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따지냐?
1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박이문 선생님이 쓰신 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감히 선생님께 맞덤비자는 것은 아니지만, syo라는 인간의 머릿속에도 철학적 개념이라는 것이 들긴 들었는지, 도무지 선생님의 말씀이 턱턱 걸려서 진도를 빼기가 힘들다.
ⓖ 한국 사람은 얼굴빛이 노랗다.
ⓗ 한국 사람은 마음이 착하다.
ⓘ 우주는 하느님이 만드셨다.
ⓙ 처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 아름다운 처녀는 마음을 끈다.
ⓛ 금송아지는 금으로 되어 있다.
ⓖ, ⓗ, ⓘ가 사실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실제로 한국 사람의 얼굴빛을 조사해봐야 하며, 한국 사람들의 마음씨를 경험을 통해서만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 이외에는 알 도리가 없다. 이 반면에 ⓙ, ⓚ, ⓛ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위해선 구체적으로 경험을 통해서 알아볼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 진술에 쓰인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면 결정될 수 있다. 전자의 예가 종합적 진술에 속하고 후자의 예는 분석적 진술에 속한다.
_ 박이문, 『철학이란 무엇인가』 54쪽
선생님은 ⓚ명제, “아름다운 처녀는 마음을 끈다”라는 문장을 분석적 진술, 그러니까 그 진술에 쓰인 언어 속에 이미 그 진술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아무런 새로운 지식을 보태주지 않는 진술로 보고 계신데,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 뭐였을까?
심지어 수학에서 보면 아예 ‘명제’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저 문장이 분석명제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처녀’라는 단어의 정의에 ‘마음을 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야 하는데, 아름다운 처녀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 사람의 예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아름다운 처녀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당연한 주체는 보편 주체가 아니라 특정 주체다. 박이문 선생님이 무엇을 당연시하면서 무엇을 백안시하는지가 선명히 드러나는 지점은 아닐까.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박이문 선생님이 유학하던 1960년대, 한국이라는 제3세계 끄트머리 국가 출신의 동양인이 세계 학문의 중심지에서 그야말로 변방인으로서 느껴야만 했던 비애가 있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학문, 그들의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며 일었던 소회 같은 것이 없을 수 있었을까. ‘인간’이 당연히 서구의 백인(그리고 남성)을 지칭하는 언어로 이루어진 학문 체계 속에서 겪어야 했을 배제의 경험을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디폴트 인간’에 대해 좀 더 첨예한 비판의 관점을 지니게 될 거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근데 그게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2
칸트를 읽으면서도 느낀 거지만, 명제를 “종합 명제”와 “분석 명제”로 구분하는 그 이분법은 너무 기계적이다. 양극단 사이에서 언어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색깔들을 무시하고 무지개를 빨강색과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처녀는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은 ‘처녀’라는 단어 속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분석명제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문장의 분석명제성이랄지, 분석명제력이랄지, 분석명제점수랄지 뭐 그런 것이 과연 “금송아지는 금으로 되어 있다”라는 문장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
“처녀”라는 단어와 “금송아지”라는 단어를 뒤흔들 수 있는 사태의 집합은 그 크기가 다르다. 다시 말하면 “처녀=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공식은 “금송아지=금으로 만든 송아지”라는 공식과 엄밀성의 정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더 간단히, ‘금송아지’라는 단어가 초콜릿이라면 ‘처녀’라는 단어는 핫초코라고 할까.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는 20세 여성을 처녀라고 칭하는 사람의 수와, 결혼하지 않고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들을 키우는 40세 여성을 처녀라고 칭하는 사람의 수가 과연 동일할까? 그게 다르다면, '처녀'라는 단어에 합의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사용자가 동의해야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언어가 언어사용자들의 관념에 영향을 받는 걸쭉한 수프 같은 형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처녀는 결혼하지 않았다”는 문장과 “금송아지는 금으로 되어 있다”는 문장을 분석명제라는 집합 속에 밀어 넣을 때 칸트가 상정한 언어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박제였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답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박이문 선생님은 줄곧, 언어의 세계(의미차원)와 존재의 세계(존재차원)의 이분법을 강조하신다. 베르그송이나 하이데거 같은 대철학자들과, 데리다 같은 ‘젊은’(!) 철학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가 그 두 가지 세계를 자꾸 버무리는 데서 발생한다고 한탄하신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제시한다.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바닷속의 어류와 그것을 잡기 위해 만든 어망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필요에 따라, 새우를 잡느냐 오징어를 잡느냐에 따라 일정한 모양의 어망을 뜬다. 알맞은 어망을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물고기를 잡게 된다. 말하자면 그물에 고기가 걸려든다. 이런 의미에서 물고기와 어망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어망과 물고기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는 물체로서 그것대로 어떤 질서 속에 그것대로의 질서를 갖고 있으며, 어망은 물고기나 그것들이 살고 있는 환경과는 아무 관계 없이 어망이라는 조직으로 있다. 물고기나 그것들이 살고 있는 환경은 우리의 뜻대로 바꿀 수 없는 자연에 속하지만, 어망은 우리가 우리의 꾀대로 만들 수 있는 문화, 즉 사고의 체계에 속한다. 이러한 사고의 체계, 즉 어망은 물고기 잡는 일, 물고기 자체와 아무 상관 없이 여러 가지로 짜여질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때에 따라 물고기와 직접 관계없는 어망도 물고기를 얽어 잡아낼 수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사물에 해당되어 존재차원에 비유되고, 어망은 언어에 해당되어 의미차원에 비유된다.
_ 같은 책, 63-64쪽
그러나 선생님의 비유야말로, 언어와 존재 사이의 막강한 상관성을 증명한다. 커다란 물고기를 잡기 위한 어망은 다른 작은 물고기들이 그물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성기게 만든다. 어망이 고기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이고, 돌려 말하면 목표 물고기가 어망의 특성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어망으로 어부들이 오랫동안 그 바다에서 물고기를 분별없이 잡다 보면, 커다란 물고기는 점점 그 수가 줄어들게 되고, 같은 종이지만 덩치가 조금 더 작다 보니 그 어망 틈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는 녀석들이 생존 경쟁에서 유리하여 상대적 개체수를 늘릴 수 있다. 그 어종의 지배적 형태가 바뀌는 것이다. 어망의 특성이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이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으로 물고기의 특성을 바꾸는 상황이다. 거칠게 말해서, 어망이 고기를 (작게) 만드는 것이다.
선생님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특정 시점에 정지된 상태의 언어와 존재를 분석하시기 때문에 비슷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면은 분석하기 좋고 아름다워서,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면 시간이 가는 것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인지.
3
따지지 않고 읽으려고 하는데 쉽지만은 않아서, 누르고 누르다 한 번 대든다. 그리고 또 누르고 누르러 간다.
--- 읽은 ---
226.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 / 2020
읽으면서는 발췌를 위해 캡쳐를 좀 해놨는데, 막상 옮겨 적으며 다시 읽는 과정에서 이건 안 옮겨도 되겠군, 이것도, 이것도, 이렇게 하나하나 자르다 보니 몇 문장 남지 않았다. 장강명의 소설이나 소설가로서의 장강명을 아끼는 마음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이래저래 나하고는 맞지 않아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을 그려봐도 그다지 설레지 않아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는 그냥 무심한 마음으로 끝났다. 시종 강조하는 ‘말하고 듣는 인간’과 ‘읽고 쓰는 인간’의 대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내가 좀 더 쓰는 인간 방향으로 가까이 갈 필요가 있는 듯하다. 내가 서 있는 해발고도에서는 그가 보는 풍경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227. 마주 보기
장자크 상페 지음 / 배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8
아무리 차가운 풍경을 그려도 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의 그림도 그림이지만, 말재간 진짜 어마어마하다.
228. 그림으로 내 마음을 충전합니다
이근아 지음 / 명진서가 / 2019
책 속의 한 대목을 책 생긴 그대로 옮겨본다.
직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친정엄마 도움을 받아야 했던 나는
결혼 5년 동안은
친정이 있는 강동구 언저리에 있어야 했다.
친정 가까운 곳에서
내가 가진 돈에 맞는 집은
시도 아닌데, 대체 이런 편집 왜지?
그렇다고 대단히 아름다운 에세이도 아니며, 대단히 특별한 이야기도 없다. 이 책으로 syo의 마음은 하나도 충전되지 않았습니다.
--- 읽는 ---







성의 역사 1 / 미셸 푸코
철학이란 무엇인가 / 박이문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이규리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 짐 홀트
스무 살 / 김연수
밤으로의 긴 여로 / 유진 오닐
반부패의 세계사 / 김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