판타지에 대해, 지랄같은 성질에 관하여, 또 살아가는 얘기들을 했다. 그녀를 만나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다. 여자라서 참 좋구나. 만약 우리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얘기들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참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자인 자신을 좋아하고 여자인것을 즐길 줄 아는. 그래서 다시 태어나 또 지구인이어야 한다면 그녀는 또 여자이고 싶다고 말했다.
언젠가 그녀의 서재에 올린 그림 중에서 내가 마음에 들어서 프린트를 해서 냉장고에 붙여뒀던 그림을 선물로 들고왔다.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나간게 무지 뻘쭘했다.) 까만 액자에 끼워진 그 그림을 보면서 말로는 안했지만 속으로는 좋아서 죽을뻔했다. 잉크가 아닌. 그녀가 직접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니...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걸 무척 좋아한다. 여동생이 그림을 그려서인지 특히나 그게 그림이라면 더더욱 환장을 한다. 이제 검은비표 그림 한점은 내 방에 있다. 그리고 그녀는 내 마음에 있다. 우리는 친구가 된 것일까? 친구가 아니여도 괜찮다. 뭐면 어떤가. 나는 만났고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를 또 조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