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라도

 

 

1

 

재미는 없지만 군대가 인간에게 생각할 거리와 시간을 제공한다는 명제는 참이다.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의 양대 산맥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저 새낀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겠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질문에서 총천연색의 탐구주제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그 가운데는 진심 인간의 실존을 건드리는 치명적인 질문들도 많은데,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내 용무는 무엇인가이다.

 

syo의 부대에는 이런 풍습이 있었다. 예를 들어 포대장실(syo는 포병이었다)에 들어간다 치면, 노크 두 번 하고 문을 연 즉시 포대장이 있을 법한 위치를 향해 경례를 올려붙인다. 그리고 이런 정해진 멘트를 친다. “필승, 병장 XXX 포대장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용무는 OOO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메워야 할 빈 칸은 두 군데이다. 그 중 하나는 20년 넘게 부르고 불려온 내 이름이라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두 번째 빈칸은 만만치가 않다.

 

가령, 포대장이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고 치자. 그렇다면 용무는 호출입니다- 인가? 아니지. 호출은 포대장이 한 거잖아. 그럼 용무는 응답입니다- 인가? 용무가 응답인거 너무 웃기잖아. 그렇다면 용무는 포대장님이 찾으셔서입니다- 인가? 아니지, 포대장이 찾은 건 포대장의 용무지 내 용무는 아니잖아. 뭐지, 내 용무는 도대체 뭐지……. 이런 고민은 주체와 타자, 호명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찰이라 하겠다.

 

혹은 이럴 수도 있다. 병장 김땡땡이 PX에서 일병 이땡땡이 먹고 있던 냉동만두 몇 조각을 집어먹는 장면을 상병 박땡땡이 목격했다. 평소 불의를 보면 늘상 참아왔지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던 박땡땡은 지금 행정보급관에게 일러바치려고 행정반 문고리를 쥐고 있다. , 뭐라고 해야 할까. 필승, 상병 박땡땡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용무는…… 고발입니까? 냉동만두 몇 조각에 고발은 너무 무거운 단어가 아닐까? 그렇다면 용무는 고자질입니까? 고자질은 어쩐지 부정적인 느낌인데 박 상병은 지금 일생에 더없이 정의로운 상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용무는…… 신고? 아니야, 아니야, 얘도 아니야. 그렇담…… 고소? 고백? 리뷰? 100자평? 으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이이이런날씨바라때려치고말지자기의일은스스로하자이일병아…… 같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래가지고 부대에는 정의가 바로 서는 날이 도통 오질 않고 후임병의 냉동만두는 애꿎은 병장의 뱃속에 축적될 뿐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고뇌와 고통, 어휘를 둘러싼 치밀한 고찰과 성찰의 긴 터널을 뚫고 마침내 행정반에 들어가서 찰진 멘트를 구사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야말로 이 출입시스템의 가장 큰 허점이라 할 수 있다.


 syo : 필승, 일병 syo 포대장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용무는 휴가 복귀 신고입니다

 포대장 : , 너 누구야.

 syo : 일병 s! y! o! 

 포대장 : 너 왜 왔어.

 syo : 휴가 다녀왔습니다.

 포대장 : 그래? 그럼 인마 신고를 해야지.

 syo : ……(그러니까 인마. 귓구멍이 막혔냐 생각이 없냐 내가 여길 뭐하러 왔겠냐 확 그냥 국방부에 신고한다) 신고합니다. 일병 syo…….

 

 

 

2

 

갑자기 저 이야기가 생각난 이유를 안다. 군대 꿈을 꿨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syo는 사격에 굉장히 능하여 열아홉 발을 쏘아 열아홉 발을 맞추는 명사수였다. 그래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다섯 번째 과녁이 넘어가는 순간,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사실을. 난 군대에서 그렇게 총을 쏘면서 스무 발 중 네 발을 넘겨 맞춰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확실히 꿈이었다. 꿈일 수밖에 없었다. 빼박이었다.

 

그렇다면 꿈인데 뭐 어때 하며 옆에서 재수 없게 생긴 수염을 달고 총을 쏘라 마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놈의 국방무늬 가랑이에 스무 번째 총알을 박아 보았다. 빵야!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는데 syo는 총 맞은 가랑이를 내려다보며 유유히 코를 파고 있었다. , 너 미쳤어? 왜 사람을 맞춰! 지금 이게 뭐 꿈인 줄 알아? 라고 진짜 꿈속의 등장인물이 말했다. syo는 계속 코를 파면서, 근데 진짜 코는 왜 팠지? 하여간 계속 코를 파면서 응, 지금 이게 뭐 꿈인 줄 알아.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걔가, 그러면! 꿈이면! 꿈이면 사람 가랑이에 총 쏴도 돼? 그렇게 돼 있어? 라며 도무지 물러서지 않고 따져 물었다. 그건 그랬다. syo는 어…… 하며 콧구멍에서 손가락을 뺄 수밖에 없었다. 기세를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그는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건 인격의 문제야! 이 사람을 보라고! 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좀 보란 말이야. 총 맞은 남자는 가랑이를 제 가랑이를 꽉 누른 채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랑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손을 대 지혈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syo는 슬슬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 일부러 거길 노린 거지? 이 모든 상황을 다 계산하고, 그렇지? 넌 정말 쓰레기로구나! , 이쯤에서 잠이 깨면 좋겠는데. 말을 해봐. 왜 대답이 없어. 니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치디? 눈을 떠, 현실의 syo야 눈을 번쩍 뜨라고……. , 이거 꿈이라고 그냥 도망치면 끝날 것 같지? 아냐, 니 인격은 이제 결딴났어. 그걸 니가 알았어. 넌 이제 망했어. 눈 떠! 제발 눈을 떠! 넌 도망칠 수 없어. 이미 구석에 몰렸어. 넌 끝이야. 넌 끝이야. 넌 끄 넌끄넌끄…….

 

눈을 떠보니 728분이었다. 멍청하게 천장이나 바라보며 있었는데 2분이 지났는지 알람이 울렸다. 서늘한 가을 아침이었다. 창 너머에서 넘실넘실 넘어 들어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노력해서 좋은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최소한 남의 가랑이에 총을 쏘는 인간은 되지 말자고. 꿈에서라도 말이다.

 

 


연민을 가장 중시하라슬픔을 질식시키지 말라슬픔을 소중히 간직하고 돌보아주어 슬픔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해질 수 있도록 하라깊이 애도하는 게 바로 새롭게 사는 일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나는 곧 시력을 회복하여 나의 주위가 캄캄한 데에 놀라지만그 어둠이 나의 눈에는 쾌적하고도 아늑하다아니나의 정신에어둠은 까닭 없는불가해한참으로 아련한 것처럼 되어서아마 더욱 쾌적하며 더욱 아늑한지도 모르는 일.

마르셀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읽은 -

+ 시경을 읽다 / 양자오 : 99 ~ 165

+ 이토록 쉬운 통계 & R / 임경덕 : 154 ~ 344

 

 

- 읽는 -

- 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191 ~ 300

- 경제학 연습 미시편 / 정병열 : ~ 85

- 파이썬 코딩 도장 / 남재윤 : ~ 206

- 철학의 신전 / 황광우 : 106 ~ 210

-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 101 ~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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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3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3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3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19-11-03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 얘기 중에 제일 재미난 syo님의 군대 얘기ㅎㅎㅎ
너무 한낮의 연애 얼마 전에 읽었는데!

syo 2019-11-03 08:44   좋아요 0 | URL
남의 군대 얘기는 원래 재미가 없잖아요.
그 중에 제일 재미나봤자....
못생긴 애들 중에 제일 잘생겨봤자죠 ㅎㅎㅎㅎ

단발머리 2019-11-03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취소예요. 300 뭐에요 ㅠㅠ
지금이 군대 이야기 쓸 시간이지, 진도 뺄 때에요?

syo 2019-11-03 08:45   좋아요 0 | URL
300까지 읽고 이만하면 내 할 몫을 다 했다는 생각에 주말에는 제2의 성을 봉인합니다 ㅋㅋㅋㅋㅋ
군대 이야기는 할 게 너무 많아.....
쓸 거 없을 때 곶감처럼 빼먹으려고 잔뜩 쌓아놨어....

단발머리 2019-11-03 08:52   좋아요 1 | URL
허어참... 우리 아는 사이끼리 이러지 맙시다! 군대 이야기 하나 추가!!!

비연 2019-11-03 13:57   좋아요 1 | URL
300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