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

 

한 손에 책을, 다른 손에는 사랑을 들고서 뚜벅뚜벅 살다 가는 것이 이번 생에 내가 해야 하는,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임을 선명하게 받아들인 건 고작 몇 해 전이다. 스물부터 읽고 사랑하기 시작했고 일단 시작한 이후는 쉼 없었으니, 살아온 인생의 거지반을 스스로 어떤 놈인지 잘 인식하고 살았던 것 치고는, 총 인생의 거지반을 어떤 놈으로 살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수용은 꽤 늦은 셈이다.

 


이제 막 시단에 새로이 등장한 폴 발레리가 스승으로 우러러보던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시작詩作의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말라르메는 어떻게 답장을 썼을까요? "유일한 참된 충고자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이라는 것이었습니다아름다운 일화입니다자신이 하는 말도 듣지 말라는 얘깁니다누구의 '부하'도 되어서는 안 되고누구의 '명령'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사키 아타루잘라라기도하는 그 손을

 

 


2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는 중. 나라고 생각했던 나와, 되고 싶었던 나와, 되기 싫었던 나가 이루는 삼각형의 안쪽 어딘가에 내가 있는 것 같다. 정확히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가 어딘지 평생을 더듬어가면서 살겠지만.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인류가 겪은 전쟁과 패배와 승리 중에는 군대와 상관없는 것도 있어그런 것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 점을 명심하게.“

존 윌리엄스스토너


 

 

3

 

아무거나 쓰다 보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거라고 오래 생각해왔다. 그 생각은 곧 아무나 사랑하다 보면 아무도 사랑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으로 치환되었다. 마음의 논리가 그런 식인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또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역시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 역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박상영우럭 한점 우주의 맛

 

 

 

4

 

읽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그러니까 사는 것이 이런 모양이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그저 이런 모양으로 읽고 사랑하고, 사는 것은, 얼핏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누구나 겪으며 살아가는, 세상에 너무 흔한 일 같지만,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한숨 푹 자고 나면 먼지처럼 사라지는 작은 불만 같지만, 그 괴리,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이렇게밖에 살아지지 않는 삶 사이의 깎아지른 벼랑은, 거칠게 던져진 녹슨 칼처럼 마음의 밑바닥에 생채기를 낸다. 구멍이 생기고 그 틈새로 감정이 샌다. 그러다 어느 날, 수도꼭지보다 배수구의 직경이 더 커지는 때가 오면 세상 온갖 행복을 가져다 마음에 부어도 그것들은 그대로 흘러나가고, 나는 그냥 하나의 몸통이 된다. 그럴 때 버리고 떠나야 한다.

 

살려고, 살고 싶어서 그래.

 



바쁜 일들이 밀려 나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귀찮고 번거로울 땐문 밖에 세워둔 나 자신을 상상한다집 안은 밝고 환하다하지만 누구도 문을 열어주진 않는다집주인인 나 자신도 창밖의 나를 보지 못한다낯선 얼굴들이 들어갔다 나온다날은 저물고 사위는 어두워지는데 나는 여전히 집 밖을 서성이고주저한다이제 밤이다나는 엄습하는 추위에 옷깃을 여민다언제까지 나는 나를 문 밖에 세워둘 것인가?

김다은혼밥생활자의 책장


 

 

--- 읽은 ---

 


118, 119. 설민석의 삼국지 1, 2

설민석 지음 / 세계사 / 2019

 

삼국지 1회독을 여기서 하는 것은 나쁘지 않겠다. 그러나 1회독까지. 삼국지를 안 읽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읽고 마는 사람은 없으니, 내가 삼국지를 읽겠다 싶은 분은 이 책을 소장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120. 인생을 바꾸는 결혼 수업

남인숙 지음 / 해냄 / 2017

 

이걸 왜 읽고 앉았냐- 하면서 책을 폈는데 의외로 끝까지 읽고 앉았다. 결국은 뻔한 소리 같긴 한데, 세상에 뻔한 소리는 다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다. 도움이 되니까 퍼지고 퍼져서 뻔한 소리가 된 것이 아닐까.

 

 

 

121.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0

 

알아야 읽히는 것들이 있어서, 알기 전에는 읽어도 읽은 게 아닌 책들이 있다. 지구 반대편 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 소설 같은 것들. 그렇지만 그 가운데는 모르고 읽어도 읽을 만하되, 알고 읽어도 미처 다 알아내지 못하는 신기한 책들도 있다. 그런 책을 내놓는 이들에게 세상은 거장의 이름표를 붙이고, 설령 많이 팔리지는 않더라도 그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끝내 멸종하지 않는다.

 

 

 

122. 남의 마음을 흔드는 건 다 카피다

이원흥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0

 

내가 이런 (좋은) 카피를 썼다. 방황하는 후배에게 내가 이런 (멋진) 말을 해주었다. 이것이 (훌륭한) 나의 루틴이다. 누구누구가 이런 (살짝 부족한) 카피를 내놓았는데 내가 발전시켜서 최종적으로 이러이러한 (더 나은) 카피가 나갔다. 내가 SNS에 올려놓은 (폼 나는) 것 좀 보세요. 특히 SNS . 책 전체 분량의 거진 1/6을 작가가 SNS에 올린 글을 퍼와서 채웠다.

 

남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다 카피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도 카피가 아니었다.

 

 

 

--- 읽는 ---

질풍노도의 30대입니다만 / 김희성, 김밀리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고병권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어른의 어휘력 / 유선경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 이주윤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 김언호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 임승수

알기 쉬운 경제학 / 김경진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 인디고 연구소, 지그문트 바우만

인생을 바꾸는 건축 업 / 김진애

 

  

--- 갖춘 ---

홍차수업 / 문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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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04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사사키 아타루의 발소리만 들으면서 걸어온 밤이 있었어요. 그러다가도 책만 읽는 내가 답답해질 때도 있었는데, 스토너를 읽다가 “자네는 (책과) 사랑에 빠진 걸세.”라는 말을 듣고 또 집어들고 책을 읽던 ^^ 그 기억을 떠오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려고, 살고 싶어서 그래.” 울컥하네요

syo 2020-09-06 12:02   좋아요 1 | URL
하나님은 책을 사랑하며 굳건히 읽어나가시는 분이신가 보다....
저는 이놈들과 애증의 관계라서, 제가 책이 좋아서 읽고 있는건지 아니면 책이 싫어서 읽어 없애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읽는건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더라구요 ㅎㅎㅎㅎ 어쨌든 살려고 읽는 거긴 한데...

하나 2020-09-06 12:1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오해 노노합니다 ㅋㅋㅋ 저도 살려고 억지로 읽다가, 저는 심지어 힘들어서 도망쳤다 돌아온 걸요 ^^ 애증 너무나 공감됩니다. 본가에서 다시 나올 때 호기롭게 위대한 개츠비, 호밀밭의 파수꾼만 가져온 저예요 ㅋㅋㅋㅋㅋ 지긋지긋해서. 저는 오히려 쇼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책에 대한 열정에 이제 나는 너무 날라리(?)인가 싶었는 걸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04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프고 아픈 일은 조금씩 줄이고, 기쁜 일 즐거운 날 행복한 시간은 조금씩 늘리면서 살아요. 저도 고병권 선생님 니체 책 다시 읽어볼까 싶네요ㅎㅎ 가지고는 있는데 읽은 건 하나듀 안 남았어요 ㅎㅎㅎ

하나 2020-09-04 10:5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저도 고병권 선생님 책 되게 좋아해서 글 남겨요. “그러나 니체는 적어도 자기 삶의 많은 순간들에서 주인이었다.” 같은 문장이 좋아서요.

반유행열반인 2020-09-04 21:0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아주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두 권 정도를 읽었는데(제 뒤에 꽂혀 있는 걸 보니 읽긴 했었나 본데) 현재는 안 읽은 상태나 마찬가지여서 부끄럽네요. 그런 좋은 문장이 담긴 글을 쓰시는 분이었군요 ㅎㅎ 일단 가지고 있는 니체 시리즈 둘을 읽고 자본 시리즈도 읽는 게 소망입니다. (될까..올해 안에 될까...)

syo 2020-09-06 12:02   좋아요 2 | URL
두 분의 아름다운 만남이 제 서재에서 이루어져서 썩 기분이 기쁩니다^-^

공쟝쟝 2020-09-05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쓸쓸하네요.. 가을이다....

syo 2020-09-06 12:02   좋아요 0 | URL
가을에는 역시 쓸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