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 너머로는 햇살이 쏟아지는데, 눈으로 보면 너무 따뜻할 것만 같은 풍경인데도 실제로는 영하 14도. 산더미 같은 책들을 쌓아놓고 오늘 읽어야 할 것들을 오늘 읽을 수 있는 생활이 얼마나 손에 쥐기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한다. 돌아보면, 


펄떡펄떡 맥이 뛰는 설렘을 품어 안은 채 몇 개나 되는 새벽을 지치지도 않고 건너 온 기억도, 또 가늠할 수 없는 질량에 한껏 짓눌려 이제 더는 못하겠다며 꽁무니를 내뺀 기억도, 모두 다 활자에 업혀 내게 온 것들이다. 읽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 읽는 일이 즐기는 일이 되는 낮과 읽는 일이 버티는 일이 되는 밤을 번갈아 지나오다 보면, 어떤 때는 3일이 다 가도 해가 지지 않고 또 어떤 때는 한 달 내내 밤과 밤과 밤만이 이어진다. 어느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낮과 밤이 얼굴을 바꾸기도 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 살고 싶다. 


점심을 먹고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 다른 생각의 침략 없이 읽고 읽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창 밖으로 내려 앉은 새벽, 세상에서 가장 밝았던 어두운 그 새벽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또 한 번 활자의 꾐에 빠져 나를 잊고 싶다. 멀리 멀리 나를 쫓아보내고 싶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도 모든 것을 다 이룬 그 새벽을 아마 다시 마주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행여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오늘 읽어야 할 것들을 내일에서야 읽지는 않는 날들이 쌓아 이룬 주름들 가운데 어딘가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활자를 손 끝으로 한 자 한 자 쓸어가며, 연필로 종이를 밀어가며, 스탠드 불빛 아래 엎어져가며, 그렇게 만들 것이다. 사실, 그것 말고 내가 달리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햇살이 쏟아져도 충분히 추운 날이다.



의미를 상실하여 절망하면 독서는 지속되지 못한다. 하지만 독서의 의의가 가장 풍부하게 자라는 곳은 바로 책의 세계다. 인간의 최초의 선의는 불꽃에 불과하기 때문에 차디찬 현실 세계의 공기에 의해 쉽게 꺼져버린다. 불꽃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땔감을 넣어야 하지만 메마르고 추운 세상에는 항상 자원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땔감인 독서가 지속되어야 한다. 세계가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속되는 독서다.

_ 탕누어,『마르케스의 서재에서』



2


벼랑 끝에 오래 서 있어 본 사람은 생각한다. 어쩌면 이렇게 매일 심연을 내려다 보며 살아야 하는 여기 이 위태위태한 벼랑 끝 한 뼘의 땅이, 결국 내게 주어진 유일한 자리는 아닌가 하고. 벼랑 끝에 처음 서 본 사람은 발버둥을 친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 본 사람은 포기하거나 다시 산비탈을 오른다. 그러나 벼랑 끝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은 어쩔 줄을 모른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희망을 너무 오래 들이마셨기 때문이다. 앞도 뒤도 모두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으면서 동시에 앞도 뒤도 모두 내 자리 같다. 그리하여 결국은 여기만이 내 자리가 된다. 벼랑 끝에 오래 서 있어 본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도 쉽게 한 발을 내딛지 못한다.


다른 곳에 선 사람들은 말한다. 너희들은 절망에 중독되어 있다고. 그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우리는 절망에 중독된만큼 희망에도 역시 중독되었다. 희망과 절망은 길항한다. 그러나 딱 한 군데, 희망과 절망이 공모하는 자리가 있다. 그곳이 벼랑 끝이다. 심연에 아직 몸을 담그지는 않았으나 누구보다 오래도록 내려다 보는 이들이 내몰린 자리다.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 여인숙에 머물며 기다려야만 하니 감옥으로 여길 수도 있겠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사교장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참을성 없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숙을 감옥으로 여기는 건 잠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안에 누워 있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사교장으로 여기는 건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평안하게 들려오는 저쪽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넘긴다. 나는 문가에 앉아 바깥 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_ 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책』

     


3



존 치버,『존 치버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다.

장석남,『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을 읽다.

이진경,『철학과 굴뚝 청소부』를 다시 읽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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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1-2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탕누어의 마르케스의 서재에서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어요!! 근데 오늘 글은 그런 책을 읽으셔서 그런가 무지 철학적!?( “)
암튼 토비 님 화이티잉~~~~!!(소리 크게 질러서 저렇게 갈라진 거에요!! ㅎㅎㅎㅎ)

syo 2018-01-26 16:5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철학적은요 무슨, 공부하기 싫어서 징징대는 거예요 저거 다 ㅎ

화이팅은 잘먹겠습니다!!^ㅠ^

2018-01-26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6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8-01-26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문단 너무너무 좋아요.
이렇게 마음을 와닿는 글을 ‘알라딘 서재-일기장에‘서 만났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요.
잘 읽고 가요. 고마워요, syo님~~^^

syo 2018-01-26 20:33   좋아요 0 | URL
단발님 그동안 어디가셨던 거예요. 알라딘이 텅 빈 줄......^^

. 2018-01-28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서재는 여러 번 들락날락했는데 댓글 다는 건 처음이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도서관에 가면 늘 syo님 서재를 먼저 찾곤 해요. 예전만 해도 좋아하는 작가따라, 좋아하는 수상작따라, 또는 꽂히는 표지나 제목에 따라서 책을 고르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syo님 후기를 따르게 되었네요(왠지 쑥스러워 하실 것 같지만😸). 물론 양적인 면에선 발끝도 못 미치지만요🌝 제 취향대로만 골라 읽으면 아무래도 장르가 한정되서 인지.. 특히나 한국사나 소설쪽만 보게 돼서.. 인문학도나 돼볼까하고 고른 서적은 하나같이 지루하기만 해서요.
말이 길었는데 여하간 syo님 서재를 조용히(음침하게) 자주 들르는 저같은 사람도 있답니다😋 모쪼록 아침저녁으로 날이 싸늘한데 부디 단디 입으셔서 감기 예방하세요~~! 늘 응원하겠습니다!!

syo 2018-01-28 10:54   좋아요 0 | URL
어마어마한 댓글이네요..... 그리고 어마어마한 닉네임이시네요^^ 반갑습니다 .님🤗
제 짤막한 후기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니 뿌듯합니다. 말씀 듣고 나니 요즘은 많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있어서 민망하네요ㅎㅎㅎㅎ
아무쪼록 .님도 건강에 유의하시고, 좋은 책, 재미진 책 많이 읽으시길 응원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