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정경湖畔情景 fin.
네가 사준 옷을 입고 네가 사준 신을 신고 네가 사준 폰을 들고 네가 사준 안경으로 길을 더듬어 너와 나를 만나게 해준 친구의 결혼식장에 다녀왔다.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너인데, 오직 딱 하나, 너만 그 자리에 없었다. 이런 유행가 가사 같은 진부한 일이 진짜로 일어났다. 이제 노래가 늘겠다.
했던 그 많은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지만 마지막 약속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남자가 대걸레에 물을 착착 적셨고 필용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필용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얼마쯤 걷다가 또 극장 쪽으로 향했지만 다시 몸을 돌려 종로에서 멀어졌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계속 멀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이제 피시 버거는 안 판단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필용은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_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 읽은 -
+ 여행자를 위한 고전철학 가이드 / 존 개스킨 : 223 ~ 344
- 읽는 -
- 소문들 / 권혁웅 : ~ 58
-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 줄리언 반스 : 208 ~ 304
- 제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634 ~ 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