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쩍
망가진 온도계를 만져보는 일은 처음이라 조금쯤은 의아한 눈빛일 수 있었겠으나 막상 손끝이 닿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그마하게 자라나는 수은 기둥을 보니 정말로 의아하였습니다. 겨울은 끝도 없이 춥고 나는 이런 겨울은 처음인데 온갖 산 것들을 죽은 것으로 오해하기에 겨울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혹은 손끝을 가져다 죽은 것의 깊은 잠을 깨웠다고 다시 한 번 믿어 보기에도 모자라지 않았으니 제법, 제법 겨울이었겠습니다. 나박나박 눈 위로 눈 앉는 소리에 몸 뒤척이는 밤 위에 밤 쌓여 짙고 깊어질수록 아이들은 온도계에 관심을 가지는 듯했습니다. 앞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슬쩍 만지고 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습니다. 슬쩍과 슬쩍이 참 많이도 모였을 테니 우리는 아마 우리가 숫자로 확인한 것보다는 슬쩍 더 추운 겨울을 보냈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조금 더 따뜻하다는 오해를 선물처럼 주고받으며 슬쩍 더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모른 척 슬쩍 손을 잡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닌 척 슬쩍 안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무것도 에돌지 않고, 의아함도 오해도 없이 곧장 따뜻할 수 있었을 텐데요.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요, 우리는. 포옹 뒤에 입맞춤이 찾아올 것이 두려웠을까요, 포옹 뒤에 입맞춤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 두려웠을까요. 오해 위로 오해가 쌓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겨울에, 우리는 서로를 오해했을까봐 겁냈을까요, 오해가 아니었을까봐 겁냈을까요. 온갖 산 것들이 사실은 죽었을까봐 망설였을까요. 죽은 것들이 아직 살았을까봐 끝내 손끝을 거두었을까요.
그 겨울이 어떤 방식으로 끝나고 새봄이 왔는지, 오늘 우리의 회고 사이에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조금쯤은 의아한 눈빛일 수 있겠으나, 그래도 나는 그 겨울에 오해하기 어려운 슬쩍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온도계가 망가져도 수은 기둥은 따라 망가지지 못할 테고, 그릇에 따라 생김이 바뀔 수 있겠으나 슬쩍 손끝이 닿으면 슬쩍 부풀어 오를 테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거나 알아채지 못하거나, 오해하거나 오해하지 못하거나, 잊었거나 잊지 못했거나, 죽었거나 죽지 못했거나, 이 모든 게 끝도 없이 추운 그 겨울의 탓이었거나 그렇지는 못했거나, 어쨌든 나는 이제 조금만 추워지면 덜컥 그 겨울의 슬쩍을 생각합니다.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_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사양』
언젠가 매기와 함께 여의도 역에 갔다가 “이 역의 환승 통로가 이렇듯 깊은 이유는 강의 밑바닥을 팠기 때문입니다”라고 쓴 안내문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때 빡치는 사람이 많나봐, 매기가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오죽하면 한강물 탓이라고 써놨겠어, 했던 것이.
_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_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읽은 ---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조주관 옮김
슬픈 인간 / 정수윤 엮고 옮김
사양 / 다자이 오사무 지음 / 유숙자 옮김
--- 읽는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지음
캘리번과 마녀 /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 황성원, 김민철 옮김
나의 사랑, 매기 / 김금희 지음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 용경식 옮김
인생교과서 부처 / 조성택, 미산, 김홍근 지음
수학의 감각 / 박병하 지음
지하에서 쓴 수기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김근식 옮김
파이썬으로 시작하는 코딩 / 브라이언 칼링, 말리 아데어 지음 / 민지현 옮김 / 권갑진 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