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모
오늘은 독서실에 나가지 않았다. 날이 흐려 집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앉아 있어도 충분히 버틸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서 버틸 수 있다’는 문장과 ‘끊어놓은 독서실을 가지 않는다’는 문장 사이에 들어갈 접속사가 ‘그래서’ 혹은 ‘그러므로’ 계통인지, ‘어쨌든’, ‘그러거나 말거나’ 계통인지를 잘 생각해보면...... 좋은 핑계 감사합니다.
실은 어제(日)도 독서실에 나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데이트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약속시간은 오후 4시. 기상이 아침 7시였으므로, 푸닥푸닥 씻고 먹고 나가서 8시에 독서실에 도착했다면 7~8시간의 공부량은 확보할 수 있었을 거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장님 여기 핑계 한 접시 추가요!
사실은 그저께(土)도......

나는 알파고 이후 쏟아진 온갖 요란한 기사들보다 '멍때리기 대회' 기사가 더 혁명적인 함의가 있다고 느꼈다. '미래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지?'라는 질문만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꼭 일을 해야 되나? 그런데 일이라는 게 뭐지?'라는 질문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기계에게 일을 빼앗기는 상상만 할 뿐 기계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는 노는 상상은 하지 못할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과거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쓸데없는 놀이나 미친 짓일 뿐일 거다. 혀와 배꼽에 피어싱해주는 직업, 프로 스케이트보더, 먹방 찍어 돈 버는 유튜버들,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유행의 패션 산업...... 인간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유희의 축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곤 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전히 동굴 생활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쾌락은 우리를 단조로운 동굴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모험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쾌락의 카탈로그를 늘리고 늘리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재미도 없는 성공충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엔 즐기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
_ 문유석, 『쾌락독서』
"미루기는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페라리가 말했다. "만성적으로 일을 미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능한 인간으로 여겨지기보다 노력을 안 하는 인간으로 여겨지길 바라지요."
_ 앤드루 산델라, 『미루기의 천재들』
여름아 부탁해 제발 인마
여름이 도착하고 걸칠거리들이 가벼워짐에 따라, 지난 가을 겨울 봄에도 역시 제거하지 못했던 안심 등심 삼겹살 부위에 꽉 들어찬 육즙을 가리는 일이 난망해졌다. 이쯤 되면 분노에 절여진 궁금증 같은 게 생긴다. 도대체 말랐다는 건,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을 때도 아랫배가 넘실거리지 않아 바지의 밴딩 부분을 덮칠 일도 없는, 모든 부위가 진퇴의 때와 장소를 아는 강단 있고 야무진 몸뚱이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걸 내가 이번 생에 알 수는 있는 걸까?
올해는 복숭아가 유독 실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어디서 들은 말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제발 사실이길 바란다. 100독100복을 목표로 달렸던 것이 벌써 1년이란 말인가.
이 작은 생태계의 20초들
태어난 지 20년 됐다고 알라딘이 자기 생일상을 거하게 차렸나보다. 많은 알라디너들이 20초씩 모아서 알라딘의 생일 선물을 준비한 듯한데, 정작 즐거운 것은 알라딘보다 다른 알라디너들인 듯. 중간에 스톱을 걸고 영상 속 서가에 무슨 책이 꽂혀 있나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근데 나만 이랬을까? 여긴 알라딘인데.
보고 있는데 으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 하는 비명이 절로 나왔다. 뭐지 이 오글거림은. 마치 우리 아빠가 TV에 나와서 우리 가족 사랑한다- 이러는 걸 보고 있는 듯한 감정...... 진짜 생판 남이면 시큰둥하고 말 것을, 본 적도 이야기 나눈 적도 없는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어느 정도는 가족 같다. 이게 알라딘인데.
그리고 그 중에는 요즘 syo와 연일 댓글교신 중이신 모 이웃님도 계셨다. 주기율표 담요 실물 잘 봤습니다. 후후후.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어서, 다 이해되지 않아서,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엔 있다. 효율로만 평가하려고 하는 이 세상에 비효율로 남아 있어서 고마운 것들. 우리를 간신히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실 그런 비효율들이다.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너무 무심히, 모든 것에 효율을 들이대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단 한 번의 심벌즈를 위해 한 시간 넘게 준비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0의 존재가능성을 밝히느라, 우주 탄생의 가설을 세우느라, 한 문장으로 우리를 구원하느라 밤을 새우고 있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 어딘가가 편안해진다. 따뜻해진다.
_ 김민철, 『하루의 취향』
내 테두리가 형성되기 전에 우리는 세상에 놓인다. 세상 속에서 비로소 나의 경계가 지어진다. 내가 아니라 나의 성립 이전의 무한한 세상이 먼저고, 나는 그 세상의 자극과 부름에 대응하고 응답함으로써 성립한다. 부름과 응답, 이것이야말로 삶의 원초적 사태다. 내가 아닌 것을 받아들여 느끼고 거기에 응대함으로써 나의 삶이 꾸려진다. 세상에 대한 파악은 이런 삶 가운데 그 삶에 덧붙여지며 그 일부가 된다. 나의 테두리가 얼마나 단단하고 얼마나 넓혀지든 그것은 내가 아닌 바깥과 견주어질 수 없다. 앎은 세상을 전유하는 중요한 방식이지만 제한된 것이며, 유한한 내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_ 문성원, 『철학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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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리 페이퍼 써야 한다.
그리고 공부 좀 하자.
--- 읽은 ---


+ 쾌락독서 / 문유석 : 108 ~ 262
+ 초스피드 회계어 마스터 / 조지 쯔베타노프 : ~ 138
--- 읽는 ---



= 철학의 슬픔 / 문성원 : ~ 157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페터 회 : ~ 107
=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 김진영 : 150 ~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