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昌寧

 

 

학교가 파하면 아이는 바람을 세며 걸었다. 풀이 누웠다 다시 일어나면 그걸로 바람 한 개. 집으로 오는 길 햇살 아래를 지나며 아이는 강아지풀을 뜯었다. 그리고 그 가녀린 걸 그물삼아 백 개의 바람을 낚았다. 모자란 날도 있고 넘치는 날도 있었다. 바람이 넘치는 날이면 백까지만 세고 나머지는 들로 풀어주었다. 아이에게 바람은 백 개로 딱 한 묶음이었다. 한 묶음 바람을 묶어 손에 들고 도착한 아이는 바람처럼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여기 엄마 바람 한 묶음. 부엌문을 밀고 나온 엄마가 햇살처럼 웃는다. 아이구, 우리 아들 고맙습니데이. 아이가 한 손에 쥔 투명한 바람묶음을 엄마는 두 손으로 받았다. 이걸 엄마 다 주면 우리 아들은 뭐 할낀데? 아이가 작은 두 팔을 활짝 펼친다. 엄마, 괘안타. 바람이, 이래 많다 아이가. 아이의 말이 옳았다. 마당이 온통 바람이었다. 익은 앵두나무 그늘 위를 볼 빨간 바람이 달리고 있었다. 가지런히 모은 앞발에 턱을 올리고 누운 잡종 강아지의 꼬리에도 바람이었고, 한 달에 한두 번 나타나 골방에서 기타만 두드리다 새벽녘에 허깨비처럼 사라지는 주인 할배 막내 행님도 바람이었다. 할배, 행님아는 또 어데 갔어요? 아이가 물으면 늘 같은 대답, 대처에 공장에 돈 벌러 갔지, 그 대답이 바람이었다. 그라믄 또 언제 와요? 다시 물으면 아무런 말없이 한숨만 푹 내쉬는 할아버지, 깊은 그 한숨이 바람이었다. 또 바람이었다.

 

여름이었다. 바람이 제철이었다.

 

 

 

1



‘3·1혁명이라는 용어가 올바른 이름인 데에는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확인하게 된다.

김삼웅3·1혁명과 임시정부, 98 


사실 김삼웅 선생님의 저작은 전반적으로 만듦새가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저런 문장들이 많지는 않지만 왕왕 발견된다. 문장 뿐만은 아니다. 여러 사람이 한 챕터씩 나눠 집필한 책에서 종종 발견되는, 중언부언이라 하고 말기에는 좀 과하지만 중복서술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닌 미묘한 반복서술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 선생님은 이미 평전 영역에서는 전무후무하다할 금자탑을 쌓아올리셨고, 따라서 이런 지적질이 너무도 소소하고 시시하게 느껴질 만한 거장이시긴 하다. 그럼에도 그 어마어마한 수의 저작들을 생각해 보면 아쉬운 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2



  성공 여부만 따지는 게 맞는 건가그렇게 따지면 일제 때 독립 운동이란 게 언제 성공할 수 있었나예컨대 3·1운동참으로 엄청난 민족적 의의가 있지 않나헌법 전문에도 들어가 있다그렇지만 성공 여부만 놓고 따진다면 '그건 실패를 거듭한 것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수많은 독립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당장 성공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만세를 외치고독립군으로서 일본과 싸우고그러다 죽고 처형당하고 고문당해서 몸이 망가지면서도 싸우고 또 싸운 것 아닌가.

  단재 신채호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것과 관련해 '우리한테는 무엇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의 문제만 있는 것이지성공 여부를 가지고 얘기해선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난 모든 독립 운동자에 대해 단재의 이야기가 맞다고 본다당장에 성공하길 바랐다면강력한 일본에 대항해 싸우는 것처럼 바보가 없었다그런데도 재산을 전부 탕진해가면서자식들을 가르치기는커녕 굶주리게 하면서 독립 운동에 그야말로 몸을 던져 그 많은 고초를 겪고 죽음에 이르고 한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대의그것 때문 아닌가.

서중석김덕련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106-107 

 

 

패배를 통해 배운 것들이 선생님들로 하여금 예정된 패배 속으로 몸을 던질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라 믿는다.

 

어차피 성공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기왕이면 다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번 실패를 늘 욕심냈다. 뜻대로 되진 않았다. 많이 질수록 잘 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져도 져도 지는 건 무섭고, 무섭고 무서울수록 지는 싸움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졌다. 자꾸 싸우는 법을 잊어갔다. 그러나보니 나는 이제 아무것도 되려 하지 않을 것 같다. 참을 수 있는 불의는 죄다 참을 것이고,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것들도 참을 수 있는 것이라 스스로를 속여 가며 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 이기는 건 몰라도 잘 지는 법은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채 버리지 못했다. 승리도 사람을 만들고 패배도 사람을 만든다. 저때나 지금이나 승리는 귀하고 패배는 일상적인 것이 세상이라, 우리는 누구나 패배로 자기를 빚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많은 패배들을 그대로 다 시궁창으로 내버리고, 일생에 몇 번 거머쥘 수 없는 승리만 가지고 빚은 나란 얼마나 척박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언젠가 한 번 크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 질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모레 또 그 길을 당당하게 갈 수 있기 위해서, 오늘도 잘 져야만 한다.

 




코란을 낭송하는 소리가 방에 울릴 때나는 바바가 발루키스탄에서 검은 곰을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바바는 평생 곰과 씨름을 했다젊은 아내를 잃고혼자서 아들을 키우고사랑하는 조국을 떠나고가난에 시달리고모욕당하고...... 결국 그가 이길 수 없는 곰이 다가왔다하지만 그때도 그는 자기 식으로 졌다.

할레드 호세이니연을 쫓는 아이, 258


 

 

 

3



펠프스와 화가인 그의 아내 로즈메리 벡은 방이 두 개 뿐이고 방에 연결된 주방이 하나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침실에는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었어요그들은 종종 거기서 음식을 먹곤 했지요다른 방은 작업실이었는데조심스럽게 선으로 구분하여 반은 아내가 사용하고 반은 그가 사용했답니다그 집엔 서가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그 서가는 아내가 사용하는 구역 안에 자리 잡고 있었고 서가의 일부도 아내가 사용했지요따라서 그가 소유한책은 그 수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아마 서른 권이나 서른다섯 권 정도였을 겁니다보르헤스가 우주에 대한 은유로서 묘사한 무한한 바벨의 도서관 각 서가에 있는 책의 수와 똑같은 수입니다서가에 있는 그 어떤 책도 펠프스가 좋아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다른 책으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었어요다른 책으로 대체되어 서가에서 쫓겨난 책들그리고 서가에 꽂힐 기회도 얻지 못한 서평용 증정본들과 여러 책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스트랜드 서점으로 가거나 아무나 집어 갈 수 있도록 복도에 쌓이게 되었죠.

제임스 설터소설을 쓰고 싶다면, 18 

 

책을 줄이려 한다. 책은 물질이고 심지어 되게 견고한 물질이라, 적을 때는 잘 모르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무시못할 공간 문제를 야기한다. 내다 팔아도 되지 않을지, 단 한번이라도 망설여졌던 책들을 골라 그 중 최소 절반을 내다 팔 생각이다. 팔기 전에 딱 한 번씩만 더 읽고. 그러나 3일에 한 권 읽는 지금 같은 속도라면 저 책들을 전부 내다팔 때쯤 TV를 틀면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사를 하고 있겠다.....

 

우선 강신주 선생님의 철학 개론서들이 몇 걸려들었다. 감각 없던 상꼬맹이 시절, 화려한 문장에 감동 받아 구비해 놓았던 몇몇 영미 소설가들의 책도 책장에서 내려왔다.

 

20대 초반에 요시찰 소설가 4천왕비슷한 걸 구상한 후 이날 이때껏 옥좌를 둘러싼 치열한 혈전이 벌어져왔다. 많은 작가들이 등극했다 축출되었고, 가끔은 옥좌를 탈환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4개의 옥좌 자체는 유지되고 있다. 명예로운 초대 4천왕에 이름을 올렸으나 지금은 종묘에 위패로만 남아 있는 작가들 중 두 명의 책들을 이번 기회에 와장창 걷어서 박스에 집어넣었다. 안녕, 파울로 코엘료. 고마웠어,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굿바이 스페셜로 한 번씩만 읽고 나면 그 책들은 알라딘의 손을 거쳐 예치금으로 변모할 것이다. 그 예치금으로 나는 현 4천왕 중 1인의 국내출간 전작 보유를 달성할 것이다. 코엘료여, 무라카미여, 미안하다. 그러나 원래 지난 모든 사랑은 그저 지금 사랑을 위한 거름일 뿐인 것을......


서른다섯 권의 책만 남기는 일은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할 듯하다. 하지만 많이 살고 또 많이 읽을수록, 꼭 남기고 싶은 욕심에 질 수밖에 없는 책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에 과연 나는 몇 권까지 남길 수 있을까. 지금은 맑스, 레닌, 트로츠키 관련 책만 세도 서른다섯 권이 넘어가는데.....

 

 

 

--- 읽은 ---

임정로드 4000km / 김종훈 외 지음

3·1 혁명과 임시정부 / 김삼웅 지음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 서중석, 김덕련 지음

소설을 쓰고 싶다면 / 제임스 설터 지음 / 서창렬 옮김

 

 

--- 읽는 ---

인간이란 무엇인가 / 백종현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이영미 옮김

묵묵 / 고병권 지음

나는 왜 불온한가 / 김규항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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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e 2019-03-26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안녀어어엉.... 다른 한분은 누구입니까?

syo 2019-03-26 08:39   좋아요 1 | URL
초대 4천왕이라면 다른 두 분도 지금은 자리에 안 계시고 추억 속에만 계십니다만, 진륭 선생님과 이영도 선생님이시지요.

2019-03-26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6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6 0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6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6 0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6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6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6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6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26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작하는 작가의 한계는 기존에 썼던 책들의 내용과 비슷한 느낌의 책을 써는 것이죠. 김삼웅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분이 쓴 책들의 주제를 생각하면 자기복제식 글쓰기의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을 것 같네요. ^^

syo 2019-03-26 08:45   좋아요 1 | URL
말씀에는 공감합니다. 여러 작가들이 평전을 쓴 인물이라면 굳이 김삼웅 선생님의 평전을 선택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직 김삼웅 선생님의 평전만 존재하는 인물들이 서른 명은 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문체가 워낙 건조해서 가끔은 정말 이건 ‘자료집‘이 아닌가 싶을 정도거든요. 그렇게 보면 확실히 김삼웅 선생님의 작업들이 큰 의미가 있긴 하다 싶어요. syo는 알라딘 활동 초기에 자기복제식 글쓰기로 책 찍어 파는 작가들 까는 걸로 주 컨셉으로 잡았을 만큼 그런 부류들을 싫어하는데도, 김삼웅 선생님 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데가 있달까요 ㅎㅎㅎㅎㅎ

stella.K 2019-03-26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요시찰, 4대천왕 표현이 재밌군요.
저도 날 따뜻해지면 20년 가까이 박스에만 담겨져
쿨쿨 잠만자고 있는 책들을 다 드러내리라 지난 스산한
초겨울 찬바람 날 때부터 벼르고 있는데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고 일단 책탑을 허물어야 하는데 이게 또
장난이 아니라. 요즘엔 가급적 책을 안 사려고 하는데
일 때문에 자꾸 사게되네요.ㅠ

아, 글구 굿바이 스페셜로 한 번 더 훑어주시는 스요님의
독서력에 경의를 보냅니다. 전 절대로 할 수 없는...ㅠ

syo 2019-03-27 09:36   좋아요 0 | URL
말 그대로 훑는 거예요 훑훑훑.
책을 자꾸 사셔야 하는 일이라면 그거 어쩐지 멋진 일이겠다 싶습니다. 필요하면 사셔야지요. 전 필요 없는데 갖고 싶어서 꾸역꾸역 산 것들을 팔려는 것인디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