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가슴가슴사슴

 

 

1

 

도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

 

언젠가 이 고요함을 그리워 할 날이 오기도 하겠으나.

 

 

 

3

 

하루 종일 활자와 더불어 뒹굴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활자들이 줄지어 벌떡 일어나 귀싸대기라도 차례차례 한대씩 후려쳐주고 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자음은 왼싸대기로, 모음은 오른싸대기로, 구두점들은 턱주가리로 출정한다. 집결지는 인중이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뭉쳐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것이다. 알겠나, 제군들. 살아서 인중에서 다시 만나자. 무운을 빈다.

 

 

 

4

 

바람도 조류도 없고 보이는 거라고는 수평선 밖에 없는 소금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이런 평화, 당혹스럽다. 사랑하는 이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사슴 같다 말하려 했지만 무심결에 가슴 같다 말하고 만 속셈 빤한 빙충이마냥 당혹스럽다. 인간은 분주할 때 평화를 그리워하고 평화로우면 분탕질을 치고 싶은 동물인가. 아닌가. 나만 그런가. 어허허.

 

 

 

5

 

그러고 보면 김진영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강의 중에 '사건'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입에 올렸던가그런데 그것들은 모두가 책에서 읽고 들은 풍문이고 코드들이었다사건은 그런 책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그건 위기를 만난 마음속에서 태어나는 '사건들'이다이 사건들은 놀랍고 귀하다정신과 몸이 함께 떨리는 울림이 울림은 모호하지 않다종소리처럼 번지고 스미지만 피아노 타음처럼 정확하고 자명하다더불어 글이 무엇인지도 비로소 알겠다그건 이 사건들의 정직한 기록이다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도 알겠다그건 백지 위에 의미의 수사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오선지 위에 마침표처럼 정확하게 음표를 찍는 일이다마음의 사건-그건 문장과 악보의 만남이기도 하다.

김진영아침의 피아노, 53 


활자들이 벌떡 일어나 귀싸대기를 때리진 않았으나 걔네한테 맞았다면 아마도 지금 이런 기분일 것이다. 아무 사건이 없었으니 무엇도 억지로 쓰면 안 되겠다. 인중이나 문지르면서, 사슴 따위랑은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가슴에 대해서나 생각하면서, 이 미친 고요함이 지나가기만을 대차게 기다릴 밖에.

 


  새벽 네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도시가 폭격을 맞았다눈길이 닿는 곳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모든 것이 물속에 잠긴 듯저녁에 기이한 적막이 도시를 뒤덮었다폭격기들도 침묵했다.

  저녁 무렵 도시에는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교외의 집 몇 채와 불가사의하게도 폭격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종탑만이 온전했다시내 중심가의 유서 깊은 아름다운 옛집들과 대성당은 파괴되었는데종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그래서 종지기는 저녁마다 그랬듯이 138개의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 청동으로 주조한 종을 쳤다종소리가 시내 곳곳에 울려 퍼졌다.

  종지기는 자신이 맡은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그런데 때로는 그런 행동이 전혀 의미가 없다상징도 아니다도시가 멸망하면 상징들도 그 의미를 잃는 법이다그러나 종소리는 울려 퍼졌고폐허 위를 맴돌았다부상당한 자와 죽음을 앞둔 자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그들은 평상시에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상했으며도시의 유일한 의미는 벽이 무너져도 침묵하지 않는 그 소리였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물론 종지기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종지기에게는 월말에 돈을 받는 것만이 중요했다그래서 걱정을 하며 이를 악물고 종을 친 것이다그러나 새카맣게 그을린 돌 틈 사이에서 종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진 탓에도시는 폐허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그것을 이해해야 한다종을 울리자.

산도르 마라이하늘과 땅, 122-123


  "농담이 아니에요." 발터가 헐떡이며 웅얼거렸다. "나는 졌습니다항복이에요."

  "졌다라." 라우레아노가 휘 한숨을 쉬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수두룩하게 졌지만 저는 이제 둔감합니다저는 맨날 지지만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브루나 아르파이아역사의 천사, 388-389 


 

 

 

--- 읽은 ---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 / 이수은 지음

How to read 푸코 / 요하나 옥살라 지음 / 홍은영 옮김

오래된 연장통 / 전중환 지음

세상을 바꾼 화학 / 원정현 지음

 

 

--- 읽는 ---

권력 / 스기타 아쓰시 지음 / 이호윤 옮김

자본론 함께 읽기 / 박승호 지음

작은 수학자의 생각실험 / 고의관 지음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 홍일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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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2-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의 피아노, 읽어야겠당!
읽어야겠어요. ㅎㅎㅎㅎㅎㅎ
이건 속마음 토크 아님.

syo 2019-02-22 13:0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중요한 건 마음이 아니라, 정말 읽으시느냐 하는 것이지요!

2019-02-22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9-02-22 13:05   좋아요 0 | URL
악. 오프라인에서도 제가 자주 하는 실수입니다...... 고인께 이 무슨 무례를;;
지적해주신 덕에 정정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2-2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언가 매일 변화 있는 삶이 과연 좋은 삶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

syo 2019-02-22 22:03   좋아요 0 | URL
와 ㅎㅎㅎㅎ 저는 무언가 매일 변화 없는 삶이 과연 좋은 삶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중인데, 역시 인생 알 수 없군요......ㅠㅠ

공쟝쟝 2019-02-25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책읽고 싶당 ㅠ

syo 2019-02-27 21:28   좋아요 0 | URL
이 대사 어쩐지 조만간 나도 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