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입과 하나도 없는 입

 

 

1

 

서른이 넘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아무도 물어오지 않았다. 나는 형용사를 잔뜩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궁금한 것은 명사(무슨 직업을 가지고 싶어?)거나 동사를 가장한 명사(무슨 일을 하고 싶어? =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싶어?)였다. 나는 예쁘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 나는 내가 하는 말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오답이야.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 출제자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구나? 시간이 갈수록 그 간단해 보이는 질문이 점점 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2

 

엄마는 입을 다문다. 두 주째 감기가 떨어지지 않으니 병원을 옮겨보자는 아들의 말에 입을 다문다. 이제 운동이 필수라고,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게 수영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알아봐 주겠다는 딸의 제안에도 입을 다문다. 국을 해 놓으면 절반은 그대로 버리니까 앞으로는 국을 좀 적게 끓이자고 하면 입을 다물고, 밥을 해 놓으면 절반은 그대로 버리니까 밥이 되면 퍼서 냉동실에 넣는 방식을 도입하자고 해도 입을 다문다. 새벽 두 시, TV를 틀어놓고 자고 있기에 나가서 TV를 끄면, 왜 보고 있는 걸 맘대로 끄냐고 따진다. 자길래 껐다고 대답하면 안 잤다고 우긴다. 엄마, 코 골았어. 나 안 잤어. 그럼 TV 끄기 전에 보던 거 뭐였는지 말해봐. 그러면 엄마는 입을 다문다. 어제는 동생이 울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걱정이 되서 신경을 쓰면 짜증을 내고,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입을 꾹 다물고, 그럼 내가 아예 그냥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둘까? 그럼 엄마가 편하겠어? 그러라면 그렇게 할게. 엄마는 입을 다물었다. 동생은 휴지를 계속 뽑아 눈가로 가져갔다가 주먹에 꽉 쥐어 뭉치기를 반복했다. 거실은 더웠고, 밖은 시원했다. 다들 일어나자. 나가서 공원 몇 바퀴만 돌고 오자. 막상 나오니 엄마는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빙빙 돌았다. 나와 동생은 엄마의 뒷모습, 옆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천천히 걱정을 나누었다. 자꾸만 고집을 부리는 엄마, 자꾸만 아이가 되는 엄마, 작년보다 올해 더 어려지는 엄마는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까? 우리 가족은 도대체 어떻게 될까? 나는 입을 다문다. 동생은 입을 다문다. 엄마는 박수를 치며 잰걸음으로 공원을 돈다. 낮은 돌담 위에서 새끼 고양이가 조용히 사료를 먹고, 12시간 뒤면 비가 내릴 하늘에 가득 들어찬 어둠을 박수 소리가 밀어내는 동안, 사람은 입을 다무는 밤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다른 걸 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구실이 떠오르지 않으면 엄마는 입을 다문다. 이 잔소리꾼들은 언젠가는 지칠 것이므로, 엄마는 입을 꾹 다물고 그저 눈만 굴리다가 아들과 딸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면 다시 자기 마음대로의 세상을 산다. 누가 그 세상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다시 입을 꼭 다문다. 엄마는 입을 다무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3

 

아버지는 입을 다무는 법이 없었다. 3초 전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3초 만에 할 말을 생각해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겐 언제나 이유가 있었고 언제나 말이 있었다. 아버지가 가진 말의 많음이 가족들이 가진 아픔의 많음이 되었다. 아버지를 겪으며 나는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인간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제 엄마는 말의 없음으로도 사람의 마음에 바늘을 꽂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정말로 나는 입을 다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누구나 남을 자기로밖에 통과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나는 조금 위안이 되었던가아니 조금 슬펐던가.

이슬아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같은 행성 위에서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그 사실을 위한 삼으라고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그곳에 매번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이런 식으로시간을 끄셔도 소용은."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김초엽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읽는 ---

= 우리말 강화 / 최경봉 : ~ 177

= 글이 만든 세계 / 마틴 푸크너 : ~ 148

= 청소부 매뉴얼 / 루시아 벌린 : ~ 45

= 미학 수업 / 문광훈 :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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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8-06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말수 적은 사람이 되어 보고 싶은데 아마 죽어야 가능할 것 같아요. ㅎㅎㅎ

syo 2019-08-06 19:44   좋아요 2 | URL
저는 만나는 사람에 따라 말수가 좀 달라지더라구요. 좋고 싫고에 달린 것 같지는 않아서, 원리를 알 수가 없어요....

반유행열반인 2019-08-06 19:45   좋아요 0 | URL
제가 syo님께 할말하않하게 만드는 놈이 되지 않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syo 2019-08-06 19:47   좋아요 1 | URL
열반인님이라면 제가 침묵해도 그 공간을 침묵시키지 않을 역량을 보유하고 계실테니, 한결 부담이 없겠어요. 그건 좋은 일이지요.

레삭매냐 2019-08-06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alkative 퍼슨은 아예 해당되지
않을 것 같더라는...

저는 침묵이 싫더라구요.

syo 2019-08-06 19:44   좋아요 0 | URL
때나 기분에 따라 다르지만, 저도 대체로 침묵보다는 다변쪽이 차라리 나을 때가 더 많더라구요.

2019-08-07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7 0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7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9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9-08-08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가 아이한테 잔소리하고 아이가 자라면 엄마한테 잔소리하는군요 그런 거 해도 듣는 사람은 기분 안 좋으니 안 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런 거 안 하면서도 엄마랑 잘 지내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그러지는 못하죠 저도 그래요 저는 제가 거의 말을 안 해요 공원 몇 바퀴 돌기는 함께 할 수 있으니 가끔 그걸 하는 게 어떨까 싶네요


희선

syo 2019-08-09 09:45   좋아요 1 | URL
공원 몇 바퀴 도는 걸로 해결이 되는 영역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가 늘 걱정입니다. 정말 ‘잔‘소리로 끝날 거면 안하고 말겠는데, 건강 문제가 곧 생명 문제랑 직결되는 노인이시니 잔소리가 잘지만은 않은 것 같은 게 또 자식의 마음이지요.

2019-08-11 0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1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