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눈
1
낮에 잠깐 눈이 나렸는데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런 마음을 전했더니 그 사람이 말했다. 입술과 입술 사이의 거리가 이십 킬로미터라고. 말은 아름다움과 슬픔 사이 어디쯤 와서 꽂혔다. 잠시 가슴을 매만졌고, 밤이었고, 그사이 눈이 그쳤다.
2
‘마르크스’라는 활자를 읽지 못한 기간이 이렇게까지 오래였던 경우는 처음인 듯하다. 더덕단 미션 도서는 1월 것도 읽지 못했는데 2월 지나 벌써 3월이다. 알라딘은 일주일에 한 번쯤 들어오는 것 같은데, 쓰지도 못하는 마당에 괜히 읽느라 기웃거리다보면 이런 스스로의 처지가 더 불쌍하게 여겨질까봐 일부러 발걸음을 안하는 중. 그래도 가끔 와서 읽보면 syo 하나 없어도 세상은 쌩쌩 잘만 돌아가고. 아, 역시 사람은 겸손해야지, 겸손 겸손.
3
읽지 않으니 쓰지 않는다. 쓰지 않으면 쓸 줄 모르게 되는데, 이런 퇴보의 과정을 지켜볼 때면 과연 글쓰기도 예술의 일종이긴 하구나 싶다. 손이 굳고 문장이 입안에서 손끝에서 텁석거릴 때, 수사가 경직되고 리듬이 불규칙할 때, 그럴 때 연마하고 담금질하기 위해 교범으로 마련해 둔 책들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잠시 멈췄다 가도, 뭐 괜찮을 것 같다.


뇌를 후려치는 문장
심장을 간지럽히는 문장

서늘한 가운데 뜨거운 문장

뜨거운 가운데 서늘한 문장
찔린 자리조차 아름다워질 것 같은 문장
따라 에두르다 보면 어느새 가운데 와 있는 문장


그리고, 문장
4
읽고 싶은 것은 있고 읽고 싶지 않은 것이 없다.
잃고 싶은 것은 없고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재밌게도, 같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