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눈물
아무렇게나 그린 곡선처럼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 보면 밤이다. 옥상에 올라 난간에 팔을 괴고 건너편 아파트 긴 복도를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불빛이 차례차례 들고 나는 모습을 본다. 보이진 않지만 그곳엔 사람이 있다. 불이 켜지는 자리에는 아직 오지 않았고, 불이 꺼지는 자리는 이미 지나친 사람이. 보이진 않지만. 그 모습은 사는 모양과 그대로 비슷하다. 우리는 불이 켜지는 자리에도, 불이 꺼지는 자리에도 언제나 없다. 항상 그 사이 어딘가에 갇혀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우리 자신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밤에도 뿌연 먼지가 아파트와 밤이 만나는 모서리를 문질러 흐려놓는다. 눈이 뻑뻑한 것 같아 괜히 달 한번 올려다본다. 이지러진 달의 눈동자에도 인공눈물 한 방울 부어주고 싶다. 오죽하면 눈물도 만드는 사람의 부산함을 일러바치고 싶다.
한 주 내내 비척거리다 딱 한번, 오직 한번만 글 쓸 자리가 주어진다면, 그 기회가 아깝지 않은 글을 만들기 위해 뭉근하게 문장을 조리는 동안에 쓰는 이의 고갱이가 자연스레 소리도 없이 녹아드는 것이 아닐까? 빛이 가문 독방에 들어앉은 죄수에게 주마다 냅킨 크기의 작은 종이 한 장만이 허락된다면, 다듬고 아끼어 깨알같이 글자를 박아 넣은 그 한 장의 종이가, 어쩌면 잘 닦아놓은 거울보다 더 면밀하게 자신을 비추어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운 걸 보니 아직 덜 힘든가 보다. 진짜 힘든 이들은 그리움을 모른다. 그들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걸어 다니며 컵에 든 밥을 먹는다. 그들은 여기서 무너지면 짚고 일어설 데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대신 그리움을 모른다. 그리워하는 법을 잊었다.
그러나 얕보이기 쉬운 아픔이라고 다 얕보기 쉬운 아픔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워하는 일이 그러하듯이. 그리운 사람은 늘어가지 않아도 그리운 마음은 늘어갈 수 있듯이, 한 사람 그리워하는 일이 여러 사람 그리워하는 일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듯이. 나는 한 사람 그리운 마음만으로 충분히 당신들만큼 분주하다고, 지친다고, 가끔은 내려놓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는 일도, 그리워하는 일도. 그리고 알고 보면,
사람의 눈물은 모두 사람이 만든다.




삶의 막막함과 쓸쓸함을 견디지 않으면,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어 바로 서지 못한다면 우리 앞의 생은 결국 진짜가 될 수 없다. 눈물 없이는 어른이 될 수 없는 법이다.
_ 전성원, 『길 위의 독서』
사랑하는 사람이, 비록 그가 나와 닿지 못하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나와 같은 시간에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외로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근본적으로 그렇게 반향적인 현상인 것 같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절 어떻게 기억했는데요?"
"슬픔에 가득차서 기억했지.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환영이라고 생각했소. 우리가 어렸을 때, 서로의 그림을 보고 사랑에 빠진 휘스레브와 쉬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지? 쉬린이 왜 맨 처음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휘스레브의 그림을 보았을 때 곧바로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 세 번이나 더 그림을 봐야 했는지 아느냐고 내가 물었지. 당신은 이야기에서는 항상 세 번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했었소. 그때 난 쉬린이 처음 그림을 보자마자 사랑에 불타올라야 한다고 말했었고. 하지만 휘스레브의 그림만 보고도 그를 사랑할 수 있을 만큼, 그림 속의 그와 실제의 그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로 똑같이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어디 있겠소.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 내게 당신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실물과 똑같이 그린 그림이 있었다면 어쩌면 지난 12년이 그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_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1』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때, 나는 종종 세계지도 앞에 가 섰더랬다. 내가 있는 곳을 손으로 짚고, 그가 있는 곳을 손으로 짚었다. 어디쯤에서 만나야 할까, 어디가 우리의 중간쯤일까. 아니, 중간이 아니어도 좋다, 나도 날아가고 그도 날아가 아주 엉뚱한 곳, 지금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설고 서로가 서로에게만 익숙한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_ 이유경, 『잘 지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