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


황정은이 쓴『백의 그림자』를 처음 읽고 어찌나 울었는지 눈물로, 어찌나 칭찬하고 다녔는지 침과 땀으로 전신의 수분을 너무 많이 소비했던 거라, 건표고버섯처럼 메말라 한동안 시름시름 앓았다- 까지는 아니지만, 그 정도 과장해도 또 어떠리 싶을 만큼 황정은은 좋았다. 최초로 syo의 한국소설가 빠리스트(빠List)에 안착한 이후 오랫동안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던 김연수의 곁에 든든한 후배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여간 너무 좋아서 처음 황정은을 추천한 눈 밝은 친구에게 또 누구 없냐고 채근했지만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 김금희도 아직 뜨기 전, 최은영은 등단도 하기 전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syo가 아니었으므로, 구글링을 통해 어디선가 황정은-윤고은-손보미를 트로이카로 묶는 글을 발견했다. 윤고은과 손보미렸다.


그렇게 윤고은의『알로하』와 손보미의『그들에게 린디합을』을 읽고 어찌나 욕했는지 syo는 성대를, 소설이라고는 염상섭의 삼대 이후로 읽은 적이 없는 처지임에도 강제로 욕받이 역할을 맡아야 했던 친구 三은 고막을 잃고 말았다- 까지는 아니지만, 그 정도 과장해도 또 어떠리 싶을 만큼 당시에 syo는 열이 받아 있었다. 원래 덕질이 그런 법이라는 변명을 붙이고 싶다. 누군가 자신의 덕으로 내 덕을 깔거나 그와 맞먹으려 들 때, 내 덕을 지키기 위해 피와 비명을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덕도이므로, 좀 부당하다 싶을 만큼 윤고은과 손보미를 낮추어 보았던 것이 아닐까? 하여간 당시 syo의 눈에 황정은과 나머지 둘 사이에는 넘사벽이 놓여 있었기에, 윤고은과 손보미가 문단에서 승승장구하며 쑥쑥 자라는 것은 무언가 어둡고 끈적끈적한 비밀을 지시하는 징후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참 알차게 미친 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오늘, 이제 사죄와 정정의 시간이 왔다. 당신들은 몰랐고, 몰랐든 알았든 인생 행로에 하등의 걸림돌이 아니었겠으나, syo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런 걸 눈이라고 달고 다녔더라구요. 허허허.


『알로하』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작들을 모아 놓은『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읽은 것이지만, 그간 맹목이었음을 충분히 인정할만큼 괜찮은 책이었다. 솔직히 황정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은 여전히 빠심이 인정할 수가 없고, 또 아래에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김금희와 최은영의 추격도 견뎌내야 하겠지만, 윤고은은 참신하고 명민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지어내며 자기 자리를 선명하게 선언하는 훌륭한 소설가다. 


리뷰나 페이퍼에서 줄거리를 언급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syo지만, 사죄 정정 특집이므로 미흡하지만 짧게나마 읊어보자.


● 된장이 된 : 등록금 하게 오랜 빚 1000만원을 받아오라고 보내 놨더니 어디서 된장 50리터를 짊어지고 온 아버지. 그런데 아니 글쎄, 알고 봤더니 이 양반이....


● 불타는 작품 : 다 그린 그림을 태우는 조건으로 화가를 먹이고 입히는 후원자가 알고 보니 말하는 개. 그런데 아니 글쎄, 이 말하는 개후원자식이 내 작품에다가......


● 전설적인 존재 : 이렇게 꼴랑 달력작가로 빌빌댈 줄 알았으면 소설가 같은 거 꿈도 안 꾸는 건데, 하던 찰나에 내 앞에 나타난 학창시절의 문학천재. 그런데 아니 글쎄, 이 잡놈이 술 쳐먹고 한다는 이야기가.....


● Y-ray : 몸 속에 있지도 않은 가위, 두루마리 휴지, 폭죽 종이 같은 걸 막 찍어대는 신기한 기계. 이 기계를 통해 내부에 물건을 품고 있다고 진단 받은 이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리고. 그런데 아니 글쎄, 이 몹쓸 병이 자꾸만.....


● 책상 : 지하철을 타고 잃어버린 말들을 찾아 헤매는 작가비서. 책상을 들고 만원 지하철에 타는 남자를 맞닥뜨리는데. 그런데 아니 글쎄, 이 지하철 민폐남이 알고 보니 오래 전......


● 다옥정 7번지 : 뜻밖의 타임슬립으로 현재의 서울에 떨어져버린 나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작가 박태원. 먹고 살기 위해 구한 일자리는 웃기게도 '박태원' 이고. 그런데 아니 글쎄, 난 내가 박태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 오두막 : 제주에서 우연히 만나 막 사랑이 싹트던 두 연인. 그러다 우연히 엄청난 사건의 목격자가 되면서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아니 글쎄, 그 사건으로부터 도망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알고 보니 여전히......


●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 아, 이제 못하겠다. 지쳤다. 그런데 아니 글쎄, 못하겠다 싶은 것이 하필 표제작인데.....



다음은 요것들








지금 당신에겐 시 한 편이 필요합니다

이은직 지음 / 휴먼큐브 / 2016


syo는 이과지만 언어영역이 강점인 희한한 자식이었다. 이과 주제에 수리영역 점수가 자꾸 언어영역의 1/3이라서 그렇지. 1교시 언어영역이 끝나면 문과에서 날고 기는 애들이 찾아와 이번 시험의 난이도랄지, 자기는 3번을 찍었는데 syo는 몇 번을 찍었는지 따위를 묻는 일이 모의고사 날 종종 있는 그림이었다. 어느 국어선생님이 한 번은 심심했던지 애들과 같이 문제를 풀었는데 117점을 받았다. syo가 118점을 받은 시험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 선생님의 도전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적은 어슷비슷했다. 한쪽이 안 틀리거나, 둘 다 하나씩 틀리되 한 명은 2점, 한 명은 3점짜리를 틀려 줘야 승부가 나는 게임이었다. 몇 번 하다보니 양상이 보였다. 시. 시가 어렵게 나온 날이면 거의 100% syo의 패배로 결말이 났다. 


시란 정말 아무리 공부해도 못 맞히겠고, 또 어떨 땐 공부 안 해도 맞히게 되는 변덕 심하고 고집 센 놈이었다. 더 큰 문제는 유명하고 해석이 너무도 명백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해석이 syo의 생각과 자꾸자꾸 빗나가는 거라, 도저히 시는 아니라는 결론만 자꾸 재확인하는 것이 수업의 유일한 기능인 셈이었다. 마침내, 시를 읽어주는 책을 싫어하면서 좋아하는 양가적 감정이 생겼다. '시'를 읽어줘서 싫은데, 시를 '읽어줘서' 좋은. 결국 '시 읽는 책'은 syo에게 모 아니면 도인 셈이다.


이 책은 최초의 걸 또는 윷이다. 저자는 20년 넘게 국어를 가르친 강사라고 하는데, 업계종사자답게 시어의 의미를 윽박지르는 경향도 있다. 종종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말 하나의 수능 강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가 아닌 것은, 시의 주름 속에 접혀져 쉽게 발각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장점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추억에서 / 박재삼


진주(晉州)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 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닿는 한(恨)이던가.

울 엄매야 울 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晉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 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유명한 시고, 그리는 그림도 선명하다. 울 엄매는 진주 장터로 나가 생어물을 팔고, 우리 오누이는 울 엄매가 늦은 밤 별빛을 맞으며 돌아올 때까지 골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떨며 기다린다. 진주 남강은 맑고 아름답지만, 울 엄매는 새벽같이 나갔다 별이 뜬 밤에 돌아오므로 그 아름다움은 보지도 못하고,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은 눈물만 흘리며 설웁게 오명 가명한다.


일반적인 해석에서 4연 5행의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은 같은 연 6행의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는" 눈물을 빗대는 표현 정도로 짚고 넘어간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서 syo를 울렸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화자는 손 시리게 떨며 어머니를 기다리는 골방 속 오누이 중 한 명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화자는 어떻게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옹기전은 어머니가 생선을 파는 시장에 있고, 달빛을 받았다는 것은 시장이 파하는 저녁을 말하는 것인데, 골방에서 떨고 있었을 아이들이 어떻게 그 옹기를 본 것일까. 혹시 오누이가 어두운 밤 혼자 눈물을 흘리며 돌아올 울 옴매를 위해 밤길을 걸어 울 엄매가 있는 생어물전까지 마중을 나간 것은 아닐까? 혼자 옹기같은 눈물을 흘리고 돌아왔을 울 엄매와 손 시리게 떨던 오누이가, 어느 날은, 적어도 하루만큼은, 함께 손 잡고 어두워 채 보이지도 않는 진주 남강길을 웃으며 되짚어 왔던 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의 다정하고 촘촘한 눈썰미가,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를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물론 그것은 작은 변화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아주 큰 힘이 되는 작은 변화다.








베를린 일기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6


이 책을 읽는 순간, syo는 존재의 기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때 무모하게 꿈꾸었던 시, 소설, 평론, 마지막엔 서평. 그 모든 분야에서 가열차게 쫓겨나 이제 내게 남은 건 일기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왔는데, 이 장르에도 번듯한 양민학살자가 있었다니.....


사실 돌이켜보면, 애초에 syo는 재미있는 글에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통파 일기스트로서 아침에 똥 싼 이야기, 점심 먹고 한 번 더 시도했더니 또 나와서 의아했던 이야기, 저녁 먹고 또 일을 치르며 이거 도대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고민했던 이야기 같은 것들도 일단 경험했다면 여과없이 기록했을 뿐. 그런데 언젠가부터, 어차피 남들 읽을 거 다 알고 쓰는 거니까 조금 더 찰지게 쓰자는 욕심이 승하여 일을 그르치기 시작했다.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고 다니는 하이에나처럼 재미있는 일을 찾아 해메고, 결국 오늘 하루는 재미있는 일이 1도 없었다 싶으면 극도로 우울해져 중2병 걸린 글을 난사한다. 그 와중에 또 뇌는 청순하여 저녁에 치킨 먹고 일찍 자면 다음날 일어나 또 싱글벙글 웃으며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최민석은 슬픈 일로 웃기고 웃긴 일로 슬프게 할 줄도 알지만, 무엇보다 매일매일 일기를 쓴 걸 보면 아주 지독한 사람이다. 그것도 이런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안 읽어봤지만 소설도 잘 쓰겠지. 칼국수 잘하는 집이 수제비도 잘하는 이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추노꾼한테 쫓기듯 칼국수 안 돼서 수제비, 수제비 안 돼서 잔치 국수, 잔치 국수 안 돼서 마침내 떡라면에까지 쫓겨 온 도망노비, syo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고디바를 먹고 나면 ABC 초콜릿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목전에서 들은 ABC 초콜릿만이 syo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ABC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이웃들에게 권하고 싶지가 않다...... 


이런 것이 또 나왔다고 한다. 아, 어쩔거야, 제목이랑 표지만 봐도 벌써 웃기잖아. 아놔. 아주 작정했네, 이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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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7-11-0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씀하신 윤고은의 소설집은 읽지 못했지만 <1인용 식탁>을 좋아해요. 최근에 장편소설도 나왔죠. 읽고 싶은 신간은 많고 속도는 느리고. 아, 이건 제 이야기입니다. ㅎ

syo 2017-11-08 16:47   좋아요 0 | URL
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전작을 시도하는 중이어서, <알로하>가 끝나면 바로 <1인용 식탁>을 읽어보겠습니다.

최근 손보미가 대산문학상도 받았던데, 늦기 전에 얼른 사죄해야 되겠어요.....

단발머리 2017-11-08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햐~~~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 마친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달리십니까.
김연수에서 시작해 황정은-윤고은-손보미라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황정은 사랑이 무척 흐뭇합니다. 아, 물론 저는 황정은 작품은 단편 하나랑 또 하나, 뭐더라.... 암튼 두어개 밖에 못 읽어봤지만요.
잘 읽고 갑니다, 역시나!!!

syo 2017-11-08 20:23   좋아요 0 | URL
황누나는 사랑입니다. 더이상 말이 필요치 안타....

단발머리 2017-11-08 20:25   좋아요 0 | URL
syo님 무~~~~척 어리군요.
황정은이 누나라니^^ 아니면 그냥 애칭인가요? ㅋㅋㅋㅋㅋ

syo 2017-11-08 20:29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은 황누나보다 연상이셨군요. 전 저보다 한두 살쯤 많으셔서 여차하면 말도 놓을 수 있는 정도일거라 혼자 생각했었는데~ ㅎㅎㅎㅎ

단발머리 2017-11-08 20:33   좋아요 0 | URL
지금 황정은 나이 찾아봤어요~~ 이도 저도 아니지만.... syo님은 저한테 단발머리 언니라고 부르심 되겠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11-08 20:3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언니 접수했습니닿ㅎㅎㅎㅎ
그러고보니 단발머리 언니하고 이러고 있으면 다락방님이 나타나시던데?!

풀꽃놀이 2017-11-0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라면에도 쫓기신 syo님! ㅎㅎ 최민석 몰랐던 분인데 땡기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syo 2017-11-08 22:28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셔요. 웃겨서 복근생겼어요. 다 읽고 바로 다음날 사라졌지만.

풀꽃놀이 2017-11-0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몸일으키기 대신 사용하면 좋은 작가인가요?? ㅎㅎ
참, 김연수 팬인것도 반갑습니다.^^ 다음주 광화문 교보에서 강연 하시더군요.

syo 2017-11-08 22:40   좋아요 0 | URL
소중한 정보는 감사합니다만 대구 교보가 아니어서 슬프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