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남자는 소리를 본다
1
문을 밀고 휘파람 소리가 걸어 들어왔다. 기다리지 않는 척 무심한 척 설레지 않는 마음인 척 설레는 마음으로 유심히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에 올려놓은 커피는 차근차근 식었다. 커피가 차가워지는 만큼 지구는 따뜻해지겠지. 그리고 너를 기다린 만큼 나는 행복해지겠지. 구둣발 소리가 걸어 들어오고,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걸어 나가고, 지구는 자꾸만 열렸다 닫히고, 미지근한 커피와 미지근해지지 않는 마음으로 얌전히 앉아 당신의 발소리, 지구가 눈꺼풀을 수억 번 깜빡인대도 오직 나만큼은 잊지 않고 들어 낼 수 있는 그 소리를 기다리는 가운데,
이윽고 저기 해 지는 쪽으로부터 온 몸에 노을을 휘감고 당신이,
이럴 때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시간이 있습니다. 노을 무렵이지요. 붉고 따스한 노을들이 인간의 등 뒤에서 인간의 등과 마음을 토닥거려주는 것입니다. 잘한 것보다 잘 못한 것이 훨씬 많은 인간의 시간 속에 노을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쓸쓸해지겠는지요.
_ 곽재구,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213쪽
2
만약 우리가 현재 상황을 바꾸게 된다면,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과 나눈 대화 덕분일 것이다. 여론의 형성 과정은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대화 상대가 무언가를 믿으면 자신도 그 무언가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자. 나도 그랬다. 결론은, 비록 사회적 통념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좋은 주장이 한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여론은 놀라운 속도로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주장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여론으로 번져나갈 수 있다.
_ 로버트 H. 프랭크,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241-242쪽
자신이 가진 말과 다른 말에 부딪혀 자신의 말을 포기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사람의 말은 사람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의 힘을 믿는다. 말의 세계에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말의 말이 있다. 그것을 ‘구조’라 불러도 좋고 ‘대타자’나 ‘담론’이라 불러도 나쁘지 않으며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어떻게 부르든 말의 세계에는 인간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거절할 수도 없고, 거절을 시도할 생각조차 하기 힘든 말들이 있다. 그 시작은 역시 사람의 입에서였겠으나 결국 사람보다 더 커진 말들이다. 말의 전장에서 우리의 싸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말의 말을 겨냥해 이루어져야 한다. 어쨌거나 말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므로. 눈앞의 인간은 절대로 말로 설득할 수 없다. 토론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뒷날의 거래에서 내주고 받게 될 거래물목들을 결정하는 장소지, 결코 마주 선 사람을 내 옆자리로 당겨오는 곳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평행선만 긋고 또 긋는 우리의 대화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낳는다. 그어 놓은 평행선은 사람의 말을 서로 만나게 하진 못하지만, 말의 말이 그 위로 달리는 한 줄 철길이 된다. 나의 말은 반드시 기록된다. 모든 말들이 담겨 있는 거대한 말의 바다에, 내가 뱉은 말은 기필코 뛰어든다. 그 바다의 성분을 바꾸고 색깔을 고친다. 정말 미세하겠지만. 언어는 개개인의 모든 발화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말로 사람을 건드릴 순 없다. 그러나 말은 말을 건드린다. 대화는 마주선 사람이 아니라, 말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정교하게, 더 깨끗하게, 더 치열하게 말해야 한다.
3
나는 그 ‘아가씨’에게는 죄를 짓는 기분으로, 그녀가 이런 말까지 들을 필요는 없을 텐데 싶은 수식어를 써가며 인물 묘사에 들어갔다. 인형이 알아듣도록 말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각종 형용사를 열거하던 와중에, 나는 그런 부류의 여자들, 콕 집어 말하자면 소위 화류계를 전전하는 여자들을, 다른 분야에선 찾아볼 수 없는 갖가지 뉘앙스까지 담아 지칭하는 알바니아어 어휘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새삼 발견했다. 라틴어, 켈트어, 비잔틴어, 심지어 오스만어 말법까지 그런 여자들을 통해서 우리 말에 스며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처한 상황에는 왜 오스만어가 가장 적합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_ 이스마일 카다레, 『인형』 114-115쪽
나는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태연자약하게 전방위 돌려까기를 시전하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아가씨' 까고, 인형(엄마)까고, '화류계를 전전하는 여자들' 다 까고, 알바니아어 까고, 그 원흉이라며 라틴어, 켈트어, 비잔틴어, 오스만어를 까면서 그 언어 사용자들의 문화를 다 까고, 그런 타국의 말법이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혐의로 또 여자들을 한번 더 까고, 마지막으로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기고 있는 오스만 사람들의 숨통을 끊었다. 세상에.....
분명 수준이 높고 문장을 재미있게 짓는 작가긴 한데, 어쩐지 친구로 가까이 지내고 싶지는 않다.
4
야구는 SK가 이겼다. 신난다. 신나는데 눈물이 난다. LG야 LG야, 대체 너는 무엇이건대, 왜 나는 너를 만나서......
-- 읽은 --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1』
아네트 C. 바이어, 『데이비드 흄』
로버트 H. 프랭크,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이스마일 카다레, 『인형』
-- 읽는 --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
곽재구, 최수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오르한 파묵, 『빨강머리 여인』
임채호, 『물리학의 기본을 이야기하다』
양영오 외, 『수리적 사고와 논리』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