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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평점 :
유시민이 고등학교 선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스물 한 살이었다. 심지어 이 세상 모든 스물 한 살 중에 가장 문제가 많다는 정치에 관심 없는 스물 한 살이었다. 아빠, 유시민 아세요? 고등학교 선배래요. 철없는 아들이 물었다. 철없는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다. 유시미이 그거, 국회에 빽바지 입고 오는 빨개이거든, 그거? 아주 웃긴 놈이지. 원문에는 쌍시옷이 더 많고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네발 짐승도 두어 마리 등장했으나 고인의 명예를 위해 옮기지 않는다. 어쨌든 향후 몇 년을 유지될 내 이미지 사전 속에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웃긴 빨갱이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무슨 일만 터지면 이게 다 노무현 탓인지 아닌지 저울질하던 시절이었다. 밝은 가운데 엄혹한 시간이었다.
웃긴 빨갱이를 다시 발견한 것은(사실 그는 항상 있었다. 내 눈이 그에게 닿지 않았을 뿐) 한참 뒤의 일이었다. 통치해서는 안 될 사람이 통치하고, 그 결과 떠나서는 안 될 사람이 말도 안 되게 떠난 뒤였다. 강동구청에 마련되었던 분향소를 그냥 지나치고 나서야 뒤늦게 떠난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된 나는, 여기저기 그 사람의 흔적을 찾아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그가 있었다. 떠난 사람의 옆자리에 그가 있었다. 더는 빽바지는 입지 않았지만 여전히 빨간 사람이라는 소문을 흙먼지처럼 끌고 다녔다. 그는 발견하지 않을래야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었다. 송곳은 그의 혀였다. 그 송곳을 휘둘러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발랐다. 털었다. 종횡무진이었다. 그와 마주 선 토론자들의 얼굴이 한 여름 좋았던 날을 추억하며 초라하게 바닥을 뒹구는 늦가을 나무 이파리 빛깔로 변할 때까지, 그는 가차없이 발랐다. 털었다. 뭔가를 갚아주기라도 하려는 듯, 거침이 없었다. 이미지 사전이 한차례 갱신된다. 웃긴 빨갱이는 지워지고 프로발골러와 천사소녀 네티가 기록되었다. 아주 싹 발라먹고 탈탈 털지만, 아쉽게도 그는 모든 선거가 끝나면 언제 있었냐는 듯 마법처럼 사라진다. 그러다 심지어 정계에서 사라졌다. 정말 마법처럼,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짱가처럼,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앞에 나타났다. 이 다음에 그를 만난 것은 역시 그렇게 떠나서는 안 될 목숨들이 무수히 떠나고 난 다음 달이었다. 슬픔이 내게 정치를 가르쳐주었다. 그 슬픔은 나 말고도 많은 이들에게 정치를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마다 내 컴퓨터 속으로 내게 정치를 가르치러 오는 선생이 다시 그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듣고, 또 다시 들었다. 월요일을 그렇게 보내면 화수목금토를 침대에 누워 그의 책을 뒤적이며 보냈다. 일요일은 쉬었다. 내일이 월요일이고, 내일이면 다시 그가 말한다는 생각에 설레 차마 책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이미지 사전이 마지막으로 갱신된다. 그는 선생이다. 한 번도 나를 제자로 삼은 적이 없지만, 아몰라 그냥 나한텐 선생이다. 그의 말은 내게 권위를 넘어섰다. 유시민과 여친과 치킨은 삼위가 일체였다. 셋 다 조금은 낮은 데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내 인생의 성스러운 트라이앵글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내겐 바이블이다. 바이블은 신비한 책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별 의미없는 옛날 이야기나 담겨 있는 책으로 보이지만, 믿는 이들은 그 안에서 세상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 근 1년간 내가 궁구했던 큼직한 질문들(주로 어떤 독재자의 딸과 그녀의 추종 세력을 둘러싼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의 답이 때로는 대놓고, 또 때로는 은근하게 이 책에 다 들어있고 녹아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어떤 책인가 하면,
아, 큰일 날 뻔했다. 읽는 분들은 모르시겠으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거의 서른 줄에 달하는 찬양고무문건을 작성했다가 기겁해서 백스페이스를 연타하여 없애 버렸는데, 그것은 이런 여덟 글자로 요약 되는 등골이 서늘한 글이었다. "시민천국, 불신지옥." 쓸 게 없어서 이런 말로 때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21개월의 군생활동안 구약을 2번, 신약을 4번 통독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어떤 신자들의 마음을 한 방에 공감시키고, 심지어 똑같은 행동까지 하게 만들다니, 그것만 해도 이 책 진짜 위대한 책 아닌가? 전 대통령이 그렇게 달고 살던 국론분열의 골을 메울 수 있는 막강한 접착제가 여기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누구보다도 전 대통령이 읽었어야 할 책이라 하겠다. 지금이라도 좀 읽었으면 좋겠다. 난 거지지만, 사비로 한 부 보내드릴 마음 있다. 없는 것은 지갑 속의 돈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향한 당신의 의지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