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가끔 내가 공대생이었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한국어 다음으로 잘 다루는 언어가 C언어였다. 신봉하는 신은 정보통신이었고 우리 자기 다음으로 사랑하는 자기가 전자기였다. 전공 공부를 꽤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공강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중도 가서 슈뢰딩거 방정식이나 유도하면서 시간 때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그리고 진짜 했다……. , 젊은 syo. 보고 싶다, 이 미친놈아.

 

졸업 후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열심히 쌓았던 전공 지식은 이제 0으로 처절하게 수렴했다고 봐야지.

 

저랬던 syo가 지금의 syo가 된 것은 대충 서른 줄을 넘어서부터다. 알라딘 공간에 처음 얼굴을 들이민 것은 4년 전이고, 뭔가 써대기 시작한 것은 2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 syo의 서재에 발을 들이는 이웃들은 대체로 syo가 문과일 거라고 추측한다.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봐도 그래 뵌다. 내가 이과생이라고 하기엔 빼어나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고, 이과생들도 잘 쓰는 이들은 응당 잘 쓰지만 그들은 절대 syo처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짧은 문장, 단번에 핵심을 움켜쥐는 문장을 쓰는 그들은 부사를 멸종시킨 것도 모자라 형용사까지 사냥하는 문장의 정복자들이다. syo도 수식을 좋아하고 그들도 수식을 좋아한다. 그런데 내 수식은 덕지덕지 꾸미는 수식이고 그들의 수식은 수가 들어있는 식이라서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죄 휘발되었지만, syo는 자신이 한때 공대밥을 먹었다는 게 남몰래 뿌듯하다. 전자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것을 은근슬쩍 즐기는 허영도 있다. 도서관에 가면 공학 도서들이 꽂혀 있는 서가를 반드시 방문하여 각종 OO이론, OO공학 따위의 제목이 박혀 있는 두꺼운 하드커버 책등을 에로틱한 손길로 어루만지곤 한다. 빌려올 것도 아니면서.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는 것처럼, 공대생일 때는 공대생이란 게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았었는데.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공학할 땐 공학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나는 젊고 전자 공학을 했구우나아~


지금 다시 시켜주면, 정말 재미나게 잘할 것만 같다. 공학 책을 만지는 손길이 자꾸만 야해지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걔랑 동거가 몇 년인데. 몸정이 무서운 법이라 그랬어…….

 

그렇지만 안되겠지. 소년은 쉽게 늙었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기만 하구나.




그때까지 제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더 오래여도 좋다는 듯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 말입니다

_ 박준, 〈메밀국수〉부분


영원한 것은 없다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은 결국 과거의 일부가 된다미래가 세련됐다거나 과거는 낡았다는 말이 아니다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뜻이다.

정은우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 마술사인 척하고 놀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기억해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어. 그 당시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든다든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했다기보다는 마법으로 나 스스로를 변신시키기를 원했지. 그래서 나는 고리를 돌리는가 하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쪼그리고 앉아서 나 자신이 사라지거나 둔갑하도록 주문을 외워대곤 했어. 물론 이불을 걷어냈을 때 원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야 하지. 하지만 기억을 떠올릴 때 더 중요한 건 실제로 그곳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던 짧디짧은 한순간이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감정을 단순히 사라지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쁨으로 해석하고자 해. 그 미래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어. 매일같이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단 하루일지언정 더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난 정말이지 시간이 흘러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얼른 죽게 말이지." 클레어가 말했다.

_ 페터 한트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읽은 ---

+ 소설을 살다 / 이승우 : 95 ~ 248

+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 신승철 : 188 ~ 298

+ 크로스 사이언스 / 홍성욱 : 196 ~ 353

+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 이제니 : ~ 93


 

--- 읽는 ---

= 모스에서 잡스까지 / 신동흔 : ~ 143

=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 ~ 88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황선우 : ~ 77

=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주경철 :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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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9-07-14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웃 터뜨리며 읽었습니다. Syo님 글은 내용과는 별개로 늘 재밌어요. 심각한 글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시고. ㅎㅎㅎㅎ

syo 2019-07-14 08:51   좋아요 1 | URL
저로서는 굉장히 애처로운 글입니다만 ㅎㅎㅎㅎㅎㅎㅎ 어쨌든 웃음은 소중한 것이니까요^-^

단발머리 2019-07-14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자기 다음으로 사랑하는 자기가 전자기...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7-14 08:51   좋아요 0 | URL
요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7-1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만 보고 괜히 쫄았지 뭐에요.(이유는 알아서 짐작하세요!) 세상의 큰 틀은 간명한 수식 몇 개가 단단하게 받치는지 몰라도... 덕지덕지가 사람 사이를 잇고 울리고 웃기고 사랑 불쌍함 그리움 같은 마음을 만드는 거겠지요. 그 두 가지에 다 걸쳐 계시니 syo님은 큰 장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읽는 syo님 닮은 syo님이 닮은? 소설가가 장점은 곧 단점이라든데. 그럼 제 단점도 장점이 되려나? 바보 문돌이 인 것도?

syo 2019-07-14 13:02   좋아요 1 | URL
좋은말씀 학원 다니세요?? 요즘 읽고 있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 칭찬폭격기라는 말이 나오던데, 누가 바로 떠오르더라구요.(누군지는 알아서 짐작하세요!)

그나저나 그 소설가가 누군지 궁금하니까 귓속말로 저한테만 살짝 알려줘봐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07-14 14:13   좋아요 0 | URL
직접 이름 말씀 하시면 쑥스러워서 그러죠? 소설은 작년에 한 권 밖에 안 읽었고 산문집 읽고 있는데 범인은, 이 사람이야! 하는 느낌이 똭- 얼른 다 읽고 리뷰 쓰면 밝혀지겠네요. syo 글을 좋아하니까 이 작가 글도 한 권 말고 더 봐야 될 거 같은 기분입니다. (다 드러내지 말고 감추는 거도 가르쳐 주네요 )
칭찬 폭격은 진짜 제가 해 본 적이 없는 거라 연습 대상이 되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열심히 연마해서 복직 후 제대로 써 먹어 가련한 청춘들을 구제해 보겠습니다.

syo 2019-07-15 10:00   좋아요 1 | URL
진짜 모르겠어어서요 ㅋㅋㅋㅋ 열반인님도 꽤 읽으시니까....
리뷰가 얼른 올라오기를 기다려봐야겠네요.

충분히 칭찬에 재능이 있으십니다. 가련한 청춘들이 고공비행하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19-07-15 11:47   좋아요 0 | URL
syo님 발뒤꿈치 겨우 쫓아가는 중인 저보고 꽤 라고 하시면 본인은 꽤꽤꽤꽤꽤꽤래꽤뫠꽤 라고 자화자찬 하시는 건데....그러셔도 됩니다. ㅎㅎㅎㅎ
칭찬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 받은 건 처음입니다. 썩히지 말고 앞으로는 잘 써 먹어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