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재인의 연설 자리에 난입한 성 소수자의 입장을 옹호했다가 하마터면 10년짜리 우정이 먼지처럼 소멸될 뻔했다. 이번 대선국면에서 내가 정말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문재인이라는 인물은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에게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솔직히 그들에게서 박사모를 본다. 스스로의 정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언젠가 큰 일을 칠 수 있다. 스스로를 특정 정치인에 지나치게 동일화하는 이들 역시 그 언젠가는 큰 일을 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고루 버무려진 이들이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들던 장면을 보며 혀를 찬 것이 채 석달이 지나지 않았다.
내가 심상정을 지지한들, 나는 심상정이 아니다. 문재인이 이룬 업적은 당신들이 이룬 업적이 아니고, 문재인이 저지른 실책 또한 당신들이 책임질 부분이 아닌만큼, 지적당한다고 해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흥분할 일이 아니다.
2.
우상호의 "정의당은 다음에 찍으세요"가 갈팡질팡하던 나로 하여금 "이번에" 정의당을 찍게 만든 것은, 그저 뼛속까지 반골정신이 깃들어 있는 내 개인성향 때문일 뿐, 우상호의 저 말 자체가 정치적(혹은 정략적)으로 못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당의 "될 사람 찍는게 오히려 사표"라는 말 또한 진리와 정략이 반반 잘 버무려진 말이니만큼, 두 당 사이의 알력이 정치적으로 그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과, 서로의 입장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깔끔하게 이해되는 데가 있다.
그렇다고 쳐도, 심상정 이거 오냐오냐 했더니 어차피 되지도 못할거면서 정권교체에 방해만 되고 있다는 둥, 기껏 비례 대표는 정의당 투표해서 의석 만들어줘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린다는 둥, 도대체 그런 댓글은 무슨 정신으로 달고 있는지 모르겠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댓글의 당사자들은 지지율 조사에서 단 한번도 5번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 것이며, 지난 총선 비례대표 때 정의당에 투표를 하지 않았리라는(늘 말하지만, 해봤자 한 표다. 자기가 172만표를 만들어준 것마냥 은혜 운운하는 것은 꼴불견이다) 것이다.
심상정이 문재인의 표를 빼먹는 것이 아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하니까 장난삼아 심상정 한 번 뽑아 보는 게 아니라, 이제야 원래 찍고 싶었던 심상정을 찍을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심상정으로 향하는 표심의 작은 요동은 찍고 싶은 사람을 찍는 자발적 의지의 물결인 것이고, 결국 민주당은 정권교체의 대의가 중요하니까 이번 만큼은 찍고 싶은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문재인을 선택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빼앗긴 표를 돌려달라는 말이 아니라 표를 빌려달라는 말이 된다. 내가 짜증나는 부분은, 표를 빌려달라는 쪽이 반 협박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심상정이 이렇게 약진하게 된 것은, 홍준표와 문재인의 공동작품이다. 홍준표에게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문재인이 심상정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먼저 했었더라면 심상정의 지지율이 두 자리에 육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 주변의 소수자들은 한결 같이 말한다. 솔직히 차별금지법을 미룬 것보다, 토론에서의 그 한 마디에 다친 마음이 지지를 옮기게 만들었다고. 정략적으로 보아도 문재인의 행동은, 성 소수자 및 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이탈을 최소화하면서 보수층의 표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아니었다.
걱정이 되면, 국민을 대상으로 으름장을 놓을 것이 아니라 정의당과 협의하면 된다. 심상정과 협의 테이블에 앉으면 된다. 단일화 이야기가 아니라, 심상정이 내놓는 여러 정책들을 문재인 당선 후 협치의 테이블에 제일 먼저 올리겠다는 협의를 해야 한다. 진보는 언제나 목마르고, 심상정의 지지자는 심상정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심상정의 정책과 어젠다가 실현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우리 누구도 이번에 심상정이 당선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심상정에 투표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심상정이 추구하는 가치에 한 표를 보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심상정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50대 50의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다.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55대 45, 하다못해 51대 49를 만들 수 있다. 니들이 잘못하면 홍준표가 될 수도 있다는 협박은, 문재인이 지고 나서 책임을 돌리는 데는 맞춤하겠지만, 대의를 향해 가는 방법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최선도 아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딱 한 표를 손에 쥐고 있고, 설사 심상정의 득표 때문에 문재인이 탈락한다고 해도, 그 모든 일이 심상정에게 찍은 내 한 표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당근의 타이밍이다. 심상정의 가치를 보고 투표하는 이들에게 문재인이 당선되어도, 그 핵심가치가 지켜질 것이라는 시그널을 보내야 한다. 어차피 대선이 끝나면 그 다음은 협치다. 지금은 이렇게 서로 물어뜯는 사이일지 모르지만, 정의당은 원내 그 어느 당보다 민주당과 협치를 이룰 가능성이 크고, 비전이 가장 유사한 당이다.
이러고 나면 또, 역시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만은,
요즘 술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문재인이 집권, 심상정이 그 왼쪽, 유승민이 그 오른쪽에서 굳건히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며 존재감을 표시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최선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어쨌든 그런 나라에 도달하기까지 치워야 할 괴물들은 아직 너무 많고, 우리는 언제나 그 괴물들을 치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