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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담배
syo 평생 처음 본 담배 태우는 여자는 이나영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였다. 담배 피우는 여자가 적기도 했지만, 담배는 마음만 먹으면 만져 볼 수도 있었으나 여자는 도무지 꿈에서밖에 볼 수 없었으므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겠다. 어딘가에 여자가 존재한다는 소문이야 쉴 새 없이 날아들었지만, 2002년의 syo에게 여자란 그저 TV나 스크린에만 존재하는 환상속의 생물이었고, 남중 남고는 어둡고 미개하며 욕구를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에 몽땅 헌납하는 성무지렁이들만 득시글거리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처음 접한 담배 피우는 여자는, 정말 끝내주게 멋있었다. syo가 담배를 선망했거나, 여자가 이나영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학교 화장실이나 PC방 한 구석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친구 놈들에게는 없던 무엇인가가, 그리고 그 이전까지 syo가 알던 이나영에게는 없던 무엇인가가, 그 순간 생겨났다. 담배 태우는 남자와, 담배 태우지 않는 여자에게는 없는 어떤 것. syo의 깜냥에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 <네 멋대로 해라>의 ‘멋’이란 게 바로 이 멋이었구먼, 하고 덮었다. 그때 그 하얀 담배연기 속에서 syo가 어렴풋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파괴를 향한 도약? 이중의 반항? 아직도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 몇몇 이름들을 통해 에돌아 짐작해 볼 수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탁자는 온통 담뱃불 자국투성이였다고 한다. 탁자 위에 재떨이가 있었는데도 담배를 아무데나 비벼 껐던 흔적이다.(42) 우리는 사강의 소설보다 더 사강의 소설 같은 그녀의 삶을 안다. 엘리자베스 보엔은 1950년, 글을 쓸 때 자욱한 담배 연기, 핑크색 종이, 레몬수 한 잔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49) 우리는 보엔을 모르는 데도, 어쩐지 이제 보엔을 알 것 같다. 수전 손택은 말보로 담배를 태웠다.(168)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인생을 태워 무엇을 환히 밝히고 세상을 떠났는지 안다. 펼쳐진 책을 무릎위에 놓고 생각에 잠긴 버지니아 울프의 손에도 담배가 들려 있다.(225) 그녀가 소리 높여 외치고 떠난 “자기만의 방”에는 담배도, 언제라도 원한다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자유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글 쓰고 담배 태우는 여자를 만나 1년을 사랑했다. 입을 맞출 때 넘어오는 담배의 맛이 진하거나 연하거나 어쩐지 좋았다. syo는 담배를 태우지 않았으니, 그런 기분은 아마 허세와 허영의 뒤꽁무니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글 쓰는 여자들이 가느다란 담배를 도화선으로 하여 무엇인가를 불태우고 폭파하려 한다는 사실을 미각으로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충만한 경험이었다.
타자기
syo의 집을 비롯해, 절반 정도의 가정에 이미 컴퓨터가 보급된 시절이었다. 장을 보러 간다던 엄마가 나가자마자 돌아와 핸드카트에서 꺼낸 것은 낡은 타자기였다. 어디서 주워왔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들은 건지 만 건지, 대답도 않고 하염없이 걸레로 타자기를 닦기만 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syo의 눈에도 아련함과 설렘이 읽히는 그 눈빛. 그날까지 syo는 엄마가 타자기가 필요한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자.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노라고. 그때 알게 되었지만 어려서 표현할 방법을 몰랐던 한 줌 깨달음을 오늘, 여기서야 적는다. 세상에 타자기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타자기는 구석구석 닦아도 새 것이 되지는 않았다. 타자기를 구석구석 닦을수록 새로워지는 것은 그저 엄마의 마음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단종되어 더는 잉크 리본을 구할 수 없었기에, 그 타자기와 함께했던 엄마의 글쓰기는 몇 장의 연습지와 그보다 더 적은 분량의 일기를 남기고 멈췄다. 키보드와 자판 배열이 똑같으니까 쓰고 싶으면 컴퓨터로 계속 쓸 수 있다고 아들이 권했지만, 엄마는 들은 건지 만 건지, 대답도 않고 하염없이 웃기만 했다. 엄마는 이제 일기를 쓰지 않는다.
방
글 쓰고 담배 태우는 여자를 만나 1년을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치열하진 않았으나 경쟁하듯 쓰면서 서로의 글을 다듬고 쓰다듬었다. 글을 쓰기 위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방이었고, syo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가 있는 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좁은 방 작은 침대에 왼쪽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엎드려 읽고 썼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이 되지 않기 위해 syo는 시를 고르고 그녀는 소설을 골랐다. 어쨌든 치열하지 않았으므로, 그 기간, 우리는 이룬 것이 아예 없거나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그 방이 기억에 남는다. 장난감처럼 자그마한 플라스틱 식기들, 역시 애기 밥상처럼 작고 깜찍했던 접이식 탁자, 겨울이면 방 어딘가에는 반드시 뒹굴고 있는 귤 껍질들, 3단짜리 작은 책꽂이에 꽂혀 있던 그녀의 책들. 무라카미 몇 권, 김연수 몇 권, 그리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그녀가 말했다. 오늘 이렇게 쓸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좋을 것 같아. syo가 대답했다. 오늘 이렇게 쓸 수 있다면, 내일부터는 절대 죽기 싫을 것 같아.
크리스타 볼프의 방은 사방 벽이 책들로 가득하고 가구도 거의 없다.(52) 사회체제를 고민하고 개혁을 부르짖었던 그녀는 읽어야 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거투루드 스타인은 글을 쓰기 전에 그림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현대 화가들의 걸작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작품을 쓴다.(61) 글보다 천재를 알아보는 눈으로 더 기억되는 스타인의 방답다. 보부아르는 공공장소를 주된 생활공간으로 삼았으며, 카페에 앉아 책을 쓰거나 식사를 하고 친구들을 만났다.(78) 현재의 눈으로 보면 그녀의 ‘방’이야말로 가장 선구적이다. 그녀에게 노트북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빨리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글 쓰는 여자의 방이라면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를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 울프는 정원 구석에 목재로 된 오두막 집필실을 지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9시 30분경에 이 오두막으로 들어가 오후 1시까지 글을 썼다. 오후 시간의 대부분도 그곳에서 보냈다.(221)
오늘 우리의 방은 어디인가. 책을 만들거나 글로 밥을 지어 먹는 사람이 아니어서, syo에겐 모든 공간이 방이겠다. 오늘의 우리는 뮤즈가 찾아온다면 그곳이 어디든 그 자리에서 바로 뮤즈와 풀코스 디너파티를 갖고 2차 3차까지 거하게 마친 뒤, 대리를 불러서 영감의 에덴동산으로 뮤즈를 안전하게 귀가시킬 수 있는 장비들을 항시 장착하고 다니니까. 하지만 그 수많은 방 가운데 syo가 가장 사랑하는 방. syo의 글이 syo의 똥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여 한 줄 한 줄을 되새기게 만드는 방, 모자란 글로 징징거리는 중2병 syo의 어깨를 두드려, 부족하나마 한 번 더 글을 쓰게 만드는 방, 냉정한 사람들은 친목 도모와 ‘좋아요’ 구걸로 부실한 자아를 채우려 안달하는 사람의 모임이라며 못된 말로 도끼질을 하지만, 읽고, 배우고, 읽는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는 법을 아는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복작복작하는 분주한 공간. 서로를 더 사랑하는 법을 탐색하는 사람들의 공간. 여기 이 방.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우리들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