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는 장면들


1


그는 서울에서 컴퓨터를 공부하고, 그녀는 경남의 유서 깊은 도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을 배운다. 주고받는 이야기만으로 그는 그녀에게 빠졌다. 그는 시를 썼고, 책을 읽고, 그녀와 달리 사랑이 처음이었다. 그가 아는 누군가를 그녀는 좋아했었고, 버림받았다. 가을과 겨울을 옆에서 보듬다가 기어이 그는 그녀를 좋아하고 말았다. 세상이 갑자기 환하고 선명해졌다. 처음 겪는 감정이라서 오히려 확신했던 그와는 달리 그녀는 망설이는 중이다. 그 망설임이 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큰 빛이 내리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봄이 왔다. 무엇 하나 못박지 못하고 그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마음은 들뜨고 그저 이야기만 분주히 오간다. 그는 만지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가득 차올라 터져버릴 것 같다. 낮으로 밤으로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고, 무심히 벚꽃은 떨어진다. 보고 싶다는 말을 문자로 찍어보내고, 미처 다 보내지 못한 백만 개의 말들을 반지하 하숙방에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말들이 밀집하여 굳으면 그리움이 된다. 그리움이 겹겹이 쌓이면 그것만으로도 어엿한 사랑이 된다. 그의 사랑은 혼자서 깊다. 그녀는 내 생각을 할까. 그는 항상 생각한다. 서서 생각하고 앉아서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이 높은 곳에 가 닿는 때가 가끔 있다. 그녀가 서울에 온다. 그녀의 학교가 여의도로 학생들을 보내 시위할 예정이다. 아직 벚꽃이 다 지지 않았다. 운이 좋다면 잠깐, 아주 잠깐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이라도 쥐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개의 밤이 더디게 지나간다. 무리 가운데서 그녀를 한 번에 찾아낼 수 있을거라 확신했지만, 그가 여의도에 도착하고도 꽤 긴 시간을 그들은 엇갈렸다. 그와 그녀는 무수한 사람 가운데 하나와 하나일 뿐이었다. 벚꽃이 한 장씩 홀로 떨어지는 것처럼. 그는 하얀 봄 속을 헤맨다. 마침내 마주섰을 때, 이미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이라곤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왈칵 눈물이 난다. 안녕, 안녕. 그 말만 주고받은 채 두 손 맞잡고 그대로 5분이었다. 밤 되면 쌀쌀해. 응. 너무 소리 지르지 마. 응. 빨리 찾아내지 못해서 미안. 아니야. 작은 비닐 봉지나 은박지 같은 것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그 위로 가끔 벚꽃이 내려 앉았다. 그러면 10분이었다. 안녕, 안녕. 손도 놓지 못한 채 입으로만, 안녕, 안녕. 다시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본다. 자꾸 고개를 돌리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팔을 크게 흔든다. 봄이 진하고 진해서, 그 동작은 마치 깊은 늪 속에서 팔을 젓는 것처럼 힘겹다.




2


그녀가 그에게 입술을 가르쳤다. 가슴을 가르치고 엉덩이를 가르쳤다. 그 모든 것이 가고 나도 한참을 안아줘야 한다고 가르쳤다. 속삭임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배웠다. 한참을 이불을 덮은 채 돌아 누웠다가 부스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면, 그들은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간다. 때론 아직 밝고, 때론 벌써 어둡다. 편의점에 들러 콜라 한 캔을 산다. 콜라가 두 입술을 오간다. 5분 전까지 서로를 직접 더듬던 입술이다. 거리를 채운 젊은이들은 흥청망청 흔들거리고 있고 그와 그녀도 젊은이다. 손을 맞잡은 두 젊은이가 뚜벅뚜벅 걷는다. 때론 봄이고, 때론 여름이다. 그녀의 집은 서울 밖이다. 지하철을 타고 큰 박물관이 보이는 데서 내린 다음,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잡아타야 가는 곳이다. 자리가 나도 그들은 앉지 않는다. 문가에 서서 재잘대다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잠깐 입을 맞추기도 한다. 흥청망청 흔들거리고 있다. 젊음은 누구에게나 오고, 그래서 젊음을 통과한 그 누구도 그들을 손가락질하지 못하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멀리 박물관이 보이고, 그의 집을 나오면서 잡은 두 손을 그들은 아직 한번도 놓지 않았다. 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맞아. 그러면 입을 맞춘다. 그럼 그냥 다시 돌아갈까? 그럴까? 그러면 다시 입을 맞춘다. 서서히 어둡고 여름이다. 늦게까지 매미는 울고 밤은 부옇게 망설이고 있다. 아직 버스는 오지 않는다. 우리 나중에 저기 살자.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이제 막 뼈대를 갖춘 키 높은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우리 돈 많이 벌어야겠다. 정말 그래야겠다. 그러면 다시 입을 맞춘다. 이번에는 좀 길다. 버스가 도착하고, 머뭇머뭇 올라탄 그녀가 창가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든다. 전화 해. 전화 할게. 버스 후미등이 저녁을 둘로 가른다.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만큼 멀리 버스가 사라지면, 그제야 그 자리에 밤이 내린다.



3


그의 생일을 맞아, 그녀는 약간 무리해서 서울에 올라온다. 선물을 고르고, 케이크를 사고, 편지를 쓴다. 무얼 가장 좋아할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선물과 케이크와 편지를 들고 온 그녀다. 많이 걷지 않고, 이르게 숙소로 들어간다. 아직 오지 않은 밤을 벌써 끌어다 붙인다. 그들은 평화롭게 서로를 더듬고, 온몸을 뒤적거리며 그간의 안부를 확인한다.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어.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다 괜찮아질 거야. 같이 가니까 다 괜찮아질 거야. 서로가 가장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기까지, 그들은 오래 만났고, 그래서 더 오래 만날 것이었다. 말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세상의 파상공세 속에서도 말만으로, 그저 말만 가지고도 그 긴 시간을 빚어온 그들이었다. 오롯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긴 믿음에 올라타 여기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문서가 불필요한 사랑이었다. 큰 침대 위에 손 잡고 누운 한 쌍의 확신범이었다. 아침이 오면 그녀는 다시 대구로 내려간다. 어떻게 하면 아침을 죽여버릴 수 있을까, 그는 턱없는 고민 중이고, 그녀는 새근새근 잠을 잔다. 바람이나 욕심만으로 아침은 결국 살해되지 않았고 서울역은 만남과 이별로 왁자지껄하다. 두 사람은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나눠 먹고, 프레즐과 커피를 손에 들고 발차시간을 기다린다. 창가 자리야. 계속 손을 흔들 수 있겠군. 어쩐지 슬플 것 같지 않아? 뭐가 슬퍼.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는 코웃음을 친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자리에 앉고, 플랫폼에 서서 차창 너머의 그녀를 보는 순간 그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러나 그는 손을 흔들지 못한다. 곧 그녀도 손을 내린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반투명한 유리 한 장이 세상의 모든 장벽을 겹쳐놓은 것처럼 비통하다. 시선은 부질없다. 만져야 한다. 그는 전차 안으로 달려들어가 거칠게 입맞추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눈물이 무거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도 이미 그녀의 눈물에 한없이 짓눌려 있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러나 큰 슬픔은 언제나 행복의 한 가운데 있다. 그들은 기뻤으므로, 언제라도 울 준비가 되어 있는 두 마리 짐승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서로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오래 쳐다보고 있다.



            

마침내 시간이 몇 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아샤는 내가 울고 있는 걸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했다. "울지마. 안 그러면 나도 같이 울게 되니까. 나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너처럼 그렇게 빨리 그치지 못해." 우리는 힘껏 껴안았다. ...... 썰매에 올라타고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려다가 그녀에게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퉁이까지 함께 타고 가자고 했다. 거기에서 그녀가 내렸고 이미 썰매가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한 번 대로변에 있던 그녀의 손을 내 입술에 대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서 있었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썰매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가 무섭게 곧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 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마침.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에 수없는 밑줄을 그음.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를 꿋꿋이 읽어나감.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8-02-02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좋으네. 좋다요...
쇼님 오늘 감성 포텐 터졌네요. 팡팡 팡팡팡팡팡!!

syo 2018-02-02 15:20   좋아요 0 | URL
벤야민-설터-치버-좁아터진 고시원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무슨 사람 울적하게 하는 버거-프렌치프라이-콜라-케찹 세트 같은 존재들이군요.

syo는 그저 한 장 냅킨일 뿐이구요. ㅎ

단발머리 2018-02-0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좁은 고시원에서도 이런 매력을 한껏 터뜨리는 syo님은 진정 누구인가요~~
누구신가요, syo님은~~~~^^

syo 2018-02-02 16:34   좋아요 0 | URL
고시생이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추억이나 들추며 소주대신 제로콜라 나발부는 망나니 고시생이요.....

단발머리 2018-02-02 16:39   좋아요 0 | URL
건전하다
이 고시생~~
소주 대신
제로 콜라~~

syo 2018-02-02 16:40   좋아요 0 | URL
못 마셔서 그런거지 마음만은 만취대취입니다! ㅎ

psyche 2018-02-0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너무 좋은데요!

syo 2018-02-03 08:34   좋아요 0 | URL
아 이런 너무 감사한데요!^ㅂ^~~ㅎㅎ

2018-02-12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2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