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昌寧 3
1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아이의 키를 넘을 만큼 웃자란 풀잎이 풀벌레 소리에 닿아 하늘거리고 있었다. 멀리 노을이 내려앉는 곳으로부터 붉고 따스한 냄새가 실려 왔다. 드디어는 밝음과 어두움이 몸을 섞는 시간, 별빛이 물 위로 총총 찍어놓은 발자국을 아이가 세는 동안 잠자리도 긴 꼬리를 흔들어 별자리를 깁는다. 행님아 피리 불 수 있나? 아이가 물었다. 옆에 붙어 앉아 있던 청년은 말없이 목장갑을 벗고 풀잎을 잡는다. 시간이 묻기 시작해 코밑이 거뭇거뭇하다. 길이를 가늠하여 똑, 끊어낸 얇은 악기는 노을이 버무려진 초록빛. 초록색 소리가 날 거야, 아이는 기다린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면 색깔도 냄새도 윤곽조차 기억하지 못할 그 소리를 아이는 기다렸다. 흐릿한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두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두고 싶다. 내 중심에 조그만 자리를 내어, 안쪽으로 한 뼘 더 끌어당기고 싶다. 아이는 꿈을 먹고 자란다고 했다. 얼마쯤 먹고 또 얼마쯤 뱉어가며 자랐더니 겨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더니 이제 기억을 먹고 자란다.
기억을 먹고 자라 한다.
한아는 이후 채 겪어보지 않은 광막함에 대해 계속 떠올렸고, 우주가 언제나 광막한 곳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속에도 그것이 일부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기게 되었다. 누군가는 어렴풋하게, 누군가는 살을 찔러오는 강렬함으로 안쪽의 춥고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는 것이다.
_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아무리 길고 복잡한 운명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삶은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게 되는 순간이다.
_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타데오 이시도로 크루스(1829년~1874년)의 전기」
아는 이야기를 다 쓰면 그다음엔 어떤 글을 지어야 하나 근심한 적이 있다. 바보같이 몸도 글도 한결같을 거라 생각하던 때의 일이다. 단어 하나가 몸을 완전히 통과한 후에는 그 전과 전혀 다른 뜻이 된다는 걸 몰랐다. 안다고 믿었던 말, 쉽게 끄덕인 말, 남몰래 버린 말……. 스러진 푯말을 따라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갈 때면 이따금 몹시 늙은 얼굴을 한 서사들이 멀찍이서 손짓하며 서 있기도 했다.
_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2
마르크스는 과격한 동시에 단순한 명제가 뿜어내는 치명적인 매혹을 놓치지 않을 만큼 명민했다. 스스로도 그걸 알았다. 그는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썼다. 마침내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명제는 단순하고 과격할 수밖에 없음을 세상에 증명했거나, 혹은 그렇다고 믿게끔 세상을 속이는 데 충분할 만큼은 치명적인 글을 써낼 수 있었다.
3
읽거나 말거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최성은 옮김 / 봄날의책 / 2018
이 책에서 쉼보르스카가 서평한 책들 중 95%는 지금도 만날 수 없고, 앞으로도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녀가 읽은 책을 우리가 읽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녀의 서평이 얼마나 빼어난 것인지를 그저 어림어림 해볼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딱 한 편, 노벨상으로 수제비를 끓인 시인은 서평으로 칼국수를 끓여도 핵존맛임을 너끈히 짐작해 볼 한 편이 있어 그대로 옮긴다. 이렇게 한 꼭지를 통으로 따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지 이 짓을 할 때면 늘 고민하지만,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매력을 알았으면 좋겠다.
동아시아에서는 용꿈을 꾸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기생 출신의 한 여인이 꿈에서 복숭앗빛 호수를 향해 뛰어드는 초록빛 용을 본 후, 그녀의 딸은 열여섯 살의 나이에 젊고 부유한 양반 자제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젊은 청년이 그녀를 보고도 첫눈에 반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춘향은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아도 "온 나라를 뒤흔들 만큼"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기에. 게다가 그녀는 우아한 몸가짐과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었고, 시를 짓는 데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출신계급이 미천했기 때문에 그녀가 오를 수 있는 위치는 양반의 비공식적인 아내 자리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도령은 멀리 떨어진 한양에 가서 "검푸른 구름 위로 높이 오르기 위해",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관직을 얻고 출세를 하기 위해 춘향을 떠나게 되었다. 가여운 춘향의 눈물도 애원도 소용없었다. "만 개의 버드나무 가지가 떠나는 바람을 잡을 수 있겠는가?" 결국 춘향은 홀로 남겨졌고, 언젠가는 연인이 돌아오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한 채, 무슨 일이 있어도 절개를 지키겠노라 굳게 결심했다. 그래서 탐욕스러운 늙은 관리가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하자 차라리 목에 형틀을 쓴 채 옥에 갇히는 쪽을 선택했고,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매질을 당했다. 쇠가 박힌 대나무 몽둥이가 그녀의 작고 여린 발바닥을 부서트렸다. 하지만 초록빛 용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복숭앗빛 호수에 뛰어든 건 아니었다. 마침내 젊은 도령이 돌아왔고, 검푸른 구름 위 매우 높은 곳까지 오른 덕분에 추악한 관리를 벌하고, 춘향을 자신의 공식적인 부인으로 삼을 수 있었다.
열녀 중의 열녀 춘향에 관한 이야기는 구전되어오다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글로 기록되었고, 당연히 한국 고전문학의 정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어떤 이들은 생생하고 정교한 묘사를 높이 평가하고, 다른 이들은 생동감 넘치는 러브신을 극찬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는 수준 높은 감성에 찬사를 보내고, 사회비판적인 요소와 여성의 힘겨운 운명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에 매료된 이들도 있다. 그밖에도 판타지적 요소가 없다는 점을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덕목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찬사의 밑바탕에는, 리얼리즘이야말로 문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동화나 민담은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혼합되어 있으므로 미성숙한 하위 문학이자 아직 나비로 성장하지 못한 애벌레와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동화나 민담을 읽는다는 것이 상당히 힘겨운 일일 것이다. 모든 종류의 기적이나 환상은 미학적으로 불오나전한 일종의 죄악으로 치부되고, 개연성에 위배되는 요소들은 전부 유치하기 짝이 없게 여겨질 테니 말이다. 그런 이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 이 춘향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그런 사람들에겐 이따금 안면근육의 경련을 일으키게 만들 것이다. 매우 강렬한 해피엔딩을 맞고 있지만, 사실 거기에 춘향의 으깨어진 두 발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으니 말이다. 과연 춘향의 발꿈치뼈는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잘 붙었을까. 안심해도 좋다. 완벽하게 잘 아물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춘향은 잘생긴 배우자 옆에서 절뚝거리며 걷지도 않았을 테고, 첫날밤에 원앙이 수놓인 이불을 덮어 자신의 뒤틀린 두 발을 애써 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화는 결코 현실의 삶에 완전히 항복하는 법이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틈만 나면 훨씬 나은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현실을 난처하게 만든다.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86-88쪽
서평을 저렇게 써낼 수 있다면, 와, 사는 게 얼마나 더 재미있어질까!
--- 읽은 ---
+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 ~ 224
+ 지금 당장 경영학 공부하라 / 김태경 : 272 ~ 383
+ 현대철학 아는 척하기 / 이병창 : 331 ~ 522
+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 장옥관 : ~ 119
--- 읽는 ---
=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 69 ~ 168
= 수학님은 어디에나 계셔 / 티모시 레벨 : ~ 120
= 도남의 날개 / 오노 후유미 : ~ 218
= 딩씨 마을의 꿈 / 옌롄커 : ~ 154
=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 / E. K. 헌트 : ~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