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베르토 망구엘,『은유가 된 독자』를 심하게 고개 끄덕이며 읽다.
임현,『그 개와 같은 말』을 마저 읽으며 다음 작품까지 판단을 유보하다.
오즈 야스지로,『꽁치가 먹고 싶습니다』를 마무리하다.
슬라보예 지젝,『HOW TO READ 라캉』을 서문까지만 읽고 거취를 고민하다.
매거릿 애트우드,『눈먼 암살자 1』이 갑자기 지루해져서 뾰루퉁한 표정으로 몇 장 넘겨보다.
C. S. 루이스,『오독』을 읽다가 흐름을 놓쳐서 집어던지다.
1
오늘은 대구조차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지 않는 매서운 날이었다.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 책 한 번 읽어볼까 하고 펼쳐들었다가, 뇌가 파업투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파업 규모는 아닌지라, 활자가 시신경을 때리는 데까지는 뇌가 작동을 하는데, 그 뒷일을 전혀 책임지지 않는 방식이었다. 활자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의미가 되어 대뇌 어딘가에 착착 쌓여야 독서가 될텐데, 글자들이 syo의 뇌를 차분히 견학한 다음, 쿨하게 휙 돌아가버리는 것이다. 가지 마, 돌아 와, 잠깐 쉬었다 가면 안 돼? 아무리 애걸복걸 빌고 구슬려 보아도 글자들은 고개를 저을 뿐, 얼굴 봤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며 야멸차게 사라져갔다. 망조다. 하루를 탕진할 징조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태만한 뇌가 도사리고 있었다. 후후, 넌 뇌세포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태업이다, 파업이다, 더 이상 활자는 그만, 우리에게 영상을 제공하지 않으면 더 이상 공장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탐욕스런 자본가놈아. 뇌세포들의 강경한 단체행동에 syo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굳게 먹은 다음, 보통 이런 경우 자본가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 생각했다. 답은 간단했다. 노동자놈들에게 베풀 자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걔네들은 8살 때부터 하루 16시간씩 노동시키며 쥐어짜고 또 쥐어짜도 짤 것이 있는 것들이죠.
찬바람 부는 영하의 강변을 홀로 걸었다. 아 추워, 야, 누가 문 좀 닫아. 뇌세포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15분을 더 걸었다. 노조원들의 말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야, 이 사악한 주인놈아..... 이거 제 살 깎아 먹기 아니냐고..... syo는 귀를 닫았다. 10분을 더 걸었다. 노조의 대표가 협상을 제안해왔다. 협상이라니, 아직 멀었군. 10분을 더 걸었다. 노조가 백기를 들었다. 제발 따뜻한 데 들어가서 책이라도 좀 읽게 해 주쇼, 이거 원 더러워서.....
돌아올 땐 뛰어 왔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코코아 한 잔 딱 마셨더니, 눈에 들어온 글자가 뇌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다 마르크스한테서 배운 거다 이것들아. 마르크스, 과연, 인류 최고의 자본주의 분석자. 우리 편도 쓰고 적도 쓰는 전천후 대량학살무기.
2
책에 위로를 받다니, 정말 오랜만이다.
벌레 한 마리가 어떤 남자의 시를 삼켰다.
한 도둑이 어둠 속에서 위대한 말씀을 먹어 치운 것이다.
그것도 견고한 반석에 놓인 말씀을 말이다.
그런 말씀을 날로 먹은 도둑은 미련하다.
이 격언은 그 이전의 라틴 시를 흉내 낸 듯한데, 독자의 게걸스러움이 부르는 실수를 경계하는 게 분명하다. 그 교훈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렇다.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얻지 못하고 꿀꺽 삼켜 버린다면, 텍스트는 소화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게 아니라 입자가 굵은 대변으로 배설되고 만다. 따라서 엄청난 분량의 책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는데도 책벌레는 여전히 바보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 격언의 배경에는 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유대와 기독교 사회는 늘 '말씀에서 창조된 세상'을 지향했고, 이는 지적 행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불신은 말씀에 대한 미신적 두려움으로, '세상은 말씀에서 태어났으므로, 우주와 삼라만상도 말씀에서 유래한다'는 믿음에서 유래한다. 말씀에 대한 두려움은 말씀의 마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해되고, 텍스트 검열·분서갱유·책벌레 조롱 등은 언어 자체의 주술적 힘을 물리치기 위한 행위로 보인다. 따라서 사회는 벽을 쌓아 스스로를 규정하는 동시에 '벽 안에서 뭔가가 생겨나게 해, 그 규정에 저항하게 하거나 정체성을 바꾸려 한다'는 의심도 받는다. 사회는 '창조할 것'과 '보존할 것' 간의 주고받음을 통해 성장하지만, 우리는 언어의 보존력을 자랑스러워하기만 하고 창조력은 부담스러워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언어와 관련된 상상력을 제한하거나 조롱하려고 노력한다.
_ 알베르토 망구엘,『은유가 된 독자』
syo는 책을 꽤 많이 읽지만, 많이 읽는 만큼 가볍게도 읽는지라 읽은 양에 비해 머리에 남는 것이 없어서 항상 고민이었다. 이 따위로 읽으면 안 되겠다 싶어 양을 줄이고 한 권을 오래 읽는 독서법을 시도해 본 것도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엔 항상 제자리. 잘 읽히지 않는 책은 쉬이 포기하고 읽히는 것들만 찾아 서가를 어슬렁거리다보니, 이렇게 딱딱한 것 안 챙겨먹다가 이빨이 물렁해져서 결국 양갱만 씹어 먹어야 되는 꼴이 나지는 않을까 항상 걱정이다. 그러나 마지막엔 역시 제자리. 입문서를 하도 읽어서 가끔은 내가 '인간의 탈을 쓴 입문서'가 아닐까, 피가 땡겨서 자꾸 입문서를 찾아다니는 게 아닐까, 출생의 비밀을 의심하며 엄마를 노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엔 결국 제자리.
그런 syo에게 희망을 주었으니, 과연 월드와이드책벌레연합회공인 랭킹 1위를 다투는 알베르토 망구엘 선생님. 감사해요! 지금처럼 그냥 막, 아무렇게나 읽고 싶은 대로 퍽퍽 쳐 읽을게요!
물론 실제로 저러라고 말씀하시진 않았다.
3
임현의「고두」는 『2017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과 단편집『그 개와 같은 말』을 통해 두 번 읽었는데, 과연 문제작이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 폭로 거의 직전에 발표되어, 한참 뜨거운 시점에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제자와 잠자리를 가진 여고 윤리 선생이 화자로, 그야말로 비루한 자기인식과 변명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syo는 화자의 그지같음을 바탕으로 하여 이 작품을 '비판'으로 읽었는데, 오히려 이 작품을 비판하는 의견도 꽤 많은 것 같다. 그런 사실을 알고 떠올려 보니 사실 저 작품집을 처음 읽었을 때 좀 의아하긴 했다. syo의 견해에 따라 매긴 순서로는「고두」가 일곱 작품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syo 나부랭이가 뭘 알고 그런 짓을 하느냐 하시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판단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항상 수상작은 syo의 세 손가락 안에는 무난하게 안착해 왔었다. 시사성인가,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다.
그러나 저러나, 황현경 평론가의 옹호는 날이 확 서 있다는 느낌이다. 현재 syo가 가진 역량으로 판단한 범위 안에서는「고두」에 여성 혐오가 깔려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런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일부러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정도만 알겠다. 그리고 황현경 평론가가 제시하는 해설 역시 syo에겐 너무 어렵다. 윤리? 도덕? 그 차이나 그 차이를 낳는 근거를 황현경 평론가의 글만 읽고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syo만 멍청한 것이라면 좋겠지만. syo의 입장에서는 좀 쉽게 써줬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지만 그 바람을 수용할 하등의 의무가 평론가에게 없다. syo가 읽어내지 못했을 뿐, 분명히 타당한 해석과 논리가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화가 나 있다는 느낌, 강하게 비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근 저런 어투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본업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했고, 한참 뜨겁던 그의 SNS에서 지금은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