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까지 이 책을 두 번 정도 읽게 되면 월요일 지승호님을 만나러 가야지...

 

 

 

20060213 : 결국 새벽에 한번 보았다.   리뷰는 언제 쓸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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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2-14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지승호님의 번개엔 가지 못했다. 알라디너보다 지승호님의 보험들이 많아서.. 아! 숫기없음이야..
 
 전출처 : 시비돌이 > 가족은 신성하지만,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이득재 지음 / 소나무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한국인에게 있어서 민족이라는 단어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단어는 가족일 것이다. 수십년 동안 헤어져 있는 남북 이산 가족이 모여 눈물바다를 이루는 장면을 보며 우린 가슴 뭉클해지고, 벅찬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또 어릴 때 외국으로 입양되어 부모, 형제들의 얼굴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혈육을 찾는 방송을 보면서 우린 또 벅찬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가족이란 단어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라는 책을 쓴 이득재 교수는 그 책을 통해 가족이라는 말처럼 너무나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상적인 세계를 한번쯤 뒤집어 보는 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득재 교수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다른 뜻은 없는가 의심해보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눈물을 뿌리게 만드는 것이 혹여 가족이라는 단어의 마력 때문은 아닐까? 가족은 당연히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 '주의'가 탄생하고, 가족주의의 마법에 걸려 가족을 위해 애국애족하려고 온 몸을 바치다가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유기당한 것이 결국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인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이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국가 또는 사회에서 해야할 너무나도 많은 역할들을 가족들에게 떠맡겨 버린다. 그리고 가족 사랑, 가족의 정, 눈물과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모두 막아버린다.

 수십년동안 못만나던 가족들이 만나서 눈물바다를 이루는 걸 봐라, 니가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 이런 메마른 인간들 같으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득재 교수의 말대로 가족의 정은 그런 문제제기 조차 못하게 만들 정도로 우리의 의식에 마법의 성을 구축하고 있고, 이 마법을 풀지 않으면 헤어진 가족은 서로 만날 수 있더라도 한국 '사회'는 영영 '사회' '민주주의'와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득재 교수는 호주제폐지운동은 단순히 가부장권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성사 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왜 호주제폐지를 국가 권력과 연결을 시킬까?

국가권력 자체가 남성적이며, 가부장권이란 국가 권력을 대리하여 가족을 통치하는데 사용되는 국가권력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즉 국가가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에게 가부장권을 부여해주고, 그 대신 국가가 할 일 즉 가족의 통치를 아버지에게 위임시켰다는 뜻이며, 가부장권 뒤에는 국가 권력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을 신성시하고 가족을 떠받들면서 정작에는 국가가 수행해야 할 책임을 가족에게,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에게 온전히 전가시키는 체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득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족은 국가 권력의 희생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 내의 사랑과 애정이 워낙 원초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즉 가정이 가장을 잃어도 가족끼리 보듬어 넘어가야 하는 문제로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경우 국가 권력이 가부장제 뒤에서 하는 일이다. 이것은 국가가 수행해야할 공적인 책임을 가족에게 완전히 전가시키는 국가 체제다. 이것을 우리는 家國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제기를 비약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IMF 이후 꽤 많이 신문지상을 장식했던 '가족동반자살'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을 덮어두었는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부모 없이 아이 혼자 살아가기엔 대한민국의 복지상황이 너무 후진적이고, 부모없이 자랄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부모들은 대체로 '오죽하면'이라는 동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자식이라도 맘대로 생명을 뺏을 권한은 없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있는 탓에 그 부모들을 일방적으로 탓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는 있다.

가족동반자살에 대해 진중권씨는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여기서 다시 한번 그 잔인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장이 자기의 식솔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발상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도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생명에 손을 댈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몇년 전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라는 라디오 프로에 몸이 아파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모를 간병하던 한 소녀가 "정말 짜증날 때 아버지 얼굴에 물을 끼얹은 적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사연을 보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은 가족동반자살의 경우와 달리 '저런 죽일' 또는 '오죽하면' 이라는 극단적인 두가지의 감상적인 반응이 동시에 나올 것이다. 나이든 분들에겐 전자의 경우가 많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겐 후자의 비율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서 신해철씨가 비교적 명쾌한 대답을 했다.

  "긴병에 효자 없다. 오죽하면 벽에 똥칠할때까지 살라는 욕이 있겠느냐? 자신이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이타적인 성격이 못된다면 차라리 돈을 벌어 전문간병인에게 맡기는 방법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아버지를 버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일을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장애아를 복지시설에 맡기거나, 병든 노인들을 양로원에 맡기는 일'을 부당하게 비난한다.

   집에다 두고 신경질을 내거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시설과 전문인들의 간병을 받게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주위의 시선 탓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는 '민족'이나 '가족'이라는 단어를 국가를 위해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애국심은 악당들의 최후의 도피처다'

  '알몸 대한민국'의 저자 최상천 교수는 "대한민국의 애국주의는 뒤틀리고 일그러져 있다. 이런 형편인데도 애국주의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별로 없다. 그것이 '미친 애국심'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라면서 핏줄주의와 애국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한국의 밝은 미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최 교수는 사랑의 리퀘스트, 수재민 돕기 운동, TV의 이웃돕기 프로그램을 '감성시대 고급사기'로 규정한다.

  모금운동을 보면 대한민국은 분명 이웃사랑의 천국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모금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 지도 묻지 않고, 선행을 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너는 얼마나 착한 일을 하길래 그러냐? 못사는 사람 하나라도 구제해주는게 나쁜 거냐?"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수 수혜자와 이재민의 일시적인 응급처치 외에 살아가기 힘겨운 수백만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최상천 교수의 말대로 이런 것은 모금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는 아주 딱한 사람들 몇사람을 골라 시청자의 눈물에 호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수의 아픈 사람들은 여전히 가족이 모든 고통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방송은 아픈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거다. 대한민국의 구조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년, 소녀 가장, 가난한 난치병 어린이는 그냥 '불쌍한 아이들'이요. '어둠의 자식들'일 뿐이므로, 방송은 이 아이들을 무작정 불러내 멋대로 동정하고, 눈물바다를 연출하면서 정작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한국인의 '정'이 나쁘다는 거냐고 반문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최상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이라는 감성은 확실히 사람 특히 아픈 사람을 발견하는 힘이다. 나는 따뜻한 가슴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은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이라는 감성은 아픈 사람을 발견하지만, 왜 아픈지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무작정 얼싸안고, 눈물 흘리고, 몸 사리지 않고 보살피는 것이 정이다. 이런 정은 아픈 사람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러나 정은 병의 진단과 치료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은 아름다운 덕성이지만, 이성을 움직여야 비로소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감성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도 3분만 지나면 아픈 사람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코미디 프로그램을 찾아헤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으로 상승하지 않는 감성은 변덕스럽고, 감성의 자극을 받지 않은 이성은 차갑다고 최교수는 주장한다.

  웃기고 울리는 것도 좋지만 인권과 정의를 짓밟는 현실을 이성의 눈으로 정확하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상천 교수는 "모금 운동은 대한 민국 지도층과 언론이 주도하는 감성시대의 고급 기획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획이 무엇을 노리는가? 이성적으로 접근해야할 과제를 감성적 차원에 묶어 두고,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착한 사람들의 선행에만 떠맡기는 신파극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공익을 빙자한 고급사기 라고 단정한다.

  금모으기 운동만 해도 그렇다. 할머니들이 꼭꼭 숨겨뒀던 개인적으로 소중했던 패물들이며, 운동선수들이 평생을 뼈를 깍는 고통 속에 보내며 얻어낸 기념품들이 금모으기 운동이란 이름으로 국가에 헌납되어야 했다. 그것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 아닌가?

그 사람들의 추억과 인생과 피와 땀이 서린 물건들이 단지 금 몇돈, 얼마로 환산되는 야만적인 상황을 언론들은 부추겨 갔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이렇게 된데는 내 책임도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숨겨둔 금괴를 내놓는 부자들과 기득권층은 없었다. 그거야말로 단지 돈으로만 환산될 수 있는 건데도 말이다.

이 고급사기가 연출되는 동안 국가와 부자들은 나라사람(국민)들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살벌한 무한 경쟁 전장으로 몰고 가고, 자신들은 투기와 탈세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최상천 교수는 대한민국은 부자들에게는 환락의 천국,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눈물의 땅이라고 규정한다.

9살 먹은 우리 딸이 수재민 모금을 보면서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지들이 대책을 수립할 생각을 해야지. 맨날 시청자들을 보고 돈을 내래'

저 말이 정답이 아닐까 생각을 해봤다. 물론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우린 언론가 국가가 주도해왔고,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의문을 제기해 본 적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의 댐도 그랬고, 금모으기 운동도 그랬고...

최보은씨도 쾌도난담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사회가 호도하는 방법은 효의 문제를 개인차원으로 극대화해서 문제를 가려버리는 거야. 개개인의 실천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까지 모든 걸 개인의 미덕 차원으로 환원해 <조선일보> 사회면 톱기사로 올린다구. 그러면 우리 모두 너무 흐뭇해서 역시 사회가 잘 굴러가고 있군. 아직 인정이 살아 숨쉬는 사회야. 못 배운 서양놈들이나 부모를 양로원에 갖다버리지, 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거든. 다만 고통스럽게 견디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데 미담은 그 문제를 모두 덮어버려"

우린 사회보장이 절실한 1천만명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 가운데 몇천명을 후원해주고, 동정을 보내면서 인정많은 나라라고 자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독재권력에 시달린 탓에 우리 국민들은 국민들이 정당하게 누려야 될 권리가 어디까지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최상천 교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말고 현실을 이성의 눈으로 보자. 우리는 당당한 주권자가 아닌가? 진정한 주권을 요구할 때가 되었다. 아픈 사람일수록 더 철저하게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며, 건강과 교육과 직업 문제는 반드시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면서 모금운동 같은 고급 사기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것은 모금운동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막혀 있는 돈의 길부터 터야하는 것이고, 건강, 교육, 직업 문제를 해결하는데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기금의 저수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나라(국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득재 교수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가족은 신성하지만 가족주의는 불온하다. 가족은 사람들의 원초적인 공동체인 신성할 수 있지만, 가족주의는 국가가 가족에 대해 저지르는 무책임한 폭력의 결과다. 가족의 해체와 붕괴를 한탄하는 것은 가족을 성적으로 독점하려는 도덕주의자 거나 국가의 무책임성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족이라는 원초적인 관념을 이용하여 가족을 가족 '주의'로 둔갑시켜 버리는 가국 체제다. 우리의 국가체제는 가족=국가라는 등식의 가면을 뒤집어쓴, 국가 '주의' 체제다. 따라서 가족주의는 곧 국가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이 점을 깊이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가족에 모든 책임을 지우는 국가(또는 기득권)의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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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 子夏曰, 博學而篤志①,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자하왈, 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인재기중의.

번역 - 자하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仁이 그 가운 데 있다.

① 博學而篤志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2개의 동사구가 말 이을 而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博學을 보자. 다른 것을 무시하고 2개의 가능성이 있다. 동사+목적어(배우기를 널리한다) 혹은 부사어+동사(널리 배운다)가 그것이다. 후자가 더 좋을 듯하다. 篤志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동사+목적어로 해석한다. 구조상 4개중에 3개는 부사어+동사 구조인데 유독 篤志만 다른 구조여서 몇 권의 번역본을 보았는데 논어주소는 '廣學而厚識之<널리 배우고 배운 바를 독실히(잘) 기억하고> '라고 풀이하여 부사어+동사 구조로 이해하고 있으며 양백준은 동목구조로 번역하고는 다시 注에는 '博聞而强記'라는 말도 뜻은 통한다고 적고 있다. 내가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번역자들의 번역에서 티끌을 찾아내고 기뻐하지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시각으로 문장을 보았으면 해서이다. 주자의 주석을 보면 주자 역시 동목구조로 보고 있는 것같다.

集註 - 四者皆學問思辨之事耳, 未及乎力行而爲仁也. 然從事於此, 則心不外馳①, 而所存自熟. 故曰仁在其中矣. ♥ 程子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何以②言仁在其中矣. 學者, 要思得之. 了此, 便是徹上徹下之道. 又曰, 學不博則不能守約③, 志不篤則不能力行. 切問近思在己者, 則仁在其中矣. 又曰, 近思者以類而推④. 蘇氏曰: 博學而志不篤, 則大而無成, 泛問⑤遠思, 則勞而無功.

집주 - 사자개학문사변지사이, 미급호력행이위인야. 연종사어차, 즉심불외치, 이소존자숙. 고왈인재기중의. ♥ 정자왈: 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하이언인재기중의. 학자, 요사득지. 요차, 편시철상철하지도. 우왈, 학불박즉불능수약, 지불독즉불능력행. 절문근사재기자, 즉인재기중의. 우왈, 근사자이류이추. 소씨왈: 박학이지부독, 즉대이무성, 범문원사, 즉노이무공.

번역 - 네 가지는 모두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일뿐이며 <아직> 힘써 실행하여 인을 이루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에 종사하면 마음이 외부를 향하지(달리지) 않게 되어, 지니고 있는 것이 자연히(저절로) 무르익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인이 그 가운데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정자가 말하였다 :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어째서 이것으로써 仁이 그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지 배우는 이는 살펴서 얻어내야 할 것이다. 이를 <명백히> 이해하는 것이 바로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는 도인 것이다." 또 말하였다 : "배우되 넓지 못하면, 곤궁함을 지킬 수 없고, 뜻이 독실하지 못하면 (혹은, 기억하되 독실하지 못하면) 힘써 실행할 수 없다.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함이 자기에게 있게 되면, 인이 그(혹은, 자기의)가운데 있게 된다." 또 말하였다:" 가까이 생각함은 서로 비슷한 것으로써 窮究하는 것이다." 소씨가 말하였다: "널리 배우고 뜻이 독실하지 못하면, (뜻이) 크기는 하지만 이루는 게 없고, 피상적으로 묻고 멀리 생각하면, 힘은 많이 드는데 공이 없다."

藍谷曰 : 쉽게 풀어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려니 무척이나 어렵네요.

① 心不外馳는 원래는 心不馳(동사술어)外(목적어)의 구조가 부정사 不의 영향으로 도치된 것이다.

② 何以는 何는 '어찌하여, 왜'의 뜻이고 以는 전치사(개사)로 목적어(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③ 不能守約을 金都練은 주술관계로 보아 '지킴이 요약될 수 없고'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문 어순 지식으로 볼 때 조동사 能다음에 주술관계가 온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조동사 뒤에는 바로 술어가 오거나 아니면 부사어밖에 올 수 없지 않은가? 따라서 守約은 동목구조로 보아야 한다. 그럼 約을 지킨다는 말인데 約은 무슨 뜻일까? 양백준의 논어사전에 따르면 논어원문에서는 約이 6번 나온다. 그 중 2번은 困窮의 뜻이고, 나머지 4번은 '不放肆, 約束 방종하지 않고 (스스로를) 단속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나는 困窮의 뜻으로 번역했는데 나머지의 뜻도 무난한 것 같다.

④ 近思者以類而推는 판단구 문장이다. 類는 동종, 같은 부류, 서로 비슷한 것을 말한다. 推는 자전의 구석에서 窮究하다라는 뜻을 찾아내어 옹색하게 번역해 보았는데 思의 좀더 확장된 의미라고 보아도 무난한 것으로 보인다.

⑤ 泛問은 문맥속에서 파악해 볼 때 절실하게 묻지 않는 것, 즉 대충 대충 묻는 것이다. 번역할 말이 궁하여 '피상적으로'라고 번역해 보았다. 다른 좋은 단어가 없을까요? * 제 번역및 설명에 대한 질문과 의견을 환영합니다. 묻고 답하기에 올려 주시면 성심성의껏 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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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귐의 노래 - 중국편
두보 지음, 이영주 옮김 / 솔출판사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사실 난 별점에 무척 후한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다지 책을 읽지 않는 나로서는 일단 고른 책은 이미 나에게 좋은 인상을 준 책이거나 저자 혹은 역자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분이기 때문일게다.

이 책을 번역하고 해설한 이영주교수는 한 번도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참 열심히 사시고 실력이 탁월한 분이라고 너무나 많이 들었다. ((알라딘에 역자에 대한 소개가 없으니 잠깐 소개하자면, 서울대학교 중어중문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밟고는 방송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학교 중문과의 교수로 있다.))  어느날 교보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보게되어 구입하였다.  예전에 이영주교수의 방송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난 그 당시 그 분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처음 가진 생각은  "와! 한문 정말 빠르고 부드럽게 읽는 분이구나!"였다.  왠지 아주 고수일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내 예상은 맞았고, 그 뒤로 한동안 이 조그마한 책은 내 가방에 들어 있었다.

분량도 많지 않고 쉽게 쓰인 책이니까 '두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보너스로 이영주의 다른 책들을 소개한다.

** 사족 : 리뷰를 다 쓰고 난 뒤에 이 책이 품절인 걸 알았다.  위에 소개한 책도 다 무난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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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3-0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책은 제가 사려고 벼루었는데 품절이더라구요. 품절 표시 뜬지 꽤 오래된 거 같은데..

타지마할 2006-03-07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반갑습니다. 좀전에 솔출판사에 전화했는데 알라보고 연락준답니다. 반품된 책이나 오래된 책이 있을 지 모른다는군요.

2006-03-09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시비돌이 > 이은주의 유서, 그리고 써내려가다보니 길게 써진 넋두리

이것도 한 1년 정도 전에 쓴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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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상황과 심정을 다 알 순 없겠지만, 공개된 그 짧은 유서의내용을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물론 그 일 때문은아니었지만, 그 날 술을 많이 마신 후 후배하고 통화하면서 '나도 죽고싶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오늘 그 후배가 전화해서 '그 날 그렇게 말한 것 기억나?'라고 물어봐서 알았지만...
 
만약 그날 죽었다면 그 후배는 '가끔 우울할때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정말 죽을 줄은 몰랐다'는 말을 제 장례식에 와서 했을 것이다. ^^ (지금 내가 죽으면 신문에 기사 한 줄 정도는 날려나?)
 
"엄마 사랑해. 내가 꼭 지켜줄거야.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어.
안하는 게 못하는 게 돼버렸는데 인정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
들에게.. 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힘듦을 알겠어"(이은주씨의 유서 中)
 
상황을 알 수 없어, 뭐라고 하기 쉽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은주 정도 되는 배우가 말하는 '일을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게 되버렸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아직도 영화가 한두편 실패하면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를 찍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이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독이 된만큼 그 편수가 한두편 늘어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 생각 자체는 바뀌지 않을 사람이다.
 
그 정도 인정받는 감독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 이고, '오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명생활 10년과 그로 인해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박찬욱 같이 자기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이 CF에 출연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아무도 안찾을 때 작은 영화 한 편 찍을 수 있는 돈은 생길 것 같아서'라고.
 
그때 어떤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면서 되게 돈 밝히네'라고 쉽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늘 뒤늦게 탄식한다. 만약 박찬욱이 돈이 없어서 영화를 못 찍게된다고 하면 '척박한 한국 사회의 문화 풍토' 어쩌구 하면서 개탄을 했을 것이다. 박찬욱의 CF 출연을 비난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말이다.
 
우리가 강준만 교수에게 했던 행동도 비슷했다. 무크지 인물과 사상이 폐간된다고 했을때 많은 분들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인물과 사상을 사보지도 않았거나, 강교수의 상업성을 비판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강교수에게 쌍욕을 해대고, 드디어 퇴출됐다'고 박수치는 사람들보다는 나을지 모르겠다.
 
이은주씨는 다른 노트에서 "일년전 오늘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되뇌입니다. 그게 안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되뇌입니다. 인간사도 지겹고, 자존심이 바닥을 쳤고,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요즘 내 상태가 그렇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고, 인간사도 지겹고, 자존심은 바닥을 쳤고,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다.
 
옆에서 참 말들은 쉽게 한다. '이런 저런거 하면 되지 않냐, 니가 게으른 것이다'라고. 내 서평들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지승호는 성실한 인터뷰어'라는 얘기다. 사실 나는 그 얘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내가 일을 꽤 효율적으로 해왔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다만 그 외의 모든 일들은 날 힘들게했다.
 
차라리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미련 없이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 들어 채 2월이 가지 않았음에도 TV, 라디오, 각종 잡지 해서 10군데 이상의 연락을 받았다. 물론 대부분 처음부터 거절을 했거나, 해볼려고 노력하다가 '그건 제가 잘할 수 없는 일인것 같다'고 사양하곤 했다.
 
내가 그걸로 인지도를 높혀서 다른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방송에 출연한다는 것이 투자의 개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럴 생각도 없고, 내가 하는 작업에 충실하고자 하고, 그 최소한도의 여건이 마련되어졌으면 할 뿐인데,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세상은 녹녹치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무모했으니까 이짓 해서 이만큼 오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은 왜 못하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하면 '늘 증명해보라'는 말을 한다. 세상 일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나? 그런데, 나는 예측 가능한 작업을 해왔고, 느리지만 많이 왔다고 생각한다. 아니 절대 느리지도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꽤 많은 가능성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근데 늘 사람들은 '안타 100개 치는거 보여줬잖아요'라고 말하는
내게 '운이 좋았을 수도 있고, 내년에는 부상당할 수도 있고, 투수들이 경계하기 시작하면 넌 잘 못할거야'라고 말한다. 난 그 다음해에도 100개 이상을 치고, 그 다음해에 그렇게 하고, 또 그 다음해에도 더 나아지더라도 난 그런 소리를 계속 들을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방송
출연을 어쩌다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 '내가 참 글을 못쓰는 구나.
말도 참 못하는구나.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구나'하는 자괴감이었다.
 
 하지만 내가 해온 길에서 난 너무 멀리 왔고, 또 다른걸 잘할 수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가진 능력 외에 다른 나를 요구하는 것이 참 힘들고, 원망스러웠다.
 
이제는 좀 짧고, 섹시하게, 눈에 띄는 인터뷰를 해달라는 요구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어줍잖은 충고들을 들을때마다 '그건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예요'라고 사양하고, 변명(?)하면서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는 일이 굉장히 가치가 없거나, 내가 잘 못하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하는 것 조차 즐겁지가 않아 더 힘이 들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타이틀이 없고, 학벌조차 시원치 않은 내가 인터뷰집을 여섯권이나 냈고, 그것이 시장에서나 지식계의 평가에서나 일정 부분 인정을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늘 뉴 페이스를 찾는 방송에서도(그렇게 출연섭외를 거절했는데도) 꾸준히 섭외 요청을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걸고 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얘기한다.
 
이번에 이정렬 판사의 '내기 골프는 도박이 아니다'라는 판결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서도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판결이 정당하냐, 아니냐에 대한 논의는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90% 이상이 반대한다는 그 판결을 보면서 이정렬 판사를 '있는 놈들의 대변인이자 수구기득권의 앞잡이다,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반응을 보면서 씁쓸하기만 했다.
 
남을 비판하려면 최소한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 어떤 얘기들을 해왔는지에 대해 이해를 한 후 해야한다고 본다. '이정렬 판사를 정신병원에 보내야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이정렬 판사가 어떤 판결을 해온 사람인지는 알고 해야된다는 것이다.
 
난 이정렬 판사가 이 정도 반발이 올지도 알고 있었고, 사법부 내에서도 왕따를 각오했을 것이며, 그 판결이 대법원에 가서 뒤집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신념으로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저지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나중에 보면 세상은 이런 꼴통 자유주의자들이 바꾸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는 순교를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우리가 노무현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노무현이 꼴통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남아 일정 부분 세상을 바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정렬 판사의 판결은 간단하다. 늘 그는 개인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사회에 '개인의 행동에 대한 국가의 제약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판결문이 설득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토론을 해볼 문제지, 그를 정신병자로 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난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내가 정신병자일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해주기 바란다.
 
 마약이든, 도박이든 그것이 다른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도덕적인 비난을 할 수 있을지언정 공권력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며, 간통이나 혼빙간음 같은 부분도 민사로 해결해야될 부분이지, 형사 사건으로 국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이정렬 판사의 판결은 이런 식의 개인의 자유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봐야할 것이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다. 이은주는 아주 좋아하는 배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웬지 우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지닌 그런 부분들
때문에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가 출연했던 많은 영화들에게 그녀는 (밝은 캐릭터라고 보여지는 역할에서조차도 늘 슬퍼보였고,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죽음으로 마감된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주홍글씨의 강렬한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했던 것
같고, 웬지 나도 그 자동차 트렁크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라면 몇억원을 줘도 그런 연기 안할거야'하는 생각도 들고.
 
그녀는 유서의 마지막 부분엔 이렇게 썼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날 사랑해줬던 사람들. 만나고 싶고 함께 웃고 싶었는데, 일부러 피한 게 아니야. 소중한 걸 알지만 이제 허락지 않아서 미안해"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거의 집에 있으면서 영화만 봤다. 작년 1년동안 본 영화가 50편이 채안될텐데, 지난 두어달 동안 본 영화가 거의 그 정도니까 집에서 책을 보거나, 영화 보는 일로 보냈다고 하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도피였는지도 모르겠고.
그 중에서 이은주가 나오는 영화는 네편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번지 점프를 하다, 연애소설, 주홍글씨, 연애소설의 결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머지 영화에서 이은주는 비극적으로 죽는다. 마치 자신의 죽음이라고 예견한 듯. 그러면서 '날 기억해주겠지?'라는 대사를 남기고. 하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스스로에 대한 떳떳함이나 빚진 것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부채의식일지도 모른다.
 
가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돈 때문에 서프에 남았다'고. 세상에 내 나이 이제 마흔에 이 정도 일을 하면서 내가 받는 원고료를 알고 그 따위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것조차 요즘은 많이 쓰지 못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건 내가 그들에게 미안할 일은 아닌 듯하다.  인터뷰 준비하느라 글 읽고 이런 계산하기 어려운 부분을 빼고라도, 녹취하고, 타자치고, 이런 부분만으로도 지금 내가 받는 정도의 금전적인 보상은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대해 내 친구는 '니 책임이야'라고 얘기한다. 나는 늘 '알아서 주세요'였고, 내가 먼저 이만큼 받아야겠다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래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없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다.
 
어떤 이는 녹음기라고 비아냥거린다. 녹음기. 백번 양보해서 녹음기면 어떤가? 지금 한국 사회에 이만큼 충실한 녹음기가 어디 있나? 젊은 친구들 중에서는 김어준하고 나 밖에 더 있냐는 말이다. 그래도 내 딴에는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다고 생각해왔는데, 우리 사회의 이런 반응들을 보면서 또 한번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 의미있는 기록이 아니었던게지. 내 인터뷰는 죽도 밥도 아냐, 김어준의 인터뷰처럼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손석희의 인터뷰처럼 쟁점에 관해 치열하게 해놓는 인터뷰도 아니고, 그래 가치가 없는게야'
 
어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내노라 하는,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만나 과외수업을 받느라 좋겠다'는 비아냥과 함께 '학습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내가 그동안 해온 작업에 비쳐본다면 이런 평가는 정말 야비한 평가라고 생각한다.(그것도 그런 얘기하는 놈들은 꼭 익명이다. 물론 이해는 간다. 실명으로 그런 야비한 공격을 한다면 가서 잡아죽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도대체 이게 비판이고, 평이란 말인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과외수업을 받기 위해 내 개인적인 부분을 희생하는 비용을 치뤘다'고 말할 수 밖에 없고, '학습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에 대해서는 그렇게 똑똑하신 분들이 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사람들 찾아가서 그들의 목소리를 전해주려는 노력을 안했나 되묻고 싶다.
 
올초 하기로 했던 모 신문의 인터뷰는 계속 미뤄지고 있다. 담당기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벽이 높은가보다. 세계일보에 싣기로 하고 했던 세개의 인터뷰 게재가 계속 미뤄지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인터뷰이들에 대한 미안함때문에 나는 조바심이었고, 게재를 포기하면서도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인터뷰이한테 어떻게 말할까?'였다.
 
다행히 두 분은 다른 곳에 게재하는 것을 흔쾌히 동의해주셨지만, 한 분은 진노하셨다.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탄압을 받으신 점 때문에 피해의식도 있을 것이고, 그 분의 높은 자존심으로 볼때 용납하기 어려우셨던가 보다. 내가 일부러 속인 것도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고,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마음 고생은 커져갔고, 안절부절하고만 있다가 결국 담당기자와 같이 찾아뵙고, 그 분의 호통을 듣고 나서 고문 받던 얘기며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면서 '젊은 친구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 이걸로 끝내자고'라는 말을 들으면서 결국은 울고 말았다. 내가 억울해서라기 보다는 그 분의 삶을 생각하고, 내가 그 분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 울기 시작했고, 나와서도 한참을 울었다.그 분에게 상황을 이해시켜드릴 수 없는 부분이 답답하기도 했고.
 
나는 인터뷰를 하기 전에 '내가 저 분의 시간을 한 시간 뺏을 자격이 있는가?'를 고민하고, 그 한시간을 빼앗아서 그 분이 '괜찮은 자기 기록을 하나 가지게됐다'는 만족을 얻기만을 바란다. 많은 인터뷰이들이 나를 신뢰하는건 나보다는 인터뷰이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내 태도 때문일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나의 인터뷰어로서 몇 안되는 미덕이기도 하다.
 
내 태도가 그렇기 때문에 인터뷰이를 내 기사에 구겨넣는 짓은 안한다. 대답을 유도하지도 않는 편이고, 설혹 기대했던 대답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도 않고, 혹 실망했다손 치더라도 그걸 왜곡하지 않고 텍스트로 다 보여주는데 뭐가 문제가 될까?
 
어떤 이는 유시민 의원과의 인터뷰에서 '지승호가 유시민 의원의 입을 빌어 노빠와 유빠 비판을 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치더라도 뒷다마까는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한번 짚어보자는 게 무슨 잘못인가) 유시민 의원은 거기에 대해 유시민 의원 답게 '날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들 좋아서 하는 거고, 그것때문에 손해를 본다고 해도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의원 떨어지고 '농부가 밭을 탓하겠느냐'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 사람들의 과격성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게 만드는데 대한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니다. 만약 지오디의 팬클럽이 있고, 열성적인 일부 팬들이 다른 곳에 가서 지오디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욕한다면 나머지 팬들이 '그런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는거 아닌가.
 
그리고 그런 문제에 대한 유시민 의원의 견해를 듣고 얘기를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유시민 의원의 대답을 듣고는 이 문제를 길게 얘기하는게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내가 남을 비판하고 싶으면 내 스스로 얘기하지, 뭘 남의 이름을 빌어 비판을 하겠나, 난 열등감에 가득차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르시스트'이기 때문에 남의 입을 빌려 다른 사람을 공격할만큼 옹색하지 않다. 자기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남들도 다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인터뷰를 할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해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대감이 없다. 만약 그걸 갖고 있다가 다른 대답이 나오면 실망할텐데,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내 말이 옳지 않은지에 대한 논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너 그러려고 했고, 그것때문에 속쓰리지'라는 식의 추측성 비판이나 비아냥은 사양하고 싶다.
 
어쨌든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우울증이 도졌다. 그리고 몇가지 더 답답한 생각이 드는게 있고, 절친한 후배가 힘든 상황이 되어서 가슴 아픈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여기서 얘기하기 힘들 것 같다. 공적인 가치와 사적인 가치가 복잡하게 충돌하는 부분도 있고, 그 친구가 전화를 통해 얘기했던 '정말 답답하고, 억울하고, 미치겠어. 우울증이 도져가지고 자살할 것 같아'라는 말이 귓전에 맴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친구에게 해줄 것이 없다. '조만간 내가 찾아갈테니 얼굴보고 얘기하자'고는 했지만, 역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나중에 그 녀석의 빈소에 가서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갈 줄은 몰랐다'는 얘기 밖에 해줄게 없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신과 의사는 “우울증 환자는 목숨을 끊는 게 아니라, 자신을 힘들고 무기력하게 하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자살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결코 내 탓'이라는 자책감, 그로 인한 무기력감, 내 존재에 대한 무가치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그래도 내 꿈은 충분히 크고, 뭔가 할 수도 있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 할때, 뭘 할 수 있을때 증명해내야 한다'는 초조감 이런 것들로 인해 너무나도 혼란스럽다. 
 
여기다가 그렇게 쓰는 놈도 있을 것 같다. 지 멋대로 해석해서 '또 앵벌이하는 거냐? 돈달라는 거냐?'
 
필요없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지 말기를 부탁한다. 제발.
 
사람이 싫더라도,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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