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1

 

달그림자 머리에 이고 뚜벅뚜벅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오며 왼편으로 마을버스 몇 대를 스쳐 보내고 나면 부지런히 숨이 차오르다가 마침내 잊어야 할 것들도 잊지 말아야 할 것들도 가팔라지는 호흡에 젖어 마음 뒤꼍으로 뿌옇게 물러나고 나는 그저 시익시익 숨 고르기만도 바빠지는데, 바로 그때쯤 바람막이 지퍼를 내리고 이마에 맺힌 땀을 한 번 훔치면 오른쪽으로 슬며시 나타나는 좁은 골목 속에 우리 집이 있다-

 

우리 집 약도를 이렇게 그릴 거라면 우선 달빛을 짜서 잉크를 만들어야겠다. 나는 요즘도 이 오르막의 밤 얼굴을 만나는 중이다.

  



 흐르는 별들의 음악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겠다


 사라지는 별의 꼬리 쪽으로

 한 뼘 더 가까워지는 어둠 사이

 귀가 아프도록아름다운 별의 사운드 트랙

이은규별의 사운드 트랙부분

 

 

 

2

 

집의 등 뒤로 산이 있다. 산을 휘감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남한산성에 닿는다고 한다. 옅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밤의 앞머리를 빗질하는 나무들이 늘어서서, 옥상에 오르면 나는 바람이 불어줄 때까지 하염없이 나무들을 바라보고 마주 선다. 흔들흔들 좌우로 몸을 흔들며 선다. 나무들이 보면 바람이 부는 줄 알 것이다. 지금 바람이 불어서 저기 저 키 작은 인간이 흔들리고 있는 줄 알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불지 않아도 늘 흔들리는 것이 있는 줄 모를 것이다.

 


가끔은 나 자신과도 헤어지고 싶다과거의 나내 타고난 것이 원망스럽다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과 헤어질 수는 없다그리고 아무도 없이 살아갈 수도 없다어차피 날씨가 추워지면시련이 닥치면누군가는 떠나갈 거라 해도 늘 추위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아니 추위가 와도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누군가와는 함께 지내야 한다.

서한겸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3

 

봄이 오고 비가 오고 휴일도 오면, 오후에 옥상에 올라 비를 맞아보고 싶어졌다. 한번쯤은.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린다고들 해서 언젠가부터 나는 비를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감기에 걸릴까 봐 겁나서는 아니었고,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린다는 데도 굳이 비를 맞는 이상한 사람이 될까 봐 겁이 나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비를 맞지 않는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상한 사람이 될까 봐 겁내는 사람이 된 것이다.

 

기억하는바,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린 적이 없다.

 



사람은 점차로 자기 운명의 모습과 뒤섞여 닮아 간다따라서 길게 보면 사람은 자신의 상황들 자체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신의 글

 

 

 

4

 

욕창을 막기 위해 몸을 굴리는 것과 비슷한 심정으로, 시집을/시집이라도/시집만큼은 읽어야겠다. 모니터 안에 깔린 하얀 백지가 요즘 좀 광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바쁘고 새로 익힐 것이 많아도, syo는 그런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인간이 되어서는 syo가 안 된다. 책 밖에 나 있는 수많은 길 가운데 한 길을 갈 것이었다면, 그냥 지나쳐온 더 넓고 잘 닦여진 그 많은 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 올라탔었어야지.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잘 참다가 조급해지고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그게 쉬운 일이었다면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영혼의 편지 1


늘 더 잘 쓰고 싶어요제가 가지고 있는 문장이라든지어떤 평범한 것들을 더 윤을 내서 빛나게 해야 하는데더 잘해야 하는데그런 생각을 계속해요그렇지만 잘하지는 못하고현상을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쳐서 늘 헉헉거려요더 잘 쓰고 싶고예전에 안 썼던 것도 써보고 싶고요한데 늘 시간에 쫓기고 마감에 쫓기느라.

최은영소설가의 마음


우리가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자신을 비난하며 스스로 기쁨을 망쳐놓고 있다면 이런 아름다운 오후천상의 오후는 생겨나지 않는다자신의 가련한 처지나 잘못한 행동 따위를 생각한다면 나를 찾아온 이런 영예로운 나날에서 기쁨을 누리기 어려워진다젊음의 시절이 지나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나의 만족을 망쳐놓는 불순물이 되기 쉽다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온전히 끊을 수만 있다면나의 나날들이 훨씬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 갖춘 ---


바람의 무늬 / 강미옥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 이현우

타인의 얼굴 / 강영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마리아 미즈

어떤 양형 이유 / 박주영

나는 무조건 합격하는 공부만 한다 / 이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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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0-03-08 0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 달빛을 짜서 만든 잉크는 크림수프처럼 걸쭉한가요?^^

2.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 나를 흔드는 거,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건 내가 바람을 흔드는 거

3. 물속에 발을 담그면 다리가 굵어보이듯이 세상에 나를 담그면 내가 보는 나와 실제의 나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내가 조금씩 다르겠죠. 그 중 어떤 나로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선택의 문제에 접근하면 생각만큼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아집니다.

4. 직장에 다니면서 책읽고 글쓰기를 놓지 않는다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육신은 일의 바다에 푹 담가져 노곤한데, 정신은 삭막하고 점점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 들더라구요. 쉽게 떨쳐버리지도 못하는 지긋지긋한 관절염에 걸린 인간에 빙의하여 삐그덕거리며 흔들려요. ‘시집을/시집이라도/시집만큼은‘의 어미에 담긴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짧은 댓글을 남깁니다.

5. syo님의 글은 햇살같은 마음에서도 비를 맞는 마음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풍경을 묘사하는 글에 감성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따라가다보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syo님만의 독보적인 아우라가 뿜뿜~^^*

syo 2020-03-14 21:50   좋아요 1 | URL
나비종님 오랜만입니다.
징징대느라 막 쓴 글에 넘치게 좋은 말씀 하나하나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일주일만에 와 보니, 막상 제가 뭘 썼는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ㅎㅎㅎ

당최 알라딘 들락거릴 짬이 안 나서 슬프네요. 가끔 나비종님 시 읽고 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반유행열반인 2020-03-08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요일에 비가 온대요. 옥상의 나무가 비를 맞겠구나.

syo 2020-03-14 21:52   좋아요 1 | URL
으아... 그 화요일보다 다음 주 화요일이 더 가까운 시점에서야 댓글을 달게 되네요...
다음 주 화요일에는 뭐가 온대요??
아니다, 이렇게 여쭤봐 놓고 또 다음주 토요일에나 확인하게 되려나.....

비연 2020-03-08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열심히 읽는 쇼님. 멋지심~

syo 2020-03-14 21:53   좋아요 0 | URL
일하며 읽으며 치고 나가는 더덕단 여러분 존경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