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화석
1
어머니의 말처럼 내가 웃는다면, 돌아간 아버지의 웃음으로 내가 웃는다면,
나의 웃음이 아버지의 웃음을 닮았듯이, 아버지의 웃음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웃음과 또 닮았다면, 미소 짓는 입꼬리나 웃음의 끝소리를 붙잡고 한없이 하염없이 거슬러 올라 태초의 웃음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말도 없고 불도 없던 시절에 인간이 지닌 단 하나의 도구였을 그 표정까지 미칠 수 있을까. 큰 나무를 미는 바람처럼, 큰 나무를 쪼개는 번개처럼, 인간의 눈가를 밀고 입가를 쪼개고는 한순간에 사라지는 그 신비한 전설을 만져볼 수 있을까. 돌아간 아버지의 웃음을 오래 기억하면, 많이 기억하면, 많이 기억할 수 있도록 많이 웃게 하였더라면 좀 더 수월했을까.
많이 웃어야겠다. 행여 누군가 첫 번째 웃음으로 찾아가는 행로를 내 웃음에서 시작할지도 모르니, 최대한 많이, 오래, 웃음을 남겨놓아야겠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사는 이들의 마음에다 웃음을 총총 박아놓아야겠다.



스페인 여행에서 어느 도시가 가장 좋았냐는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다 마드리드를 꼽았다. 호안 미로의 작품이 지천이던 바로셀로나나 남부 스페인 바다를 파란 쟁반의 은구슬같이 품은 말라가가 근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마드리드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에서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삶이 너절할수록 간절해지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하고 싶다는 바람도 한 꺼풀 벗겨보면 웃고 싶은 마음에 다름없을 것이다.
_ 정은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어서, 다 이해되지 않아서,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엔 있다. 효율로만 평가하려고 하는 이 세상에 비효율로 남아 있어서 고마운 것들. 우리를 간신히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실 그런 비효율들이다.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너무 무심히, 모든 것에 효율을 들이대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단 한 번의 심벌즈를 위해 한 시간 넘게 준비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0의 존재가능성을 밝히느라, 우주 탄생의 가설을 세우느라, 한 문장으로 우리를 구원하느라 밤을 새우고 있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 어딘가가 편안해진다. 따뜻해진다.
_ 김민철, 『하루의 취향』
야마토, 내일도 만나자. 그리고 별것도 아닌 얘기를 날이 저물도록 하자.
_ 카와하라 카즈네, 아루코, 『내 이야기!! 2권』
2
초기의 대포는 가볍고 짧았으며, 튼튼하지 못했다. 무게가 130킬로그램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나무 받침대(포대)위에 대포를 올려놓고 쏘았다. 화통을 만드는 금속이 약해서 옮기다가 몸체가 깨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대포를 전쟁터로 옮기는 게 아니라 대포를 만드는 장인들이 전쟁터를 따라다녔다. 즉 전투가 벌어지면 장인들이 전장으로 가서 주변 지역의 종을 징발한 후 그것을 원료로 해서 대포를 만들었다. 전투가 끝나면 장인들은 대포를 녹여 다시 종을 만들어주었다.
_ 정기문,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종을 녹여 대포로 만드는 마음과 대포를 녹여 다시 종으로 만드는 마음의 간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수레에 실려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종을 바라보는 마음과, 사람을 죽이거나 성벽을 파괴하고 돌아와 대장간에서 다시 나오는 종을 바라보는 마음의 간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마을의 종루에 걸려 하루의 끝을 알리던 종의 마음과, 한 사람의 끝을 알리고 돌아온 종의 마음 사이에 있을 간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인간은 대포 하나 만들 여유가 없어도 기어이 싸우고 무너뜨리고 죽인다.
3
형, 단풍이 빨갛게 물드는 거 왜 그런지 알아?
가을이잖아.
노폐물이야.
뭔 소리야.
노폐물이라고.
뭐라는 거야.
나무가 죽어 가면서 배출하는 오물을 보고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관광하고 사진 찍고 그러는 거라고.
야, 너는 쫌.
한창 살아 있을 때, 푸를 때는 왜 아름답다고 하지 않지?
말을 알아듣게 해.
푸를 때는 왜 덥다고 짜증만 내냐고.
여름은 덥고 더우면 짜증나지. 당연하잖아.
다 푸르니까 모르지 사람들은. 살아 있는 그 함성을. 시끄럽다고.
야, 최신우, 너도 그래.
내가 뭐.
시끄럽다고.
......
너도 푸르고.
......
아름답고.
......
하루만 더 살아 줘.
뭐 달라진다고.
제발, 하루만.
다를 게 뭐냐고.
어떻게든 찾아볼게, 내가.
뭘 해, 형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너한테 꼭 필요하다면.
_ 최진영, 『비상문』
잃어버린 친구가 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꼭 필요했을 그 친구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은 우리들은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 왜 그랬을 지에 대한 이런 저런 추측들은 금세 추문이 되고, 이내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 깊은 밤이면, 잠 못 이루고 생각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그 추억에 가닿는 밤이면, 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 친구의 것이 되지 못한 이유는 내 것 역시 되지 못했고, 끝내 이유를 찾지는 못했으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으니 살지 말아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기 전에 잠에 빠지는 통에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야 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가 내 이유가 되지 못해서 결국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는 산다. 내가 이유라고 믿었던 것들 역시 불면의 밤을 만나 깊이 해부되다 보면 시체가 되어 새벽과 함께 시궁창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나는 다음날 아침 다시 이유 없는 하루를 위해 이를 닦고 수염을 깎는 것이다.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새로운 이유를 찾아 밖으로 나선다. 하루짜리, 운이 좋으면 한 달, 한 해를 기대고 살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불면의 밤은 언제나 다시 온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차피 이유를 찾는 일은 계속 실패하고 궁극적으로 실패한다. 그렇다면 내가 친구를 잃은 까닭은, 그 친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나갈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형은 최신우를 살려 놓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살아가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서” 라는 말은,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찾지 못한다는 말로도 읽히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건 모두 다르다. 그러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안다. 그건 대개 비슷하다.
-- 읽은 --




정기문,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월터 앨버레즈,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최진영 지음, 변영근 그림, 『비상문』
김상현, 『이성의 운명에 대한 고백 순수 이성 비판』
-- 읽는 --







박이문, 『하나만의 선택』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유상균, 『시민의 물리학』
움베르토 에코, 『제 0호』
마르셀 에나프, 『진리의 가격』
정철현,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