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

 

 

1

 

창밖은 난세다. 이 정도의 대혼란을 겪은 적이 없는 것 같다.

 

 

 

2

 

건넛집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침잠이 없는데 마침 귀도 어두우셔서, 매일 아침 거세게 틀어놓은 TV 뉴스로 상쾌한 하루를 열어젖히신다. 덕분에 보수단체 지도자 아줌마가 확진 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또랑또랑한 앵커 목소리에 고막을 아주 신명나게 얻어터지며 syo의 하루도 강제 열림 당했다. , , , 하는 할아버지의 뾰족한 추임새. 끈적끈적 몸에 붙어있던 꿈의 파편들이 사운드 폭격을 맞고 일거에 소각되었고,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그저 눈만 껌뻑거린다. , 진짜, 오랜만에 겁나 야한 꿈 꾸고 있었는데!

 

 

 

3

 

엎어져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두 시쯤 잠든 모양이다.

 

 

 

4

 

나에게 무엇을 해 주며 한 주를 또 건너왔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한다고 사랑하는데 생각만큼 사랑이 쉽지가 않다. 남을 사랑할 때만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나를 사랑할 때도 이런 걸 보니 갈 길이 참 멀다. 오래 만난 여자친구는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귀기 전에도 그렇게 말하고 사귀고 나서도 한동안 그렇게 말했다. 그 말과 별로 상관없는 이유로 헤어졌지만 어쨌든 헤어지고 나니 그 말이 제일 끈질기게 기억에 남았다. 철 지난 화두가 맛있게 익었다. 늦었지만 따서 입에 넣고 천천히 궁굴려 보는 중.

 

 

 

5

 

읽히지 않는 책은 그냥 미루어두기로 한다.

 

 

 

6

  

그때 괄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무슨 말이든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약정된 침묵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 어차피 차선이란 없는 거였고, 거짓말은 재고자산, 상상은 부채, 차변과 대변은 서로 합을 맞출 생각도 없고. 그냥 쏟아버리는 게 제일이야, 싸는 게 답이야, 어차피 자고 나면 또 나오는걸. 샤워기의 생명은 수압이지, 식은 죽도 먹어 본 놈이 잘 먹고 죽어 때깔 좋은 법이지, 구더기 무서워 못 담근 장맛 변하면 그땐 가게 접어야지. 들은 게 많아서 이러나 벌어진 입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나방들, 팔랑팔랑 중력 속에 희미해진다. 별로 고음도 아닌데 삑사리는 나고. 취소 버튼 누른 줄도 모르고 탬버린을 쳐대는 내가 그래도 리듬감은 있지 않니? 새우깡은 대답이 없네, 초조하다. 노래방 새우깡이라 그런가. 농심이 아니어서 그런가. 중국 OEM이라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바이브레이션은 좀 늘지 않았니? 가사는 좀 외웠어. 1절만 하는 게 매너니? 매너가 사람을 만드니? 사람은 좋은 마이크가 만들지. 박수가 만들지. 그거 알아?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면 원숭이는 바나나가 밥숟가락인 줄 안대. 이런 말을 듣고도 박수를 쳐주는 게 매너니. 내가 들고 있는 게 마이크니 바나나니 밥숟가락이니. , 그건 새우깡이야. 내가 누른 건 간주점프야. 나방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동안 네 입에서 나온 건 구더기야. 그건 먹고 죽어도 때깔이 보장되지 않지. 수압의 생명은 보증금이야. 그리고 네가 하는 모든 말은 분식회계고. 그러니까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할 거야?

 

그때 괄호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읽은 ---


 

103.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

 

젊은 날의 나는 왜 그리도 집요하게 김영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결과 지금도 김영하무감각증을 앓고 있는데 이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거지. 지루한 사변과 메마른 섹스가 버무려진 이런 소설을 내가 아는 20대의 syo라면 당연히 사랑해마지않았을 것인데.

 

잘은 모르겠지만 프랑스 문학잡지 정도로 보이는 리르라는 곳에서 나온 한줄 평이 책 뒤표지에 인쇄되어 있는데 ‘1990년대 서울의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언급한다. 그런가보다 싶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반반치킨이 만능 키처럼 작동하던 시절이 길었다. 얼핏 요즘은 조금 덜한 것 같아 보여도, 어떤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도착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 키로 열린다.

 

 


104. 생쥐 혁명

민지영 지음 / 장춘익 감수 / 곰출판 / 2019

 

시도는 대단했다.

 

 

 

 

--- 읽는 ---

맑스주의 역사강의 / 한형식

미셸 푸코 / 양운덕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 : 니체와 고흐 /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혼밥생활자의 책장 / 김다은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

길 잃기 안내서 / 리베카 솔닛

나 자신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갖춘 ---

스피노자의 철학 / 질 들뢰즈

홉스 /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젠더 트러블 / 주디스 버틀러

헤겔에 이르는 길 / 미타 세키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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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0-08-22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밥생활자의 책장 팟캐스트 재미있습니다. 책은 안 읽어봤는데 어떤지 궁금하네요. 주말 무사히 보내세요~

syo 2020-08-22 21:54   좋아요 0 | URL
책도 좋아요.... 업자답게 글도 좋고 너무 좋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8-22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글 보는데 왜 갑자기 코인노래방 가고 싶죠...(눈치 없음) 코로나 꺼지면 언젠가는 ㅋㅋㅋ

syo 2020-08-22 21:54   좋아요 1 | URL
코노.... 내 영혼의 옹달샘이여...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08-23 05:22   좋아요 0 | URL
영혼의 생명수 퍼올리러 가 봅시다...김혼비 책 읽다 아 진짜 다음에 가면 봄날은 간다 부를 거야! 헸어요. 코로나새끼 춤추는 지금은 말구요ㅠㅠ

공쟝쟝 2020-08-22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통과해 도착한 오늘의 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